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30일 수요일

내가 만든 송편.

어머니는 반죽과 고물을 하시고, 송편의 80~90%는 제가 빚었습니다.

 

쌀 2되 분량으로 이번에 송편을 만드신다고 하는데, 완전 노가다가 따로 없습니다.

 

앉아서 줄어들지 않은 반죽과 송편 고물을 보면서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앉아 있어서 그런지 마지막에는 허리에 통증도.......

 

그래도 열심히 만든 만큼 생각보다 모양도 이쁘게 나온거 같습니다.

 

                                         <빚어서 만든 송편들.>

 

                                       <빚어서 만든 송편들 2>

 

                                         <막 쪄 나온 송편들. 식히고 있는 중입니다.>

 

 핑크 빛깔의 송편들은 완전한 갈색으로,

 

연두 빛깔의 송편들은 짙은 녹색의 송편으로 변했습니다.

 

                                        <완성된 송편을 정리해 담은 모습>

 

                                       <완성된 송편을 정리해 담은 모습 2>

 

 휴대폰으로 찍어서 그렇게 좋은 사진은 아닙니다.......

 

 여기서 퀴즈를 하나 내면, 녹색 송편은 반죽에 쑥이 들어간 송편입니다.

 

 그럼 갈색 송편의 반죽에는 뭐가 들어갔을까요??

 

 모두 즐거운 추석되세요^^

 

2009년 9월 14일 월요일

당신의 육체 안에 영혼은 어떤가요? 영화 "9"를 보고..

 

 레이 커즈와일은 자신의 저서 "특이점이 온다"에서 신체와 기계가 융합한 인간의 출현을 이야기한다. 많은 SF 영화나 소설 그리고 만화 등을 통해서 이런 시대의 출현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지만, 레이 커즈와일은 시점을 2040 쯤이라고 예측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머나먼 미래의 시점이 아니라 앞으로 30여년만 있으면 그런 세상의 실현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평균수명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50 이하인 사람은 신체와 기계를 융합해 유기체의 수명을 거의 무한대로 늘릴 있는 환경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레이 커즈와일은 이런 세상을 아주 긍정적으로 예측하고 있다.

 

 최근에 개봉했던 영화 "터미네이터 4" 기계와 인간이 융합한 존재가 나온다. 영화 속에서는 "마커스"라는 인물로, 변해버린 자신의 육체에 혼란을 겪는다. 자신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를 기계로 생각하면서 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실 그는 스카이넷이 코너를 잡기 위해 만들어낸 존재다. 탄생의 이유를 보자면 그는 분명 인간과 적대적인 기계이지만, 마커스는 자신이 기계라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자신은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마커스란 존재는 인간과 기계가 융합했을 , 이전에 없던 새로운 존재가 탄생했을 , 기존의 가치관과 인식에 대한 혼란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 가치관과 인식의 혼돈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에게 묻는다.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를. 영화에서는 기계와 인간의 차이는 뭐라고 구분했을까? 영화 속에서 마커스는 코너를 위해서 자신의 심장을 내놓으면서 자신이 따뜻한 인간임을 증명한다. 지구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체와는 다르게 어떠한 혈연의 연관도 없는 존재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동물은 사람 밖에 없다고 하는데, 마커스는 희생이라는 것으로 자신이 인간임을 보여준다.

 

 반면, 일본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라는 작품은 기계와 인간이 융합한 세상을 어둡게 그린 작품이다. 육체라는 유기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능을 기계가 대신한다. 심지어 뇌까지도. 레이 커즈와일이 예측한 세상이나 영화 "터미네이터" 속의 세계관을 넘어서 미래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시대의 인간성이라는 결국 기계에 어떤 영혼이 들어 있냐에 달린 문제가 된다. 영혼은 네트워크의 세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인간의 기계적 육체를 마음대로 좌지우지 한다. 심지어 영혼까지 해킹이라는 용어를 써가면서 마음대로 조절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공각기동대" 거의 모든 것을 기계화 시키고 단지 영혼만이 남은 존재에 대해 인간성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영화 "9" 기계화 되어 버린 미래의 모습을 보여준다. 레이 커즈와일이나 터미네이터의 세계관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공각기동대와 같다고도 없다. 영화의 주인공들인 봉제인형들은 단순히 기계로만 만들어진 로봇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로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전한 기계나 인형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다. "공각기동대" 기계는 단지 영혼의 머무르는 곳이지만, 여기의 주인공들은 영혼과 몸이 하나가 되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성이라는 것을 쉽게 이야기 없을 정도의 존재가 되어 버린다. 영혼은 있으나 그것이 인간성을 나타내는 영혼이라 부르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이들과 대치점을 이루는 기계가 등장한다.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 넣은 존재인 기계.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 처럼 로봇을 생산해 인류를 멸망시켜 버린다. 얼핏 생각하면 과학기술 만능주의가 만들어낸 현상에 대한 경고로 기술과 과학의 맹목적인 추종이나 발전에 대한 우려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영화는 기계에 대해서 긍정과 부정의 시각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인류를 파멸로 몰아 넣는 기계나 인류를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봉제인형들이나 결국에 같은 과학자에게서 나온 산물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중에서 과학자는 원래부터 기계가 그렇게 폭주한 것이 아니라 말한다. 기계에 들어갈 영혼이 잘못되어 세상을 파멸로 몰아 넣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기계나 봉제인형이나 안에 어떤 종류의 영혼이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존재가 인간성을 가진 유용한 것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기계는 단지 수용체일 뿐이고 수용되는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 이유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기계라는 것을 통해서 과학기술의 발전이 만들어내는 기계와 인간이 융합한 미래 또는 인간이 기계화 되어 버린 미래에 인간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같지만, 사실 기계는 커다란 상징일 뿐이다. 기계와 봉제인형이라는 영혼의 수용체를 봤을 영화는 기계와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 나치의 상징들을 차용한 장면이나, 기계가 만들어낸 로봇이 나치의 철모와 영화 "우주전쟁" 외계로봇을 썩은 듯한 형상으로 그려진 것을 보면 기계는 잘못된 영혼을 가진 우리 인간 군상을 나타낸다. 유기체인 육체에 잘못된 영혼이 들어가서 만들어냈던 잔혹한 역사를 은유적으로 썩어 쓰면서, 타락하거나 타락해가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영화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지금 우리 안의 영혼은 어떤지를 묻는 것이다.

 

2009년 9월 10일 목요일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하여. 영화 "애자"를 보고

 

 ""라는 인격체의 존재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없어서는 되는 고귀한 존재이다. 어느 하나가 존재하지 않으면 처음부터 나는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기에, 인간에게는 그런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 ""라는 것은 하나의 인격체로써 갖춰야 덕목 중에 하나로 취급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가지는 감정이나 유대감은 같지 않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합의 결과물이 나라는 존재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머니와의 유대감이 크다. 아직 남아있는 가부장적인 문화 탓인지 몰라도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인식은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쉽게 다가갈 기회를 차단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고, 가족에 다른 방식으로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에 대해서는 미숙하거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회가 많이 변화하고 바뀌어 그런 가부장적 인식이 많이 사라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남성들의 의식 속에는 이런 인식이 남아 있고, 여성들이 배우자를 고를 고려하는 직업이나 재력은 이런 인식에 기본 바탕을 두고 있다. 지금도 많은 아버지들은 자신이 돈만 벌어오는 기계라는 자조적인 목소리를 내뱉으며, 가부장 문화가 만들어낸 생계에 대한 책임이라는 힘겨운 굴레를 혼자 지지만, 그가 가족에 헌신한 만큼의 유대감은 형성하지 못하고 가족의 울타리 밖을 겉돈다.

 

 반면, 어머니와 자식들의 유대관계는 감히 범접할 것이 없을 정도로 단단하다. 이기적 유전자론에 의하면 여성은 남성보다 자녀의 존재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붙기 때문에 남성보다 여성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 강하다고 한다. 자세하게 이야기 하면 정자의 수십 배가 되는 난자의 크기, 10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의 뱃속에 자식을 키우고 보호하는 과정 등을 통해서, 여성은 남성보다 비교할 없는 에너지를 자식에게 쏟아 붙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을 잃을 경우 여성의 손실이 남성과 비교할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에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타적인 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손해를 최소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이나 유대관계는 남성보다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은 여성들이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한 이기심의 발현으로 이타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머니의 사랑을 너무 폄하하는 같지만, 이기적 유전자론에서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생각을 바꿔서 다시 어머니와 자식의 깊은 유대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면, 다시 남성과 여성의 심리학적 기질부터 봐야 된다. 남성이라는 존재는 오랜 수렵생활의 습관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위계를 중요시 한다고 한다. 사회생활에서 나이를 따져가며 서로 형님이니 아우니 주장하는 것도 이런 심리학적 기질의 발현인데, 아버지는 자녀나 배우자에 대해서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인식은 바로 위계를 중시하는 남성들의 특징을 바탕으로 한다. 남성이 위계 수직적인 관계를 중요시한다면, 반대로 여성은 수평적인 관계를 추구한다. 그런 성향 때문에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공감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어머니는 자녀를 보듬어 주는 역할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남성보다 뛰어난 공감 능력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자녀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하지만, 어머니와는 친구와 같은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끈끈하다. 어머니가 옆에 있는 만으로도 많은 자녀들이 편안함을 갖는 이유는 바로 공감능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끈끈한 유대관계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란 존재는 내가 힘들면 위안이 되어줄 존재이고, 나의 영혼의 안식처 같은 것이다.

 

 영화 "애자" 그런 어머니와의 이별에 관한 이야기다. 언제나 옆에 있어줄 같은 어머니라는 존재가 이상 세상에 없을 때의 절망감을 미리 준비해가는 애자를 통해서 말이다. 애자라는 캐릭터는 쉽게 말하면 강하다. 천방지축이고 자기애가 강한 만큼 자기 표현에서도 거침이 없다. 변변한 직업이 없으면서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재능과 열정 하나 만으로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애자가 거친 세상에서 그렇게 천둥벌거숭이처럼 행동할 있는 이유가 뭘까? 감독은 어머니라는 존재가 애자의 든든한 배경임을 보여준다. 애자 만큼이나 만만치 않은 성격의 어머니이기에 모녀의 갈등은 끊이지 않지만, 어머니가 보여주는 사랑은 영화 곳곳에서 보여준다. 그런 어머니의 사랑이 애자가 지금껏 세상을 살아오는데 얼마나 힘이었다는 것을 애자는 쉽게 인식하지 못하지만,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이해하게 된다.

 

 애자가 어머니의 병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의 당혹스러움은 어머니의 존재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느끼게 해준 사건이 된다.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은 오빠부부 대신에 자신이 병수발을 해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불평을 하지만, 자신에게 언제나 돌아올 있는 안식처 같은 어머니의 존재가치를 알았기에 묵묵히 어머니의 곁을 지킨다. 수술을 통해서 어머니가 쾌차할 가능성이 낮음에도 조그만 희망의 끈이라도 놓고 싶어하지 않는 애자의 간절함은 어머니라는 존재감 때문이다. 영화는 그런 존재감의 상실에 대한 막막함을 뛰어나게 잡고 있다. 동물 병원에 버려진 유기견을 애자가 안락사 시킬 생각으로 주사기와 약물을 가져와 소파에 올려놓고 멍하니 않아 있는 장면이 있는데, 망설이면서 고민하는 애자의 표정은 정말 압권이다.

 

 사랑 받던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강아지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나타낸다. 영화의 후반부에 애자가 친구와 애인에게 배신당하는데 그런 상황에 대한 복선이랄까? 관계에서 상처받은 존재가 유기견들이다. 그런 상처마저도 사랑으로 감싸 있는 존재적 인물이 어머니인데, 애자는 버려진 유기견을 통해서 그런 어머니가 존재하지 절망감을 보게 것이다. 자신이 이상 돌아가 안식을 취할 있는 존재가 없어진다는 절망감과 상실감을 어두운 배경과 최강희의 뛰어난 연기와 어우러져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장면에서 애자의 절망감과 슬픔이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애자가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보내는 순간, 애자는 쉽게 어머니를 보내지 못한다. 이상 고통을 견디다 못해서 약물로 자신의 목숨을 끈으려는 어머니를 애자는 눈물로 말류 한다. 자신은 아직 어머니의 부제에 대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럼에도 애자는 끝까지 어머니를 잡지 못한다. 자신이 어느덧 어머니의 심정을 공감할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머니라는 존재의 부제에 대한 준비는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고 어머니의 존재감에만 기대었던 순간에서 어머니와 자신이 상호작용하며 서로의 존재감을 공유하면서라는 것을 보여주는 같다. 그렇게 애자는 어머니를 보낸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어머니의 둥지를 떠나지 못한 새다. 몸은 다른 독립을 하고 다른 지방에서 어머니와 떨어져 살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어머니의 둥지를 떠나지 못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언제나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낀다. 영원히 옆에 있을 같은 존재감까지도. 영화는 우리 내면에 있는 어머니라는 존재의 가치와 상실감을 같이 보여준다. 그래서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는 익숙한 이야기의 반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감동적인 이유는 최강희와 김영애의 뛰어난 연기는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