2009년 10월 26일 월요일

우리는 게공선의 비참한 노동자들. 책 "게공선"을 읽고.

 

 자본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 , 노동자의 삶이란 비참함 자체였다.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지금도 많은 빈곤국의 아이들은 배움의 기회를 잃은 힘든 노동의 현장으로 몰리고 있듯, 과거 산업혁명 당시에도 다수의 어린이들과 여성들은 힘든 노동에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하루에 14~16시간을 일하면서 그들은 월급을 받았다. 그렇게 비참한 생활을 견디며 힘든 노동을 해도 그들에게는 그런 비참한 생활을 벗어날 희망이 없었다. 산업혁명 당시 노동자 어린이의 평균 수명이 17세였을 정도로 그들은 삶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죽음을 위한 노동으로 몰렸다. 그런 비참함에 분개한 많은 지식인들은 모든 노동자가 인간으로써 제대로 살아가기를 열망하며, 자본에 대항해왔고, 그런 과정과 많은 희생을 통해서 지금의 우리는 형식적으로나마 법이라는 보호막 아래서 인간다운 권리를 당연하게 주장할 있는 환경을 얻었다.

 

 하지만, 자본은 그렇게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과거 만큼은 드러내 놓고 악랄함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많은 노동자와 시민들이 쉽게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의 목소리와 힘을 강화시켜왔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천명했던 것을 기억해본다면 자본의 막대한 힘이 우리 사회에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쉽게 이해할 있다. 뿐만 아니라, 2mb정권의 통치백서가 전경련에서 만든 전경련 백서라는 사실을 본다면, 자본권력이 정치권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을 있다. 그렇게 시나브로 자본은 사회의 모든 권력과 의식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장악하기 시작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나 배려보다는 시장과 자본의 원리가 사회와 인간관계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자본에 의해서 삶의 터전을 잃고, 누군가가 자본에 의해서 목숨을 잃어도, 우리는 안타까워하기 보다는 자본의 원리와 시장의 원리를 들이대면서 "객관적"라는 말을 쉽게 가져다 붙인다. 사실 "객관적"이라는 말이 마치 대단한 진리인 것처럼 숭상하지만, 이면에는 내가 당사자의 입장이 아니라 제삼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라는 말일 뿐이다. 제삼자의 입장이라는 것이, 마치 자기가 심판이나 판단자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균형을 가지고 판단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데, 사실 착각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라는 것이 균형을 가질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사람은 균형을 가지고 중립적인 관점을 가지려 노력할 수는 있어도, 쉽게 관점을 가질 없는 존재들이다.

 

 "객관적"이라는 말에 숨겨진 다른 의미는, 이미 개인들은 너무 파편화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공공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이 우선하며, 결국에 자신의 이익에 우선하는 것이 공공의 이익이라는 것이다. 시장과 자본의 원리, 경쟁의 원리 이면에는 "소비자의 선택권" 확대라는 다른 논리가 숨어있다. 논리는 노동자나 시민의 모두가 소비자이기 때문에 마치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 자기 개인의 선택권을 중시하는 논리일 뿐이다. 자기는 것을 사고, 자기는 좋은 것을 사고 싶다는 이상의 논리는 숨어 있지 않다. 그렇게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시민과 노동자는 파편화되면서 이기적으로 변했다. 옆에서 누군가가 쓰러지고, 사라져도 자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본척한다. 나만 아니면 상관없다는 이기심의 발로로, 사회의 빈곤층이 늘어나고 중산층에 탈락한 사람이 늘어나고, 빈부의 격차가 커져도 상관이 없다.

 

 그렇게 자본은 파편화된 개인을 하나하나 공격하면서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다. 사회 안정망이라고 불리우는 법과 복지제도 그리고 노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비정규직의 확대다. 기업의 존재 이유는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정규직이 고용은 줄어들고 값싸게 고용하고 쉽게 해고할 있는 비정규직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지금의 비정규직을 18세기 산업혁명 당시 어린이와 여성 노동자에 비유한다면 과할까? 물론 그들과 비유하는 것은 과하다. 하지만, 정규직과 자본가들의 처지와 비교해본다면 비정규직은 21세기 새로운 노예제도라는 말에 이의를 달기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보호해야 정부 그리고 노동부는 해고대란설을 흘리면서 비정규직법을 개악하려고 발버둥까지 쳤다. 노동부 장관이라는 작자가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노동연구원의 원장이라는 작자는 헌법이 보장한 노동권에 대해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미국만 헌법에 노동권이 명시되지 않았을 , 많은 선진국들은 노동권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하면서. 하지만, 거기에 분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미 파편화된 개인들은 자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만 아니면 되기 때문이다.

 

 자본의 공격에 그렇게 개인은 점점 파편화 되어감은 물론이고 자본에 종속되어 간다. 삶은 점점 팍팍해지면서도 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본에 기대를 건다. 하지만, 자본은 결코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자본의 공격에 가장 취약한 젊은 세대마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이제 사회에 진출하는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나 보호막이 없는 상태이기에 처음부터 자본의 공격에 무참히 당할 밖에 없고, 당하고 있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의 중심에 그들이 있고, 비정규직의 중심에 그들이 있음에도 그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있다. 기성세대들이 쳐놓은 그물 안에서 허우적거릴 뿐이다.

 

 일본에서는 그런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1920년대에 노동자들의 처절한 삶을 그린, 소설 "게공선"이라는 책이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영화까지 만들어져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 소개될까지 되었을 정도였으니, 소설 "게공선" 대한 열풍은 상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무엇이 책을 그렇게 주목 받게 만들었을까? 읽어보면 문학적으로 그렇게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되지 않고, 기존의 일본 소설과 달리 문체도 상당히 건조하고, 특정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도 아니라 딱딱한 느낌까지 드는 ""임에도 불구하고.

 

  책에 묘사된 노동자들의 삶이나 환경은 정말 처절할 정도로 지독하게 묘사되어 있다. 생지옥이랄까? 현실의 환경과 비교해서 봐도 심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런 묘사에 동질감을 느끼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현실의 모습이 비록 조금은 다르기는 해도 자본의 폭력과 잔인함은 차이가 없음을 보여줌이 아닐까? 부자가 되겠다는 열망과 사랑으로 자본을 향해 쓰였던 콩깍지가 이제 벗겨지면서 보게 자본의 실체를 책을 통해서 제대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책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저항하기 위해서 조금씩 변해가고 몸부림 치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이 자본의 실체를 보게 과정과 같음에 쉽게 공감하게 만든다. 자신들의 생각이 변해가는 과정과 속의 노동자들이 변해가는 과정은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과정을 차례로 따라가보면, 425명의 사람을 태운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구조 신호에도 생산량의 손실이 생긴다는 이유로 구조를 포기하는 장면이 있는데, 장면 이후에 "자본주의는 마땅히 이윤에 관한 일이라면 금리가 내려 돈이 넘쳐나기만 한다면, ' 그대로' 무슨 짓이라도 한다."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배의 구조에는 무심했던 배가 풍랑으로 잃어버린 6명의 선원을 태운 자신의 똑딱선을 찾아 나서는 내용이 있는데 이유는 "인간 대여섯 마리는 아무것도 아니였지만, 똑딱선이 아까웠기 때문이었다."라고 설명한다.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돈벌이' 위해 하나도 남김없이 파헤쳐졌다. 더군다나 그것을 교묘하게 '국가적'으로 부강해질 있는,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결부시켜서 감쪽같이 합리화했다. 빈틈이라곤 없었다. '국가' 위해서, 노동자는 '뱃가죽이 등에 붙어''맞아 죽어'나갔다."라는 문장은 아직도 애국이라는 말에 환상이 위선임을 꼬집어 준다.

 

 바로 위의 문장도 마음에 들지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만 특히 마음에 드는 설명이나 묘사는 어선 노동자들 자신들을 구원해 것이라고 믿었던 해군선박이 결국에는 게공선 감독관과 선장의 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이다. 거기서 노동자들은 "우리에겐, 우리 말고는, 같은 편이 없어. 이제야 알았다.""우리 군함 좋아하네, 허풍이나 떠는 부자들의 앞잡이잖아. 국민들과 한편? 웃기고 자빠졌네, 엿이나 먹어라!"라고 하는데, 국가가 국민을 위한다는 환상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린다. 아직도 이런 환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국가만을 보고 있지만, 결국에 국가라는 존재는 힘이 있는 존재를 위해서 움직인다. 지금 힘은 자본이라는 것을.

 

 이러한 내용들은 쉽게 공감이 가는 것은 저자의 상상력과 묘사실력이 뛰어나서라기 보다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자본의 본성은 변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자본은 행패는 모습을 달리할 결코 인간이라는 존재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은 자본을 위해서 움직일 뿐이다. 책이 8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독자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는 것도 바로 때문이다. 아직도 자본에 콩깍지가 쓰여서 열열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여전히 게공선의 노동자로 현실을 뿐이다.



게 공선 - 8점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양희진 옮김/문파랑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