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일 금요일

사람은 언제나 변한다. 영화 "드림업"을 보고.

 

 인간의 운명, 미래 그리고 성격이나 가능성들이 태어나면서 완성된다면 얼마나 슬플까?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개척하거나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삶의 쳇바퀴 속에서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아간다는 , 그것 자체가 지옥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물론 인간이란 원래 적응력이 뛰어난 동물이라서 그런 환경 속에서도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나름의 만족감을 찾아 지옥 같은 삶을 살지도 모른다. 그것이 노예의 삶인지도 모르고 마치 자신의 인생이나 운명이 행복했다 말하겠지만.

 

 하지만, 꿈이 있고 희망이 있는 사람은 그런 삶과 자신의 운명과 현실에 저항한다. 영화 "가타카" 주인공 제롬 머로우(에단 호크 ) 유전학적으로 열성인자를 가지고 있다. 그의 꿈은 우주 비행사이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열성유전자 때문에 꿈을 이룰 수가 없다. 우주 비행사는 우성인자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열성인자를 타고난 그는 운명적으로 우주 비행사가 수가 없다. 하지만, 제롬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성유전자를 가진 이의 타액과 , 피부조각 같은 것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숨기고 우주 비행사가 되기 위해 우주 항공 회사 가타카에 입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정해진 운명과 현실을 부정하면서 꿈을 위해 저항하고 도전한다.

 

 운명이나 인생 그리고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라도 윤리 교과서에도 이런 비슷한 운명론적 결정론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 성악설과 성선설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은 원래부터 악하게 태어난 것인지 아니면 착하게 태어난 것인지에 대해. 여기에 명확한 결론은 없지만, 중요한 것은 태어나면서 정해진 것도 자라면서 교육과 학습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변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미성년 시절에 교육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가 되기 위해서 배우고 노력한다.

 

 그런데 우리는 교육이라는 것을 단지 직업선택의 수단으로 밖에 보지 않는 같다. 사람에 대한 인성교육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한 , 성적경쟁에 아이들을 몰아붙인다. 하나의 인격체로써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재라는 이름으로 경제의 부품, 산업의 부품으로 아이들을 대한다. 그래서 아이들의 실패나 반항에 대해서 용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복종만을 강요한다. 뿐만 아니라, 조그만 잘못이나 삐뚤어진 행동에 대해서 주홍글씨를 새겨버려, 그의 미래를 암흑으로 만들어 버린다. 꿈도 희망도 없게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반대로 소위 인재와 엘리트라 불리던 인간들의 범죄나 비리를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학창시절부터 공부만 잘하면 뭐든 용서를 하던 교사와 학부모 어른들이 만들어낸 삐뚤어진 윤리의식은 그들이 사회에 나서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장관급 인사 청문회를 통해 보여주는 그들의 추잡한 범죄들에 분노하는 국민들도 있지만, 그들의 범죄에 관용하는 태도를 보이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더욱 웃기는 것은 정권에 따라서 기준을 함부로 바꿔버리는 인간들의 행태다.

 

 "바보 만들기" 저자 개토는 이렇게 말했다. "기업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가지가 필요했다. 고분고분한 피고용자, 보증되고 의존적인 주민, 예측 가능한 기업환경. 현대 의무교육이 만들어진 것은 대체로 이런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이렇게 우리는 세뇌 당해왔고, 아이들에게 똑같은 관점으로 세뇌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미 권력과 돈의 노예로 예속되어 버린 것이다.

 

 영화 "드림업" 이미 세속화된 현실 속에서 꿈과 미래 그리고 희망을 찾아서 현실의 억압에 저항하고 방황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이미 세속화되어 버린 이들에게 영화는 유치하고 철없을 정도로 과장되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곰곰이 자신의 학창시절을 뒤돌아보면, 영화 아이들의 자유로움에 질투가 난다. 입시에 억압당해온 나와 지금의 아이들이 쉽게 접할 없는 환경과 자유로움은 유치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시절에 경험하고 거쳐야 통과의례이다. 그런데 사회와 어른들은 "안돼"라는 한마디로 모든 것을 차단해 버린다. 그래서 한국의 아이들은 학창시절에 하지 못한 것을 대학에 가서야 하게 된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하며, 사회에 반항하기도 한다.   그렇게 스스로 하나의 인격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성인이 지난 시기에 시작된다.

 

  그렇게 사회와 어른들은 아이들이 정해진 길을 벗어나는 것을 막으려 할까? 지독한 승자독식의 사회,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에서 한번의 실패나 실수가 주홍글씨가 되어버리는 사실을 익히 학습한 사회와 어른들은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변명만 뿐이다. 사실은 권력과 돈에 종속된 자신들의 세속적인 가치관과 관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조그만 관용도 이해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지독하게 편견 어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영화 바네사 허진스가 연기한 ""이란 인물은 그런 성인들의 관점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자신의 이름에 5라는 숫자를 넣고 묵음이라고 강조하며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 모습이 어떻게 보면 자기 개성이 강한 인물인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에 자신의 관점이나 가치관을 조금이라도 깨뜨리기 싫어하는 다른 모습의 표현이다. 샘의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아"라는 대사를 통해서, 샘이 가진 가치관이 명확하게 표현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 사회와 어른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관점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에 일어났던 2pm 박재범 사건을 보더라도 지독한 편견과 아집이 얼마나 강력하고 무서운지를 수가 있다. 지나친 애국주의 광기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이 결합해서 일어난 사건이기는 하지만, 이면에 깔린 "사람은 변하지 않아"라는 관점에서 나온 지독한 편견과 독선을 수가 있다. 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와서 학교와 사회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던 주변환경이나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 당시의 한마디 한마디만을 문제 삼는다. 당시의 박재범의 생각과 말이 지금의 박재범의 생각과 말이 같음을 증명하는 어떠한 것도 없이. 단지 "사람은 변하지 않아"라는 편견과 독선으로 과거의 하나로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해버린다.

 

 그런 관점이 포함된 사회환경과 교육이 만들어내는 지독한 경쟁은 많은 청소년들을 스트레스와 자살로 몰아붙인다. 가장 아름다워야 학창시절은 지옥이 되어 버리고, 시절만 지나면 자유를 만끽할 있다는 대학시절은 취업전쟁의 지옥이 되어 버리면서 이제는 연령을 불문하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 사회는 냉혹하다. 정해진 길을 벗어나면 가해지는 따가운 시선과 편견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되고, 어린 시절의 조그만 실수는 성인이 되어서도 따라 다니는 주홍글씨가 되어 버린다.

 

  영화를 보고 단순하게 샘의 관점이 틀렸다는 것을 보고 깨닫게 된다면 좋겠다. 사람은 언제나 변한다는 것을. 학창시절은 꿈을 꾸는 시절이라는 것을, 아이들을 실수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잘못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그것이 아이들의 모든 , 아니 사람의 모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가 되어가는 조그만 과정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영화도 유쾌하고 재미있었지만, 영화의 음악이 마음에 든다. 그렇게 세련된 음악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시절의 열정과 자유로움을 충분히 느낄 음악들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