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8일 일요일

사랑 그 다양함에 대한 영화. 영화 "발렌타인데이"를 보고.

 

 올해는 2 14일이 설날과 겹쳐서 그런지 발렌타인데이 기분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솔로인 같은 인간이 발렌타인데이에 받을 초코렛도 없습니다만. 그래도 날은 사랑이 넘친다고 해야할까요, 길거리에 커다란 초코렛 바구니나 선물 상자를 들고 가는 사람들만 보는 만으로 사랑의 에너지를 느낄 있는 날이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기업의 마케팅에 젊은 사람들이 놀아난다고 개탄하기는 하지만, 1년에 하루 정도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설날과 겹치는 바람에 기분은 나지 않지만, 그래도 영화가 개봉하면서 그나마 묻힐 번한 발렌타인데이의 기분을 살려주는 같습니다.

 

  영화는 제목처럼 발렌타인데이를 겨냥한 시즌 영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조잡하게 만들어진 영화가 아닙니다. 화려한 출연진의 면목만 보고도 충분히 눈으로 즐길 있을 정도입니다. 거기에 "귀여운 연인"으로 로멘틱 코메디 장르의 연출에 재능 있는 게리 마셜이 감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발렌타인데이 시즌 영화로 즐기기에 충분한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한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설날과 겹친 발렌타인데이의 효과 때문인지, 아니면 같이 걸린 다른 영화의 영향력 때문인지, 이상하게 우리나라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같아서 조금은 안타깝습니다.

 

 영화를 살펴보면,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출연하는 배우들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편의 영화에 단독 주연으로 나서도 모자람이 없는 배우들임을 있습니다. 그런 배우들을 영화에서 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즐거움을 주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영화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저의 여신인 제시카 알바의 역할은 정말(눈물 밖에 나지 않습니다.). 아무튼 출연하는 배우들이 빵빵한 만큼 영화 속에 담긴 이야기 또한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복잡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냥 스크린에 흘러가는 영상을 눈으로 따라가는 만으로 충분히 전체적인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있습니다. 생각할 없이 그냥 느낄 있는 영화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루할 있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보면, 사랑만큼 복잡하고 정의 내리기 어려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만큼의 사랑 이야기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까요? 영화에서 나오는 사랑의 이야기는 대략 세봐도 11가지 정도가 됩니다. 이야기의 공통점이라고는 한가지 사랑을 주제로 한다는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대도 쉽게 공감을 하면서 영화를 보는 이유는 모두가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기에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듯한 이런 영화에 공감하면서 있다는 것도 있겠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의 마음에서 나온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화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낯설지 않고(동성애 이야기는 조금 낯설기는 합니다만), 쉽게 감정 이입을 시킬 있게 만듭니다.

 

 많은 배우들이 나오다 보니 짧은 출연 시간 동안 연기력을 보여줄 여유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영화를 재미있게 만드는 명의 배우가 존재합니다. 망가지는 배역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그런 망가짐 자체가 사랑스럽게 보이도록 만들 정도 입니다. 금전적 어려움 때문에 폰섹스 알바를 하는 해서웨이와 안티 발렌타인데이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제시카 비엘의 연기는 영화의 하나의 재미입니다.

 

아이들과 가족관객의 눈높이에 맞춘 영화. 영화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을 보고.

 

 초등학교 시절에 샀던 중에 별자리 이야기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책으로 내용 중에서 별자리에 얽힌 신화들을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나이 대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신화와 하늘의 별자리에 대한 충만한 호기심과 관심으로 책에 빠져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책을 읽으며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신화 영웅이나 신들의 이름들에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기억력이 좋지 않다보니 지금은 신이나 영웅들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때의 기억 때문인지 나이가 들어도 유치한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미국 드라마나 영화는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해석해서 만든 영화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 그런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정확하게는 기억하지 못해도 귀에 익숙한 이름들이 들릴 마다 초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속의 이야기와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두근거림을 생각나게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조금은 유치하다고 해야 할까요? 영화 소재와 내용의 유치함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영화의 감독 "크리스 콜롬버스" 또한 영화의 유치함에 힘을 보탭니다. 감독의 필리모그라피를 조금만 훌터보면 알겠지만, 좋게 말하면 가족영화 감독으로써 입지를 다져온 것이고, 다르게 말하면 아동영화 연출에 탁월한 감독이라고 있습니다. 영화는 소재와 감독의 연출력이 합쳐져서 어른들이 보기에는 조금은 유치한 영화이지만, 아이들이나 가족이 보기에는 충분한 재미를 갖춘 영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극장에는 아이들이 넘쳐나더군요. 가끔 어른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아이들의 부모들이고 순수하게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서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영화는 번개를 도둑맞은 제우스가 범인으로 포세이돈의 아들 퍼시 잭슨을 지목하고, 번개를 돌려주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시작합니다. 번개도둑으로 몰린 퍼시 잭슨은 번개를 노리는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고,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포세이돈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데미갓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데미갓들이 모여있는 훈련소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으며 자신의 누명을 벗을 방법을 고민합니다. 그런데 지옥의 하데스가 갑자기 나타나 번개와 퍼시 잭슨 어머니의 교환을 요구하게 되고, 퍼시 잭슨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한 모험을 떠나게 됩니다. 본격적인 영화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모험의 내용은 판타지적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 두근거리는 설래임을 만들어 냅니다. 우마 서먼이 연기한 메두사나 그래픽으로 처리한 히드라 그리고 무시무시한 지옥의 하데스 등은 신비한 모험의 세계로 관객을 매혹하기에 충분한 요소들입니다. 하지만,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원작의 수준에 맞춰져서 그런지 아니면 감독의 성향 때문인지 그런지 몰라도 판타지적 모험에 대한 강점은 있지만, 대결구도가 만들어 내는 긴장감은 거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화의 마지막에 펼쳐지는 번개 도둑과 퍼시 잭슨의 대결이 긴장감 있게 느껴집니다. 그런 긴장감은 부족하고 판타지적 모험요소가 강하다 보니 아동영화라는 인상을 쉽게 지울 없는 한계를 가진 영화가 되어버렸습니다.

 

 거기에 영화의 전체적인 주제가 가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번개를 훔친 도둑도 얼굴조차 없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감으로 행동입니다. 퍼시 잭슨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스스로 지옥으로 들어갑니다. 퍼시 잭슨이 위기에 빠질 마다 도움을 주는 포세이돈의 목소리나 마지막 직접 포세이돈을 만나서 부성애를 느끼게 되는 장면 . 모두가 가족애라는 안에서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영화의 목적이나 타켓은 명확합니다. 조금 유치하게 만들어서 아동영화와 가족영화 사이의 작품입니다. 같이 그리스 신화에 흥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 아이들과 영화를 것이 아니라면 그다지 매력적인 작품이 아닙니다.

 

가족에 속하지 못한 주변인들. 영화 "의형제"를 보고......

 

 영화 "의형제"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에서만 나올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남북분단 상황 속에서 생겨난 간첩과 간첩의 활동을 저지하고 잡는 전직 국정원 직원이라는 서로 대립적인 존재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기 때문입니다. 간첩과 국정원 직원이라는 인물들의 구도로 , 어떻게 보면 현실적으로 지극히 적대적으로 대치중인 남북문제나 남남내부의 갈등처럼 정치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감독이나 제작사 측에서는 그런 정치적 의도를 비껴가기 위해서 상당히 애를 흔적이 묻어 납니다. 사실적 묘사를 위해서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의 흐름을 영화 속에 첨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영화의 사실성을 살리기 위한 도구로만 쓰인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화는 남북관계 속에서 생겨난 인물과 사건들의 설정만 영리하게 이용할 뿐이고, 실제로는 우리 내부의 모순과 인간관계라는 관점에서 이야기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화 인물들에 대해서 다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송강호가 연기한 이한규라는 인물의 전직과 강동원이 연기하고 있는 송지원이라는 인물의 전직이나 정체가 아니라 그들의 현재 상황과 내면을 관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적대적인 남북관계에서 탄생한 불행한 시대의 희생자들이나 피해자의 관점에서 벗어날 있고, 평범한 인간관계나 우리 사회의 모습을 있기 때문입니다. 이한규와 송지원 사이에서 형성되는 긴장감과 갈등이라는 것은 시대가 만들어낸 부산물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있습니다.

 

 우선 이한규라는 인물을 살펴보면. 그는 전형적인 한국의 아버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책임감에 사회생활에 충실한 가장입니다. 그로 인해서 가정에는 소홀한 전형적인 한국적인 가장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거기에 출세욕과 금전욕까지 더해진 인물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물질만능주의 성향까지 담고 있는 인물입니다. 한국의 대다수 가장들이 그렇듯 이한규라는 인물도 책임감은 강하고 가족도 사랑하지만, 사랑을 표현할 모르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에는 직장에서도 가족에서도 버림받습니다.

 

 이한규가 직장에서 버림받고 하는 일은 도망가버린 외국인 신부들을 찾아주는 일을 합니다. 자신의 가정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 남의 가정을 강제로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일을 선택하게되고 망설임 없이 하게 되는 것을 보면, 이한규라는 인물은 진정한 가정의 가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만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유지하면 된다는 가부장적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있습니다. 이한규는 가족의 가치나 가정의 중요성을 전혀 모르는 인물입니다. 자신의 외로움을 알고, 딸에 대한 그리움은 가슴으로 뼈저리게 느껴도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고 행동해야 될지 모릅니다.

 

 잔혹한 킬러이지만, 따뜻한 심성을 가진 송지원이라는 인물이 오히려 가정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북한에 존재하는 아내와 뱃속의 아이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어떻게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인지 송지원은 이한규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한규와 같이 동업을 하게 되면서도 조금은 과격하게 일을 처리하는 이한규에 비해서 송지원은 대화와 설득을 통해서 외국인 신부들을 설득해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냅니다. 하지만, 송지원은 조금 다른 가치를 가진 인물입니다. 아주 인간적인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신념이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수동적인 인물이라고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과 명령에서 일어나는 괴리에 크게 저항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밖에 없는 것이 그의 가족 때문이라는 명확한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인성을 가진 사람이 가까워지는 이유 또한 가족 때문입니다. 가족에 대한 생각도 다르고 가족과 떨어지게 이유도 다르고, 서로의 가치관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서로를 이해할 있는 것은 바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을 서로가 공유하고 있어서 입니다. 홀아비 처지는 과부가 안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감정이입 역지사지를 하면서 그들을 가로 막고 있는 벽을 허물어 버립니다. 영화 제목처럼 의형제에 가까운 유대감을 형성합니다.

 

 외국인 신부에 대한 이야기와 외국인 노동자의 이야기까지 포함해서 본다면, 우리가 앞으로 변해가는 사회적 흐름에 맞춰서 거대하고 포괄적인 가족이라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있습니다. 이한규와 송지원이 전통적인 혈연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민족이라는 개념이고, 그들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제는 이민자와 외국인 신부들 그리고 사이에 자녀들에 대한 포괄적인 모습을 하나의 영화에 담아서 보여줍니다. 강제로 이러해야 된다는 의견을 주입시키지 않고, 우리 사회에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결론은 씁쓸합니다. 외면적으로 보이는 엔딩은 해피엔딩이기는 합니다. 이한규는 자신의 가족들 품으로 가고, 송지원은 자신의 가족을 만나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그런 외연적인 모습은 결코 해피엔딩이 아닙니다. 이한규는 비행기에 오르자 마자, 위스키를 주문해 술부터 마시려고 합니다. 그는 여전히 가족의 굴레 안에 속하지 못하고 여전히 주변만 맴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술을 통해서 외로움을 달래려고 하니까요.

 

 그렇다고 자신의 가족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하는 송지원도 해피 엔딩이 아닙니다. 새터민들에게 불었던 영국이민 열풍을 감독은 송지원을 통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같은 동포라고 믿었던 남한 사람들에게서 중국인보다도 못한 차별을 받는 현실 때문에 새터민들은 영국이민이라는 환상이 불었고, 결국 실패가 끝났던 현상을 보여준 것입니다. 결국 겉으로는 핏줄을 가진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지만, 우리 내면에서는 일어나는 지독한 차별의식을 비꼬아서 보여준 것입니다. 송지원은 가족과 함께 있을지 모르지만, 가족이라는 국가나 민족이라는 이름의 것들에 속하지 못하는 주변인 것입니다.

 

2010년 2월 27일 토요일

소수자들의 권리 찾기.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2월 4주.

 

 학창시절 교과서를 통해서 배웠던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의 원칙" 중요한 의사 결정의 수단이라고 배웠습니다. 다수의 생각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지만, 프랭크 뉴포트는 "여론조사"에서 "개인 각자의 경험과 지식을 합친 총량은 진리의 근원이며, 그것은 소수의 경험과 지식에서 나온 대안보다 심오하다." 하면서 다수의 생각과 지식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프랭크 뉴포트는 세계적인 여론조사 기업의 편집장으로써 오랜 시간 동안 대중들의 여론과 생각을 수집하고 평가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 보니 앞의 말은 자신이 하는 , 여론조사라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여론조사란 어떤 것이고 그것이 어떤 효용성과 정확성을 가지는지 반박하기 위해서 것입니다. 하지만, 집단지성이라는 말에서 있듯이, 다수의 생각과 경험에서 나온 지식은 개인이나 소수의 지식들보다 옳다는 것을 경험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에서 맹점에 빠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수가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으로만 움직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과정입니다. 소통과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합의점을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이 민주주의의 요체인데도, 이것은 완전히 무시하고 결론을 내는 방식에만 집중하게 되고 그것이 무조건 옳다고 맹신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소수자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여기저기 떠돌 뿐입니다. 자신들의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해도 다수의 폭거 앞에 언제나 무너지게 됩니다. 소수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힘겨운 투쟁과 기나긴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소수자들을 위한 소수자들의 투쟁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따르게 됩니다. 당연한 인간으로써의 권리를 이야기하는데도 자신을 희생해야만 권리를 얻게 되는 상황이 됩니다.

 

 

 영화 "밀크" 소수자를 위한 남자의 투쟁을 그린 작품입니다. 뉴욕의 증권회사 직원이던 하비 밀크가 40 생일을 맞아서 애인 스콧과 자유로운 샌프란시스코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작은 카메라 가게를 차리고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됩니다. 그런데 동애자들이 일상적인 폭력과 편견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게 되고, 인권운동을 하게 됩니다. 영화는 실존 인물이던 인권 운동가이자 정치가인 하비 밀크의 마지막 8년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가 인권을 운동을 하던 1970년대는 동성애자에 대한 폭력과 편견이 당연시 되었던 시대라고 합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인권운동과 정치를 하게 되고 번의 낙선 끝에 시의원에 당선된 하비 밀크를 그린 영화를 통해서 소수자의 목소리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질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81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펜의 명연기까지 감상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비 밀크는 동성애자에 대한 폭력과 편견이 만연했던 시대에 저항했고 세상을 조금씩 바꿨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조금씩 바뀌어 노골적인 폭력은 사라졌다고 하지만,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나 보이지 않는 차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소수자들은 다수의 편견과 보이지 않는 차별 속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찾지 못하고, 자신의 주장을 당당히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정태적 집착에 빠져서 세상이 변했고 소수자의 인권도 자신의 인권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법으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다고 해도 여전히 많은 소수자들은 사회의 편견과 차별이 두려워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쉽게 커밍 아웃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모습을 숨기면서 살아갑니다.

 

 

 영화 "필라델피아" "밀크" 같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편견과 차별에 고통 받는 명의 소수자와 그를 도와서 법정 투쟁을 하는 변호사의 이야기 입니다. 영화는 필라델피아의 로펌의 유능한 변호사 였던 앤드류 버킷이 동성애를 혐오하는 회사 중역들에 의해 해고되면서 시작됩니다. 앤드류 버킷은 중요한 사건의 고소장을 잃어 버렸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합니다. 하지만 앤드류는 자신의 해고 사유가 동성애와 에이즈를 혐오하는 중역들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소송을 도와줄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밀러 변호사를 찾아갑니다. 밀러는 앤드류가 에이즈 환자를 것을 알고 소송을 거절하게 되지만, 확고한 의지와 신념을 가진 앤드류 버킷에 끌려서 같이 법정 투쟁에 들어가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편견과 차별에 맞서는 앤드류 버킷과 밀러의 법정 투쟁 이야기도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보다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만 봐도 매력적입니다. 지금은 연기파 배우로 유명한 3명의 배우들이 동시에 등장합니다. 행크스, 덴젤 워싱턴 그리고 안토니오 반데라스.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당시 그렇게 유명하지 않아서 배역이 작아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의 존재감 만큼은 충분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풋풋한 안토니오 반데라스를 만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기파 배우 덴젤 워싱턴은 명성에 맞는 연기를 통해서 관객들을 영화 속으로 몰입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가장 주목해서 봐야 배우는 행크스 입니다. 지금이야 대단한 연기파 배우로 알려진 행크스 입니다만, 사실 이전까지 행크스는 코메디 연기로 유명한 배우였습니다. 영화는 그의 연기인생에 전환점이 영화입니다. 그리고 영화의 뛰어난 연기를 통해서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받았음을 물론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 영화의 주제 음악인 브루스 스프링턴의 "street of philadelphia" 빼놓을 없는 요소입니다.

 

 

 동성애는 개인의 성적 취향이 다른 소수자라면,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직업적 선택으로 소수자가 사람들입니다. 노동 행위가 다수의 도덕적 관점에서 본다면 비도덕적이기는 합니다. 물론 그런 도덕률을 그들에게 적용해서 비판을 있지만, 비판을 넘어서 노동자들에 대한 인격적 모독이나 보이지 않는 차별 그리고 폭력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그들의 직업이 부도덕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인권을 함부로 대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는데도 말입니다. 노동자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독한 폭력성과 편견은 마초문화에 기본을 두고 있다고 있습니다. 성노동자에 대한 인격적 모독과 차별과 폭력은 부도덕적 노동행위라는 관점과 행위자들이 남성에 비해 약한 여성이라는 것이 더해지면서 발생하는 행위라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많은 여성들이 높은 공직에 진출하기 시작하고, 여성 보호 정책이 많이 시행되면서 오히려 남성들의 역차별에 대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의 밑바닥의 많은 여성들은 폭력과 차별에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본다면, 하위계층을 차지하고 있는 성노동자인 여성들은 얼마나 고통을 받을지 쉽게 짐작할 있습니다.

 

 영화 "대한민국 헌법 1" 소수자인 성노동자의 국회진출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친구의 억울한 사고로 화가난 윤락녀 고은비가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 출마를 하게 됩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그녀의 지지율이 급상승하게 되면서 여당과 야당은 긴장을 하게 되고, 온갖 음모와 계략으로 고은비를 괴롭히게 됩니다. 영화는 계급으로 따진다면 최하층에 있는 성노동자를 통해서 최상층이라고 있는 정치인과 정치판을 풍자하는 영화입니다. 정치와 정치인을 비도덕적 행위를 보여주면서 노동자의 직업 윤리에 대해서 비판하는 다수의 도덕성은 과연 얼마나 도덕적이라고 있는가를 묻는 영화입니다. 결국 영화는 성노동자의 존엄성은 그들의 부도덕한 직업윤리라는 이유로 침해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