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31일 월요일

우리는 선천적인 맹인들.....

 

 "옛날, 임금이 나라 안의 소경들을 불러, 궁중의 마구간으로 데리고 코끼리를 구경시켰다. 그런데 앞을 보는 그들은 손으로 더듬을 수밖에 없어서, 코끼리의 다리를 만진 자도 있고, 코를 만진 자도 있고, 귀나 꼬리를 만진 자도 있었다. 구경을 마친 뒤에 그들은 코끼리의 생긴 모양을 놓고 의견을 교환했다. 그런데 다리를 만진 자는 코끼리가 기둥처럼 생겼다 했고, 코를 만진 자는 동아줄과 같다 하고, 귀를 만진 자는 키와 같다 하고, 꼬리를 만진 자는 지팡이 같다 하여 서로 다투었다. 이는 실물을 보지도 못한 소경들이, 각기 생각이 옳은 자신한 데서 결과이다. 바가 적고 경험한 것이 확실치 못한 주제에, 나는 진리를 알고 있다 자처하는 사람들도, 역시 이런 부류라 하겠다."

 

 불경의 구절이다. 소경 맹인에 비유해서 일반 중생들의 무지에 대해서 비웃는 대목이다. 인간이라는 종족의 특징이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을 이미 꿰뚫어 구절이 아닐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진리 또는 진실인양 믿는다. 그래서 거기에서 벗어난 어떤 진실이나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떻게든 변명거리를 만들어서 자신이 믿고자 하는 것을 진리이자 사실로 만들어 버린다. 자기 스스로가 벽을 만들어서 어떻게든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보호하려고만 한다.

 

 그래서 자신이 믿는 것과 비슷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를 하며, 집단을 만들고, 그래서 자신이 가진 진리와 믿음을 깨뜨리려는 사람들에게 거침없는 공격까지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진리를 추구하던 인간의 욕망과 속성은 이제 진리의 보호나 수호에 바쁘다. 그것이 진리나 사실이라는 명확한 증거보다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기에 지켜야만 되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배움에 대한 방향도 진리와 사실의 추구가 아니라 믿음을 방어하는 지식의 습득에 그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보는 것은 위의 문장처럼 코끼리 전체를 이해하기 보다는 일부분만을 이해한 자신은 스스로 진리를 알고 있다고 우쭐대기 바쁘다.

 

 위대한 성인이라고 불리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재판 변론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도 무한한 우주의 티끌 정도가 아니던가? 과학의 발전이라는 것도 지금 축적된 지식이라는 것도 우리의 지식으로 모르는 것을 알고, 그것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쌓였던 축적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인류가 축적한 지식과 진리를 알지 못한다. 우주의 티끌 정도 축적한 인류의 지식과 진리 중에서 미세먼지 보다 작은 정도의 지식만 알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얼마나 우리의 지식이라는 것이 보잘것 없는가?

 

 그래서 불교경전에서는 끊임없는 배움을 강조한다. 소크라테스 또한 자신의 지식을 잘난 하기 보다 평생을 배움을 추구했다. 세상의 진리라고 말하는 진리나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들이 어느 순간엔가 진리가 아닐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배움을 끝없이 추구하고 진리나 사실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에 대해서 의심과 의문을 제기하며 스스로 진리와 사실을 검증해야 한다. 지금의 얄팍한 지식에 만족하며, 모든 진리나 사실을 알고 있다고 젠체하지 말고, 끝없는 배움을 추구하는 자세로 의심하고 의심하고 검증하고 검증해야 한다.

 

 ps> "미수다" 출현한 베라가 독일에서 출간했다는 책의 내용이 어떤 블로그에 의해서 알려지고, 내용을 언론에서 기사화 되었다. 기사의 댓글은 가관이었다. 제대로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고 기사화하는 병신 기자들과 거기에 동조하는 극우주의 병신들이 설치는 꼬라지란……. 만큼 우리 사회는 사실에 대한 확인을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믿으려는 믿음이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더해서 극우주의 병신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까지….. 시간이 지나면서 잘못된 번역이라는 증거들이 하나 다른 블로거들에 의해서 밝혀지고, 그러다가 우연히 불교경전에서 문구를 읽고 생각을 정리해 본다.

2009년 8월 30일 일요일

"사기"를 통한 저자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 책"사기의 경영학"을 읽고...

 

 여러 차례 동양 고전 읽기에 도전해 보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읽다가 중간에 포기하기를 반복하고, 가끔은 억지로 억지로 완독을 해도 머리 속에 지우개는 자신의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한다. 완독 했다는 성취감보다 무엇을 읽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당혹스러움이 크다. 언젠가는 제대로 읽을 날이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당혹스러움과 좌절감을 완전히 치유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회 전법으로 원전의 번역본 보다. 동양 고전을 새롭게 해석하고 쉽게 설명한 책들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두려움 때문인지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연히 손에 그런 책들이 들어오면 읽게 되는데, 오랜 만에 그런 하나가 손에 들어왔다.

 

 사실 요즘은 경영학이나 자기계발서 같은 실용서적은 있으면, 피하는 편이다. 그런 책을 읽어도 저자들이 말하는 능력이나 실력이 생기는 같지도 않고, 개인적 적성을 완전히 무시한 자기계발은 오히려 해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책을 읽다 보면 보여지는 성공지상주의 금전지상주의들은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완전히 반대되기 때문에 요즘은 거부감이 너무 크다. 그런 책들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취향이나 가치관을 무시한 , 어떤 결과를 목표로 그런 독서는 시간 낭비 같은 생각이 크기 때문이다. 사실 경영학이라는 것도 크게 보면 자기계발서 같은 실용서의 분야로 생각하기에 책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동양 고전 "사기" 바탕으로 내용의 전개가 있었기에 그나마 조금한 관심을 가지고 책을 넘기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책장 켠을 차지하며, 독서의 우선순위의 끝에서 머물렀을 책일 것이다.

 

 동양고전을 생각하면 딱딱하고 어렵다는 선입견이 드는데, 책은 저자의 쉬운 설명 때문인지 생각보다 쉽게 페이지가 넘어간다. 처음에 무덤덤하게 읽혔던 글자들이 어느 순간엔가 시선을 집중하게 만든다. 역사 인물들의 일화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저자가 현대에 필요한 경영학적 덕목과 사기의 내용과 교훈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통찰력은 읽으면서도 쉽게 공감하게 만든다. 거기에 보너스로 우리 사회의 문제까지 비판한 내용까지 더해지면서, 이해의 깊이를 해준다.

 

 그렇다고 책의 저자들이 말하는 모든 내용에 동의 또는 공감하지는 않는다. 특히 거부감이 드는 대목이랄까? "복수심이 성공을 부른다." 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은 아쉽다. "복수"라는 감정이 어떤 면에서는 성공이나 자신을 이루려는 목적에 향한 추진력을 제공한다는 점은 동의를 한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불의 악의에 대한 정당한 복수에 대해서 인정했다는 것에 대해서 공감하고 동의한다. 하지만, 여기서 인용한 사기의 내용은 전부 잔혹한 결말들이다. 저자는 그런 복수심을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불굴의 의지로 승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복수심이라는 것이 위험한 것은 성공을 넘어 다른 폭력이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것이다. 그래서 복수심으로 성공을 이룬 화해, 용서 그리고 관용에 대해 언급했다면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내용에서 환공과 관중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화해, 용서 그리고 관용에 대한 언급은 부족하다.

 

 그런 부분을 제외하면, "사기" 통해서 배우는 다양한 교훈들은 쉽게 공감하고 배울 있는 것들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런 배움도 크지만, 한가지 크게 느끼는 것은 역사는 반복되고 고전 속에 현대를 사는 지혜가 있다는 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저자가 담고 있는 현실의 비판 그리고 사기의 내용과 현실을 비교해서 읽는다면 역사의 반복을 그대로 느낄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식견에 놀랐지만,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또한 되새길 있는 책이다.

 

사기의 경영학 - 8점
김영수 지음/원앤원북스

2009년 8월 24일 월요일

"사직의 쥐새끼"와 "맹구"

 

 처음 독서에 관심을 가지고 많이 읽은 책들은 경영서니 자기계발서 같은 책들이었지만, 요즘은 개인적으로 그런 책들을 피한다. 읽어도 도움이 되지 않는 듯한 느낌과 성공지상주의만을 자극하기에 일부러 피한다. 그런 책들을 읽는다고 저자나 저자가 말하는 이상향이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능력과 성향들이 그것들과 맞지 않는데 굳이 그것을 추구해야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기의 경영학"이라는 책도 보려고 의도했던 책은 아니다. 공짜로 들어온 책이기에 손에 잡고 읽었다.

 

  책은 동양 고전인 사기의 내용을 분석해서 현대 리더들이 본받아야 것들을 정리한 책인데, 온고지신의 정신이 기발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읽다가 지금의 시국상황과 기가 막히게 맞는 이야기가 2 나온다. '사직의 쥐새끼'이야기와 '맹구'이야기인데, 이야기를 합쳐서 '사서와 맹구'이야기라고 한다. (참고로 개인적으로 아무리 인간을 싫어해도 2mb 특정동물에 비유해서 비하하는 짓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쥐새끼도 인간이 아니다.그리고 쥐가 아니라 쥐새끼라고 하는 것은 그냥 책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일 개인적 감정과 무관하니 오해를 마시길….)

 

 우선 "사직의 쥐새끼"이야기를 보면,

 환공이 관중에게 나라를 다스리는데 가장 신경 써야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관중은 환공에게 "사직에 살고 있는 쥐새끼가 가장 문제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환공이 " 쥐를 염려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사직을 어떻게 짓는지 보셨습니까? 기둥을 세우고 보기 좋게 색을 칠합니다. 그런데 쥐새끼가 기둥에 파고들어가 삽니다. 문제는 쥐새끼를 잡으려고 불을 놓을 수도, 물을 부을 수도 없다는 입니다. 자식의 기둥이 타거나 색이 상할까봐 그렇지요. 그래서 쥐새끼는 제거하기 아주 어렵습니다."라고 관중이 대답했다. 이에 환공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관중에게 쥐새끼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무슨 관계냐고 물었다. 이에 관중은 군주 곁에 있는 환관들의 존재가 쥐새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에 환관의 행태를 쥐새끼와 비유하는 자세한 글들이 있으나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기에 여기까지…..

 

 "맹구" 이야기는 간단하면서도 메시지는 강력하다.

 송나라에 술을 파는 사람이 있었는데, 맛도 뛰어나고 손님에게 친절하며 고객에 대한 배려도 뛰어났다고 한다. 가게홍보에 많은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가게에 손님이 거의 없어 파리만 날리게 것이다.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가게 주인은 마을의 양천이라는 노인에게 찾아가 이유를 물었다. 노인은 "당신 개가 사납지요?"라고 물었다. 주인은 개와 손님과 무슨 상관이냐며 물었더니, 노인은 개가 하도 사납게 구니 사람들이 겁이 나서 안가는 것이라고 가르쳐줬다고 한다.

 

 전직 국세청장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국세청 직원을 파면시켜버리는 국세청이나, 다음 아고라에 비판적인 글을 게시했다고 직원을 알아서 징계하고, 전임 사장에게 없는 죄를 만들어서 몰아내는 kbs,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전임 대통령이 서거하셨다는 소식이 나오자마자 광장을 막아서는 견찰들 등등…. 지금 기억나는 말고도 찾아보면 무수히 많은 사나운 개와 쥐새끼들이 설쳐대고 있다. 마치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은 처럼 설쳐대는 꼴을 보니 "사직의 쥐새끼" "맹구" 이야기가 그렇게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렇다고 국민과 소통을 하겠다고 하면서도 소통하지 못하고 사나운 개와 쥐새끼들에 둘러싸인 2mb 환공이나 송나라 술장수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2mb라고 "사직의 쥐새끼" 사나운 개와 무엇이 다를까? 그저 섬김을 받아야 국민들만 고달프고 힘들 뿐이다.

2009년 8월 21일 금요일

전형적인 패턴의 한계를 가진 영화 하지만 장쯔이는 매력적인. 영화 "소피의 연애매뉴얼"을 보고

 

 "여자는 남편을 만나야 한다." 말은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가부장적 문화가 남아 있는 곳에서는 보편적인 말인가 보다. 영화의 초반부터 이런 대사를 "소피" 독백으로 읊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런 말을 읊어대는 여성들을 보고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뛰어난 알파걸들이 남성들을 압도하는 세상이라고 해도 대다수의 많은 여성들은 다양한 차별 속에서 힘겨워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한계와 좌절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잘난 남편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심정은 공감한다. 물론 그들이 느끼는 만큼은 같이 공감한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남녀 불평등을 없애기 위한 다양한 여성우대정책에 반발하는 찌질들과 언제든지 논리적 대결을 있을 정도로 공감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소피는 그런 생각을 가진 전형적인 여성상을 나타낸다. 그렇다고 그녀의 주변인물들 또한 그렇게 모범적인 설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피의 친구 2명이 서로 상반되는 여성상을 보여준다. 친구는 결혼에 필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남편의 재력이라는 관점에서, 다른 친구는 능력 있고 자유로운 연애관을 소유하고 있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쿨한 성격의 친구로 설정되어 있다.

 

 소피는 친구의 중간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능력 있는 남자가 사랑과 행복의 전제조건이라는 생각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를 차버린 제프에게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행복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소피가 사랑한 것은 스스로가 행복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사랑한 것이지 제프라는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피가 보여주는 실연의 슬픔은 영화 속에서 그렇게 가슴 아리지 않다. 제프를 향한 소피의 복수가 결국에는 사랑을 되찾기 위한 복수가 아니라 자신이 느낀 불행과 슬픔이라는 감정을 그대로 되돌려 주겠다는 한계를 보이는 것도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행복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사랑한 소피의 한계와 같은 것이다.

 

 자아에 대한 명확한 인식 이전에 여성이라는 생물적 존재를 먼저 인식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여성이라는 존재에 가려져 버린다. 그래서 소피와 같은 여성들은 자아를 통해서 찾아야 하는 행복을 누군가에게 의존해서 찾으려 한다. 그것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불리는 것들로 스스로가 만들어낸 인계철선과 같아서 진정한 사랑이 다가와도 조건에 벗어나면 쉽게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또한 우리네 사랑의 모습이다. 영화 소피의 변화도 복잡하고 다양한 에피소드로 얽히게 되는데, 소피가 변화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조건들 보다 자신의 자아를 조금씩 찾아가기 때문이다. 결국에 소피가 보여주는 사랑은 전통적으로 여성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는 가치관들을 하나하나 깨어 버리면서다.

 

 사실 이런 과정이나 주제는 이런 류의 영화의 전형성이랄까? 여성의 자아 찾기 그리고 진정한 사랑 찾기 같은. 그래서 영화가 주는 새로움이라는 것을 찾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소피역을 맡은 장쯔이의 매력적인 연기는 그런 식상함을 충분히 상쇄한다. 영화 속에서 소피의 다른 고든이라는 인물이 소피에게 "예의도 없고 천방지축이고 ~ 그런 당신을 사랑한다"(대사가 기억이 나지만)라는 대사가 공감이 정도로 장쯔이는 매력적으로 소피를 연기한다. 반면, 영화 소지섭의 모습은 기대 이하로 다가온다. 소지섭이 맡은 제프라는 인물이 우유부단한 바람둥이인데, 소지섭이 영화에 차지하는 역할이나 모습은 제프라는 역할만큼 우유부단하다. 꿔다 놓은 보리자루 같이 영화와 어울리지 못하는 같아 안타깝다. 

 

2009년 8월 14일 금요일

어떤 세상이 블랙일까? 영화 "블랙"을 보고...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빛을 받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빛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이미 귀가 멀어 자신의 탄생을 기뻐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태 블랙. 이것이 흔히 말하는 선천적인 장애인들에게만 한정 것일까? 세상의 다양한 색깔과 형태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세상의 다양한 소리의 아름다움을 듣지 못하는 우리들. 그래서 다름을 쉽게 인정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가치관이라는 이름이 만들어내는 장벽으로 스스로를 둘러 자신의 세계와 다른 세상을 단절해 버리는 블랙, 그것은 흔히 말하는 정상인들이 만들어내는 커다란 장애일 것이다.

 

 현대사회의 소통문제를 진지하게 그렸던 영화 "김씨 표류기" 보면, 한강 밤섬에 표류해 구조요청을 하던 남자 김씨와 구조전화를 받았던 텔레콤회사 직원의 불통은 정상인들의 블랙 상태를 보여준다. 많은 현대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말만 하기 바쁘고 타인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후천적 청각 장애인인 것이다. 그렇다고 시각이라는 기관도 그런 장애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같은 기사를 접하고도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고, 같은 사건을 눈으로 목격하고도 사건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르다. 가치관이 만들어낸 장벽 속에서 기사를 해석할 , 조금이라도 다른 시선이나 가치관의 간섭여지를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만의 세상이 빛인 착각하지만, 그것은 빛를 가장한 블랙일 뿐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해서 그것이 장애인지 조차 인식 못하는 가장 심각한 블랙이다. 보통 듣지 못하면 말도 못하지만, 이런 후천적 장애인들은 자기만의 목소리를 나불나불 대면서 커다란 소음과 갈등만을 야기할 뿐이다. 자신이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자신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사람인양 생각하는 심각한 자뻑상태 그것이 심각한 블랙상태이고 문제인 것이다.

 

 영화 "블랙" 선천적 장애인을 중심으로 블랙인 세상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고편만 봤을 유명한 헬렌 켈러와 설리반 선생님의 다른 버전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그렇게 유발하지 않는 작품이다. 하지만, 영화가 장애아와 교사만의 이야기를 넘어서 세상과의 관계를 포함되어 있어서, 예고편에서 받은 느낌을 뛰어넘는 감동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영화 속에서는 블랙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여주인공 미셀 뿐이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 속에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후천적인 블랙 상태에서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셀의 부모님은 자신의 아이들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식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하는 블랙 상태다. 철없는 부모들이 맹목적인 사랑으로 아이를 망쳐놓으면서, 그것이 누구보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듯, 미셀의 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그나마 다른 사람에게 열린 태도를 취하는 미셀의 어머니가 약한 블랙상태로 딸의 교육문제에 대해서 교사 사하이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그대로 따라준다. 사하이의 노력이 결국에 미셀부모님의 블랙상태를 완전히 깨어버린다.

 

  명의 후천적 블랙인 미셀의 동생이다. 자신을 향한 가족들의 사랑을 의심하는 블랙. 장애아가 있는 가정에서 장애아에게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린시절 철없는 시선에서 보면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고 충분히 느낄 있는데, 그런 감정이나 느낌이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언니를 향한 질투와 자신을 사랑해주는 듯한 부모님을 향한 미움으로 가족들의 사랑을 한정해 버린다. 하지만, 결국에 결혼을 앞둔 그녀에게 미셀이 보내는 글을 통해서 자신이 만들어낸 블랙을 깨버린다. 동안 가족의 겉에만 돌던 그녀가 다시 가족의 안에서 충만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서 사하이와 미셀은 세상 속의 블랙을 깨기 위해서 나선다. 정상인과 장애인을 구분하는 세상에 대해서 장애인도 정상인처럼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셀은 대학에 도전하게 된다. 우선 직면하게 되는 것은 입학이라는 난관이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미셀이 대학의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세상의 보편적인 시선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블랙 앞에서 기회조차 얻는 것은 쉽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대학 학장에게 사정해서 얻은 면접의 기회를 통해서, 미셀은 그런 블랙을 깨어버리고 입학허가를 받게 된다.

 

 하지만 미셀은 다른 난관에 직면하게 되는데, 정상인의 수업을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아서 낙제를 하게 된다. 낙제를 하고도 낙담하지 않고 미셀과 사하이가 춤을 추는 영화 장면이 인상적인데,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한번의 시련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미셀과 사하이의 인생관이 묻어 나있다. 영화 대사 중에 사하이가 학장에게 "미셀에게 가르치지 않은 단어는 불가능입니다."라고 했던 말과 일맥상통한다. 낙제나 순간의 좌절을 인생의 완전한 실패로 인식하는 블랙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향한 소리랄까? 결국에 미셀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대학을 졸업하게 되고 편견이라는 것이 만들어낸 세상의 블랙을 극복해 나간다.

 

 마지막으로 미셀이 극복한 블랙은 사하이에게 의존했던 자신의 삶이다. 블랙의 세상에서 자신을 인도해준 사하이에게 삶의 모든 부분을 의존했던 미셀에게 사하이의 부재는 삶에 커다란 공백과 상실감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미셀은 알츠하이머에 걸려서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사하이를 위해서, 사하이가 자신에게 했던 처럼, 자신이 사하이를 블랙의 세상에서 깨우기 위해서 노력한다. 의존성을 버리고 비로서 자신의 스스로 삶을 개척할 있는 존재가 된다. 영화는 미셀과 주변 사람들이 블랙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선천적 장애보다 후천적 장애가 만들어낸 블랙의 세상이 극복하기 어려움을 보여준다. 미셀이 선천적 블랙상태를 벗어나는 데는 20여일의 시간만 필요했을 뿐이지만, 후천적 블랙상태를 극복하는데는 그녀의 인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치관으로 만들어진 블랙이라는 장애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만큼 다양하기에.

 

 사하이와 미셀이 블랙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후천적 블랙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사하이는 작은 힌트를 대사 속에서 던진다. 사하이는 미셀의 대학입학 여부를 두고 학장에게 작은 선행을 베풀어 달라고 말한다. 학장은 작은 선행으로 대학의 입학이 아니라 미셀을 교제를 점자로 만들어 준다. 학장이 베푼 작은 선행의 행위보다 중요한 것은 미셀의 입장을 생각하는 마음,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다. 작은 선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은 선행을 하기 위해서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 그것이 후천적 블랙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Ps> 영화의 감동은 영화의 내용 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빛나는 연기에서도 느낄 있다. 사하이를 연기한 인도의 국민 배우라는 아미타브 밧찬은 생동감 있는 교사의 모습과 측은지심을 유발하는 환자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려낸다. 미셀을 연기한 라니 무르커니는 대사 없는 장애인을 연기하면서도 미셀의 감정을 관객에게 그대로 재현해 낸다. 미셀의 감정에 관객이 쉽게 몰입할 있도록 만드는 매력적인 배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셀의 어머니를 연기한 쉐나즈 파텔은 앞의 배우에 비해서 많이 출연하지는 않지만, 장애아를 가진 어머니의 복잡한 심경을 세심하게 그려낸다. 그녀의 연기를 보면 미셀에 대한 애처러움과 사랑 그리고 부모로써의 안타까움 같은 것을 그대로 느낄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