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9일 금요일

단순 무식 과격한 인간에 바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내며 깨달은 것들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서 내가 나를 표현 자주 쓰는 말이 "단순, 무식, 과격"이다. 남들의 기준으로 본다면 웬만한 학벌을 가지고 있는 놈이 스스로를 단순, 무식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의아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다혈질적인 성격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는 의미로 많이 써왔다. 요즘에는 다혈질적인 성격을 많이 다스리는 ( 친구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이라 ""해서 화를 표현하는 일이 많이 줄었기에 굳이 "단순, 무식, 과격"이라는 말로 나를 표현할 필요까지는 없는 경우가 많은데도, 입과 머리에 굳어진 표현이 되어 버렸는지 쉽게 말을 버리지 못한다. 여전히 나를 표현할 즐겨 사용한다. 사실 근본적으로는 다른 이유가 하나 있다. 원래 대화의 능력이 떨어지고, 사교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종의 해자를 치기 위한 자기 방어 행위로써 자주 써먹는 말이다. 내성적인 성격 때문인지 몰라도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하려고 치면 머리 속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고 입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린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대화를 대화에 섞이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고 그저 듣기만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를 "단순, 무식, 과격한 "이라고 미리 정의해 버리고 대화의 구경꾼이 되어 버린다.

 

 내가 나를 표현하는 말로 자주 써온 말이,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세상 모두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박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어도, 관직이라는 커다란 감투를 하나씩 달고 있어도 단순하고 무식하고 천박하기 그지 없는 과격함을 가리지는 못하는 같다. 그것은 마치 사익만을 추구하는 인간 이기심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가장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이랄까? 웃기는 것은 그런 사익을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원초적인 모습이 소위 지도층이라고 불리는 계층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라를 이끌고 선도한다는 지도층에서 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특히 정치인들은 서로 상대방을 아주 간단하게 정의해 버린다. "좌파, 매국노, 기득권, 반민주주의자,독재자 등등" 개인적으로 몇몇 단순한 정의에 대해서 지극히 공감하는 바도 있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상대방을 정의해 버림으로써 회색지대에 있는 다수의 중도층들은 완전히 배제되어 버린다. 선진국의 경우 진보와 보수가 40:40이고 중도 20 선거의 결과를 좌우한다고들 하는데, 우리나라는 진보신당과 민노당의 지지도를 합하면 10% 안되는 진보의 지지층이고 딴나라당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보수층 40~50% 존재한다. 우리나라는 보수와 중도보수가 대결하는 형국이고 진보는 이제야 겨우 명암을 내밀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민주당이 진보가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대로 관점에서 본다면 민주당은 중도보수 성격의 당이다. 딴나라 당이라는 보수 정당의 시각에서만 진보일 뿐이다.) 나머지 40% 정도가 중도층에 속하는데, 이분법적인 편가르기로 중도층은 완전히 무시되어 버린다. 결국에 40% 가까운 존재는 제대로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보수와 중도보수의 치열한 싸움에 진보가 명명만 유지할 뿐이다.

 

 이런 싸움 속에서 무시되어 버린 중도층은 거대 정당의 치고 받는 싸움을 보면서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하기 마련인데, 한국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정책이 아니라 바람몰이와 선동이라고 하는 것이 중도층을 어떻게 끌어들이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선동적인 말이나 단어로 중도층에 어필하느냐가 정권의 지지기반은 물론 선거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치꾼들이 행하는 단순화는 심각한 문제와 관점을 왜곡시키고 국민들을 정상적이게 비판하고 사고하는 것을 막아 버린다. 단지 정치꾼들의 단순한 정의와 메시지를 그냥 믿어버리는 현상이 발생한다. 홍준표 의원은 라디오에서 민주당은 정책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좌파로 정의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냐는 패널의 질문에 "단지 정치적 수사" 뿐이라고 답했다. 단순화된 정치적 수사, 그것은 무식한 이들에게 강력한 작용을 하면서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믿어 버린다. 국민들이 무식한 이유는 정치적 수사와 사실을 구분하지 못하는데 있다.

 

 딴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층에서는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이라며 민주당과 진보진영을 공격했지만, 지난 10년간의 경제적 지표를 찬찬히 본다면, 지난 10년은 "잃어버린 10" 수가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지난 정권들에서 기록했던 4~5%대의 경제 성장률은 대다수의 경제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에서 정상적인 성장률이라고 말하지만, 10% 넘는 고도 성장기를 몸으로 경험한 기성세대들에게는 씨도 먹히는 소리는 소리가 되어버렸다. 무식하게 자신의 경험만을 맹신하고 변화한 사회환경과 흐름을 완전히 무시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난 정권의 분배정책에 대해서 보수층과 딴나라당은 심하게 공격했고, 공격의 논리로 내세운 것이 파이(파이가 커야 많이 나눌 있다.), 소위 말하는 트리클 다운 효과(하방침투효과) 내세운다. 하지만,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크루그먼은 트리클 다운 효과는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전혀 설명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슈퍼 클래스" 있는 비슷한 내용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코넬 대학의 경제학자 로버트 H. 프랭크가 트리클다운이론이 경제이론으로-나아가 경험적인 증거로도-전혀 입증되지 않는다고 강력히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어가 생긴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이론을 신봉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무식한 다수의 국민들은 맹신한다. 정치꾼들의 선동을 말이다. 조금만 공부하고 의심하며 비판적인 생각을 한다면 보다 다양한 내용과 사실을 확인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식한 국민들은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사실 어떤 정부도 정책적으로 자신의 지지계층만을 위해서 정책을 펴지 않는다. 수도 없다. 거대 정당들의 공약들을 자세히 드려다 보면 상당히 유사하거나 겹치는 정책들이 많다. 대부분의 정책들은 중도층을 끌어들이기 위한 정책들이다. 중도층들이 강력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정당의 정책은 유사하거나 비슷해 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밖에 소수의 정책들에서 정당의 색깔을 명확하게 나타내면서 자신들의 이념색과 정책적 색깔의 위치를 선점하게 된다. 많은 중도층들이 정치꾼들의 선동에 의해서도 투표권과 지지를 결정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정책들을 보고 지지를 표명하기도 한다. 지지의 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작용을 하는 요소들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정치꾼들은 아전 인수식으로 지지의 내용을 단순화해서 해석해버린다. 다수의 국민이 지지 하지 않는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집권당이 무리수를 써가면서 정책을 시행하려 한다. 이유는 지지율이나 투표율이 정책을 찬성하는 것이 아니냐는 무식하고 단순한 논리를 내세우면서.

 

 소위 지도층에 있는 인간들이 보통의 국민들보다 배웠을 텐데도, 자신들의 입만에만 맞게 정책이나 주장을 단순화 시키고, 반대의견이나 상대방의 의견을 이해하려, 알아보려하지 않는 무식한 행태를 취한다. 결국에는 선동적인 단순한 말을 통해서 여론몰이를 일으키고 결국에는 과격하게 서로를 물어뜯기에 바쁘다. 국민들은 그런 선동에 속아서 같이 아웅다웅한다. 그들은 그럴까? 맹목과 아집으로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노력조차 하지 않으며 다양한 오류를 범하는 것일까? "인간이해"라는 책에 있는 알프레드 아들러의 말이 인상적인데, 그는 "인간이 오류를 범하는 이유는 자기가 성취한 성공이나 기득권을 자기의 특성과 연관지으며, 그것들을 개인적인 , 자기의 근본적인 행동 패턴을 공고히 하는데 이용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객관적인 검증 없이 모든 것을 의식과 무의식의 어둠 속에 묻어 두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참담한 것은 한국의 지도층들이 이런 행태가 심하다. 미국발 금융위기를 통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이 여기저기에서 나옴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꼴통들은 신자유주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전에 미국의 호황을 이끌었던 경제 대통령 앨런 그린스펀은 자신의 금융정책이 이번 사태를 일으킨 것이라는 다른 학자들의 의견에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으며, CEO 모범이라고 불렸던 웰치 회장은 "분명하게 주주가치는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아이디어다."라고 말하면서 주주가치 실현을 우선으로 삼았던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오하마의 현인이라고 불리는 워렌 버핏은 자신의 투자실수나 실패를 당당하게 시인함으로써 오히려 투자자나 주주들의 신임을 얻고 있다.

 

 한국의 꼴통들은 실패와 오류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들의 근본적인 행동패턴이 무너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자신들의 주장이나 의견을 철회하거나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다. 지식인, 그리고 지도층이라는 위치를 고려한다면 선전과 선동이 아니라 명확한 철학을 바탕으로 정확한 정보전달을 통한 국민의 이해와 설득이 필요하다. 지난 촛불 정국에서 문화부를 중심으로 인터넷의 여론 조작과 선동만 하면 무식한 대중들을 돌리려 정책을 본다면 지도층에게 국민이란 무식하고 선동하기만 하면 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 무식, 과격한 우리들의 잘못인 것이다.

 

 단순이란,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분명 우리는 천연색 세상에서 다양한 컬러의 옷을 입고 화려한 색감의 영상에 익숙해져 있으면서도 우리는 단순하게 생각하고 세상을 파악하려 한다. 그래서 정치꾼들의 선동과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신문들의 거짓과 선동에 놀아난다. 어떤 이들은 신문을 읽고, 교육에도 활용해야 중요한 매체로 생각하지만, "블랙 스완" 저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절대 신문을 보지도 믿지도 말라고 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신문을 믿지 말라고 한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처럼 신문을 보지 않지 않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신문을 믿지 말며, 비판적으로 봄으로써 이분법적 생각을 탈피해야 한다.

 

 무식이란, 상대방에 대해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맹목적으로 믿으며, 이해의 폭을 넓히려, 변화하는 세상의 지식과 정보를 스스로 차단하지 말아야 한다. 김동길이라는 무식한 인간과 조갑제, 지만원 등등이라는 배울 만큼 배운 무식한 인간들의 행태는 그들이 스스로의 지식만을 너무 맹신하고 변화하는 세상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완전히 차단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젊은 사람들의 지식 습득이 빠르고, 많이 흡수하는 이유는 나이든 사람에 비해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세상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빠르게 대응한다고 했다. 기존의 지식에 스스로 함몰되어, 부여잡을 죽은 지식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머리 속에 넣고 있어도, 그것이 현재 살아있는 지식이 아니라 죽은 지식이라면 무식한 것이다.

 

 과격이란, 우리의 생각들을 표현하는 방식의 거침이다. 지금 청소년들의 생활언어에 비속어가 많다고 개탄하면서도, 우리 어른들의 언어는 과연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인가? 좀더 강력한 메시지의 전달을 위해서 일부러 과격한 표현이나 언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해 왔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고쳐야 한다. 일반적으로 갈등의 시작은 생각이 달라서, 관점이 달라서가 아니라 표현과 언어의 과격함에서 시작이다. "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단순, 무식, 과격함이 결국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명확한 증거조차 없이 단지 가족과 주변인들의 뇌물 수수를 가지고 포괄적으로 범죄를 엮어 버린 떡검의 발표와 그대로 내용을 받아 언론을 말을 그대로 믿으면서.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피의사실을 사실이라 믿으며, 무죄추정의 기본적인 원칙을 내팽게 치고. 이는 이미 우리는 스스로 바보 노무현보다 부패한 것이 아닐까? 헨리 조지는 "국민은 전반적으로 부패의 증가에 익숙해져 있다. 사람들이 청렴한 공직자가 없다고 생각하며 청렴한 공직자가 있다면 이는 자기의 기회를 이용할 모르는 바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국민 자신이 부패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부패한 민주정치를 만들어 낸다고 했다. 2mb 결함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에게 손을 들어 줬다. 헨리 조지의 "부패한 민주정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이 돌아간다. 정직성이나 애국심은 압박받고 비양심이 성공을 거둔다."라는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는 지난 1 반이라는 기간을 통해서 민주주의와 정의의 후퇴를 직접 체험했으며, 결국에는 사람의 죽음을 목격했다.

 

 너무나 정직했고, 원칙주의자라서 이상주의자라서 우리는 그를 바보라 불렀다. 정직해야 하고, 원칙과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행위임에도 우리는 언제나 불의와 현실에 타협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해왔다. 그게 세상살이라고. 스스로 이미 부패했고, 바보인 그보다 바보인 우리들. 바보의 죽음을 통해서 뒤늦게나마 바보의 소중한 가치, 그가 추구했던 숭고한 가치를 이제야 깨달았다. 그를 보내고 이제야 깨달아야 하는 어리석음이 원망스럽다. 그리고 너무 슬프다.


2009년 5월 28일 목요일

영화 "마더"를 보고난 느낌......


 

 지금 시국이 그렇다보니 영화가 원래 전달하고자 또는 담고자 했던 메시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영화에 대한 정보를 최소한으로 가지고 가야 나름의 주관을 가지고 영화를 본다고 생각하기에, 이번 "씨네21" 실린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나 영화 "마더" 대한 기사들을 눈대중으로 보고 대충 넘겨버렸다. 그냥 영화에 집중하기 위해서 였다. 원래 영화를 평론가처럼 깊이 있게 분석하는 재주가 없기에 그냥 느끼는 대로 보는 편이지만, 영화를 보고 나온 후의 느낌은 지금의 우울한 상황에 의해 왜곡되어 버렸다.

 

 영화는 하나의 스토리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장면 장면에 감독이 의도한 메시지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 그런 메시지들은 감독이 의도했던 영화의 핵심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전체의 내용을 가지고 하나의 메시지로 이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화를 왜곡해서 해석해 버렸다.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장면과 설정만을 가지고 영화를 보면서 지금의 현실과 영화 이야기를 매치 시켜 버렸다. 내가 해석하고 이해한 것은 분명 너무나 과장되고 왜곡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감성의 동물이 아니던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그리고 일어나고 있는 비열한 상황 속에서 누르고, 누르고 있는 나의 감정들이 영화의 관람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김혜자가 연기한 "마더" 그리고 원빈이 연기한 아들 "도준" 영화 속에서 분명 우리시대의 서민들이고 소외 받은 약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우리시대의 권력자와 기득권층으로 읽힌다. 마더는 견찰과 떡검이요, 도준은 2mb 느껴질까? 마더가 아들에게 가진 원죄, 그것 때문에 아들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마더. 원죄는 절대권력이요, 마더의 맹목적인 사랑을 권력을 향한 맹목적인 복종으로 보일까? 그리고 영화 경찰들, 미국 드라마 CSI 운운하며 요즘은 과학수사가 되어 마치 자신들이 공정한 심판자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들이 시대의 트렌드만 쫓으면서도 생각 없고 무식한 우리 대중들로 보일까? 살해당한 여학생, 치매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소녀가장이라는 설정, 현실과 양심 속에서 갈등하는 모습 그리고 누군가에 의한 죽음 노무현 대통령이 뇌리를 스쳐지날까? 영화 속에서 다른 누군가에서 살해 당한 노인은 bbk사건의 김경준으로 보일까? 오늘 대법원의 확정 판결으로 김경준의 죄에 대해서는 명확히 결론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영화 속의 노인처럼 그저 불쌍한 희생자로 보인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는지 영화의 내용과 함께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만, 다른 이의 영화 관람을 방해하기 싫어서 단지 그냥 내가 느낀 것만 나열해 본다.

2009년 5월 3일 일요일

숫자에 대한 이해력과 사고력을 키워주는 책. 책 "숫자력"을 읽고.....

 


 만화책을 보는 듯한 표지 디자인과 크기에 "숫자력"이라고 크게 적힌 제목은 우습게만 보인다. 원래부터 숫자에 약한 인간이라서 그런지, 숫자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숫자력" 뭐야 하는 폄하의 마음이랄까? 사실은 살아가면서 숫자가 가지는 설득적인 힘과 객관성을 알기에 숫자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번번히 숫자와 친해지지 못하고 좌절하고 마는 좌절감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숫자력"이라는 제목은 안의 반항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사람의 인상을 보고 사람의 모든 것을 판단하면 안되듯이, 제목만 보고 책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또한 잘못된 것이다. 제목만 보고 피식하고 코웃음치고 폄하했던 마음은 책을 읽으면서 반성의 마음으로 바뀐다.

 

  책의 저자가 정의하는 "숫자력" 흔히 일상생활에서 쓰는 숫자와 계산능력이 아니다. 저자는 "숫자력이란 '파악력' '구체화력' '목표달성력', 가지를 익히는 "이라고 정의한다. 세가지를 자세히 설명하면 '파악력'이란 '전체를 파악하는 ', '구체화력'이란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 '목표달성력'이란 '목표를 달성하는 '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숫자를 제대로 해석하고 분석하면, 숫자가 가지고 있는 전체의 맥락을 파악할 있게 되고, 다음 단계에서는 파악한 맥락을 가지고 숫자로 달성해야 목표나 과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서 목적을 구체적으로 생각할 있고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숫자를 통해서 달성해야 목표가 명확해지고, 그래서 쉽게 목표를 달성할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숫자력' 대한 저자의 정의가 쉽게 공감이 가는 것은 책의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고 상세해서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어떤 일이나 목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번쯤은 직면해봤을 상황과 과정들이다.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숫자가 포함되지 않은 일들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숫자만큼 명확하게 객관적인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시켜주고 표현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숫자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은 일의 시작과 함께 목표를 명확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라는 점에서 숫자에 대한 관심과 이해력은 필요해 보인다. 그것이 저자가 말하는 숫자력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라는 점에서.

 

 이를 바탕으로 책을 본다면 쉽게 숫자력에 대해서 기본적인 토대를 잡을 있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숫자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각하거나 또는 숫자에 대해서 공포감으로 생각하는 극단의 상황 때문에 우리가 일상에서 숫자를 너무 경시했거나 또는 너무 어렵게 생각했기 때문에 저자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모른 했던 뿐이다. 그래서 일상 생활에서 쉽게 활용하지 못했던 상식적인 이야기들 이랄까? 예를 GDP 나타내는 숫자 뿐만 아니라 GDP 정의를 알아야 하듯이, 저자는 숫자의 정의와 의미를 이해하라는 식의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들 한다. 공중도덕을 모르는 사람들은 공중도덕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실천하지 않은 사람들인 처럼, 우리는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았던 기본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다.

 

 기본적인 이야기라고 책의 가치를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기본을 바탕으로 뒤쪽에서는 숫자를 해석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다양한 지표나 표들을 가지고 숫자에 포함된 다른 내용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파악력' 기르는 방식을 자세하게 가르쳐준다. 속의 표를 보면서 저자의 설명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보이는 이상의 것을 쉽게 파악할 있다. 하지만, 책은 '파악력'까지다. 자세하게 '구체화력' '목표달성력'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개의 힘은 '파악력' 바탕으로 각자의 목표방향에 따라서 결정될 밖에 없는 아주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권으로 저자가 말하는 '숫자력' '파악력', '구체화력', '목표달성력' 모두 달성할 수는 없다. 책은 그런 것들을 부연 설명하고 있지만, 책의 정확한 목표는 '파악력' 키우고, 숫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있는 습관을 만드는 것이다. '숫자력' 키우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과정으로 인도한다고 할까?


숫자력 - 8점
고미야 가즈요시 지음, 김경은 옮김/위즈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