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7일 월요일

따뜻한 인간을 묘사한 영화. 영화 "해운대"를 보고

 

 개인적으로 여름 한국 영화 중에서 가장 기대하던 작품 중에 하나가 "해운대". 고향이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 명소인 해운대가 배경이라는 , 그리고 인간에 대한 따뜻한 묘사가 매력적인 윤제균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이 영화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소재로 삼은 쓰나미는 그렇게 기대를 하기에는 한국의 제작비 여건이나 여러 인프라 등을 고려했을 특수효과나 CG 영화의 중요 요소가 가능성은 많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기본적으로 영화 속에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화의 매력 포인트가 것이라고 생각했다. 윤제균 감독도 인터뷰나 제작 발표에서도 강조했듯이, 영웅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 속에 담았다고 했던 만큼 해운대라는 영화의 주요 관람 포인트는 해운대를 비롯한 부산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CG 아니라 영화 인물들이다.

 

  영화는 커플들이 이야기를 풀어간다. 강연희(하지원) 최만식(설경구) 커플, 이유진(엄정화) 김휘(박중훈) 커플, 최형식(이민기) 김희미(강예원) 커플들이 중심을 이루면서 주변인물들이 영화의 내용을 이끌어 간다. 그런데 최형식, 김희미 커플들이 만들어주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가장 중심이 되는 강연희, 최만식 커플과 이유진, 김휘 커플의 이야기는 너무 전형적이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윤제균 감독의 전작 "1번가의 기적"에서도 개인적으로 하지원, 임창정 커플의 이야기보다 이훈과 강예원 커플의 이야기를 좋아했었는데 이번 영화에서도 중요 커플들 보다는 그들의 이야기가 매력적이다.

 

 영화 속에서는 강연희, 최만식 커플이 가장 복합적인 사연을 가지고 있고, 만큼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커플이다. 하지만 코믹적 이미지를 너무 살리려고 했는지 설정이 조금은 과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감독의 전작에서도 그런 과도한 코믹설정이 남발하고 있기에 웃으면서도 조금은 불편했는데, 이번에도 조금은 과도한 설정이라는 느낌이 많이 든다. 야구장의 추태 장면은 그렇게 민망스럽기까지 한지. 개인적으로 롯데 자이언츠의 팬으로써 그런 추태를 보여주는 사람들을 실제로 많이 보아왔기에, 그런 추태적인 장면이 영화 속에 담겼다는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 최만식의 추태가 현실 속에 있음에 느끼는 민망함이랄까?

 

 이유진과 김휘 커플은 위기의 상황에서 직면한 사람들이 마지막에 보여주는 화해와 용서를 보여주는 커플이다. 너무나 남발되는 설정의 커플이랄까? 대부분의 재난 영화에서 이런 커플들을 많이 보여지는데, 그런 설정을 벗어나지 않아서 조금은 아쉬운 같다. 그런 아쉬움을 빼더라도 인간의 모습을 희망적으로 그리는 감독의 특성을 살려서, 죽음으로 완성된 화해와 용서를 삶을 통해서 다시 완성하는 화해와 용서로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연희와 만식을 통해서 새로운 시작과 희망이라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실패를 극복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커플의 이야기인 유진과 커플의 새로운 시작도 나름 다른 매력이 있지 않았을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영화 커플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커플은 형식과 희미 커플이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 캐릭터들을 본뜬 듯해서 신선함이라는 측면에서는 떨어진다. 신선함을 떨어지기는 하지만, 다른 커플에 비해서 가장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선사한다. 마지막에 가장 슬픈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도 커플이다. 하지만, 작위적인 장면은 그렇게 슬픔을 야기하지 못하는 같다. 차라리 "킹콩을 들다"에서 평론가들이 신파적이라고 지적했던 부분이 슬프게 느껴진다. 슬픈 장면을 야기하는 작은 사건들이 과도한 설정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조금만 비틀어서 생각하면 어쩔 없는 슬픈 사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킹콩을 들다"에서 이범수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인간의 힘으로 어쩔 없는 것이라면, 형식과 희미 커플이 만들어내는 슬픔은 영화의 장면을 위해 만들어진 작위적인 냄새를 지울 수가 없다.

 

 사실 개인적으로 영화 속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주인공들이 아니라 김인권이 연기한 오동춘이다. 윤제균 감독의 영화를 보면 특별하게 악한으로 그려지는 인물이 없고, 악함에도 내면에 따뜻함이랄까 선한 면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영화 속에 그런 인물이 바로 오동춘이다. 만식의 아들을 이용해서 앵벌이나 하고, 직업도 없는 백수일 정도로 찌질한 인물이지만, 오동춘도 영화의 마지막에는 내면의 선함을 보여준다. 만식의 아들과 어머니를 위험 상황에서 챙기기도 하고 나중에는 비록 다른 사람에 밀려서 바다로 들어가기는 하지만 사람의 목숨을 구해낼 정도로 내면은 착하고 선한 인물인 것이다. 김인권도 오동춘이라는 인물을 아주 그려냈을 정도로 영화 속에서 감초 같은 연기를 선보인다.

 

 영화는 이런 인물들의 묘사로 인해서 초반은 조금은 지겹다. 후반부에 쓰나미가 밀려오면서 영화의 재미를 본격적으로 만들어 낸다. 후반부의 긴장감과 본격적인 인물들의 묘사는 충분히 영화의 재미를 해준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조금은 민망했다. 내가 영화 속에 나온 듯한 쑥스러움이랄까? 과도한 부산 사투리의 사용도 쑥스럽게 만들고, 앞에서 이야기한 야구장의 모습도 그렇다. 사실 부산 사람들 중에서 그렇게 과도하게 사투리를 구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부산 살면서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사투리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투리는 무슨 뜻인지 한참을 생각해야 했을 정도면 설정을 너무 과하게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해운대" 인물들에 대한 감독의 따뜻한 묘사와 시선 그리고 감독의 고향 부산에 대한 애정까지 느낄 있는 매력적인 영화다.

 

제대로 된 김치맛 보기. 책 "김치 견문록"을 읽기.....

 

 어머니가 김장 하신 , 상위에 올라오는 김치는 그날 담은 김치다. 그런데 칼로 설지 않고 덩어리를 그대로 그릇에 담겨 식탁에 올려져 있다. 칼로 썰어 놓은 조각난 김치면 적당한 크기로 쉽게 먹을 있을 텐데, 덩어리 올려진 김치는 손으로 찢어 먹지 않으면 먹는 조차 쉽지 않다. 어쩌다 직접 찢은 김치는 크기가 너무 커서 먹기 조차 쉽지 않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김치를 담근 그런 식으로 김치를 식탁에 올리신다. 먹기 불편하다고 어머니에게 투정하면 하시는 말씀은, 김치는 손으로 찢어 먹어야 맛이 있다고 하신다. 그런데 말이 허투루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실제로 칼로 설은 김치와 손으로 찢은 김치의 맛은 다르다. 손으로 찢은 김치의 맛이 있다. 그런지는 미스터리였는데, 우연히 잡은 책에서 이유가 나온다.

 

 "담가진 김치를 먹을 때도 칼을 대면 특유한 맛이 달아난다 . 써는 행위를 가급적 삼갔다. 써는 대신 찢어놓거나 손으로 무질러놓았다. 써는 것을 거부하는 우리 풍습은 동서 문화를 비교해보는 좋은 패러다임이기도 하다. 서양 문화를 인공적일수록 가치를 발휘하고, 한국 문화는 자연적일수록 가치를 발휘한다는 차이가 썰기 문화를 해석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있다."

 

 사실 책은 관심 밖의 책이었다. 음식에 관심이 많으신 어머니를 위해서 구입한 책인데, 눈이 침침하신 어머니는 읽으시고 내가 읽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음식에 관심 있어서 읽은 것은 아니고, 최근에 머리 아픈 책들만 보는데 지쳐서 쉬운 책을 보자는 생각에 집어 책이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읽고 있었는데, 읽을 수록 김치에 대한 놀라운 정보를 접하게 되면서 읽을 수록 점점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김치에 숨겨진 놀라운 사실들은 김치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과학과 오랜 경험의 결정체라는 것에 놀랐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음식에 대해서 맛깔나게 그러면서 쉽게 소개하는 중에 하나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진 허영만 작가의 "식객"이라는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책은 김치의 역사에 대한 조금은 딱딱하고 지루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저자가 김치에 대한 이야기는 글의 맛이나 흡인력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내가 먹지 못하는 음식들(생선으로 만들어진 음식) 있는데, 그것마저 군침 도게 만들 정도다. 집을 소개하는 책들이나 글은 맛을 글로 표현하려 하지만, 책은 맛에 대한 표현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치에 숨겨진 과학적 사실과 지혜를 알아간다는 즐거움으로 군침 돌게 만든다. 거기에 더해서 풍부한 사진 자료들도 책의 내용과 함께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김치 견문록 - 8점
김만조 외 지음/디자인하우스

2009년 7월 22일 수요일

경쟁과 협동 어떤 것이 발전과 혁신을 이룰까?

 

 이제 경쟁이라는 놈은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다. 경쟁 피로증이랄까? 경쟁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으로 인해서 약육강식의 정글과도 같은 경쟁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힘들어하며 지치기 시작했다. 정신까지 메마르게 만드는 치열한 경쟁은 결국에 사람이 하나의 소중한 존재로서 사회에 적응하기를 거부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은둔형 외톨이들을 비롯해서, 과거에 비해서 급속한 증가를 보인 정신병 환자수,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 또한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경쟁에 대한 그런 사회적 부작용과 피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경쟁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과 지금까지 자신들이 걸어온 인생에 대한 경로의존성 때문에 쉽게 경쟁사회에서 탈출하거나 저항하지 못하고, 여전히 순종하고 있다. 그래서 일까? 여전히 경쟁이 사회를 발전시킨다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경쟁이라는 단어를 신앙처럼 받든다.

 

 그런데 경쟁이 과연 사회를 그렇게 발전시켜왔던가? 최근의 경향만 보더라도 경쟁보다는 협동을 택하는 경우가 많은 같은데 말이다. 산업 쪽에서는 현대와 삼성이 자동차용 반도체의 공동개발에 합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었다.  Iter라고 불리는 핵융합 발전 프로젝트에는 유럽연합, 일본, 러시아, 중국, 한국, 인도, 미국이 참여해서 하고 있다. 엄청난 개발비와 성공여부도 불투명하기에 독자개발보다는 다국적 프로젝트로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차세대 전투기 JSF 사업에는 7개국의 참여하고 있다. 사업 역시 막대한 개발비 때문에 다국적프로젝트로 진행 중이다.

 

 인간게놈프로젝트는 재미있다. 유전자 해독작업은 처음에 몇몇 제약회사들이 독자적으로 경쟁하면서 시작하다가 자금과 기술력이 일반기업이 감당하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공가능성도 장담할 없어서 글로벌 프로젝트 형태로 진행되었다. 결과 예상했던 시간보다 빠르게 인간게놈지도를 완벽하게 완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윈도우와 경쟁하는 리눅스의 탄생과 발전과정을 보자. 리누스 토발즈라는 명의 개발자에서 시작한 프로젝트가 얼굴조차 없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혁신적인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런 리눅스의 성공을 통해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성과물 또한 상용 소프트웨어 못지 않다.

 

 이러한 현상들은 현대 사회의 기술의 발전과 복잡성 그리고 거대한 규모 때문에 개별적 경쟁이 불가능한 환경이 형성됨으로 인해서 생긴 경우가 많다. Iter JSF 게놈프로젝트나 개별 회사나 국가가 감당할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천문학적인 재정의 투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공의 가능성이라도 높으면 모르겠지만, 실패의 가능성이 높은 프로젝트들이 많다. 특히 이들 중에 iter 게놈프로젝트의 경우 인류의 진보에 혁신적인 역할을 있는 것들로 기대를 모으고 또는 모았던 프로젝트들이다. 중에 게놈프로젝트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이미 게놈프로젝트는 성공을 해서 많은 후속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게놈프로젝트의 경우 유전자 지도에 대한 특허나 어떠한 권리를 포기한 상태다. 그러한 권리가 후속연구의 진행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게놈지도에 대한 이용은 누구나 자유롭게 있는 상황이다. 경쟁은 여기 후속연구에서 발생한다. 같은 정보와 자료를 가지고 있더라도 후속연구의 결과물에 대한 권리는 연구자가 가지기 때문에 기업들은 게놈지도를 이용해서 다양한 치료법과 의약품을 개발 중이다.

 

 그럼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보자. 후속연구의 결과물이 혁신적인 진보일까 아니면 게놈프로젝트 자체가 혁신적인 진보일까? 혁신적인 진보라고 말할 있는 것은 게놈프로젝트라고 있다. 개별 경쟁으로 감당할 수도 언제 달성할지도 없었던 프로젝트가 협동을 통해서 순식간에 완성되었으니 말이다. 프로젝트는 유전학이라는 분야를 단계 도약시켰다.  그래서 이용할 있는 정보나 자료가 혁신적으로 변했다. 바꾸어 말하면 생명공학이라는 분야에 경쟁을 위한 새로운 경기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경기장에서 많은 학자들과 기업들이 이제 경쟁을 시작한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경쟁은 게놈프로젝트를 뛰어넘는 혁신이 되지 못한다. 프로젝트 안에서의 진보일 뿐이다.

 

 축구에 비유하면, 축구 경기장이 게놈지도이고 그런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프로팀과 선수들이 게놈지도를 이용한 연구에 힘을 쓰고 있는 학자들과 기업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쟁은 경기장 안에서만 일어난다. 경기장을 뛰어넘거나 벗어나지 못한다. 경쟁은 경기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만 펼쳐질 뿐이다. 그러한 경쟁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경기장에 한정될 다른 분야를 새로 창출하지는 못하는 한계를 가진다. 경쟁으로 만들어진 진보라는 것은 개선이나 기량의 발전이라는 한계를 가지게 된다. 만약 축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경기장은 축구에 관심 없는 사람도 운동을 하기 위해서 이용할 있는 환경이 되지만, 거기서 일어난 경쟁으로 돌아오는 이득은 아무것도 없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경쟁은 축구와 같은 상황이 많다. 그래서 인류 역사에 혁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보면, 그런 경쟁으로 완성된 것이 거의 없다. 혁신이라고 불리는 결과물을 만든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누군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일이 좋아서 그저 몰입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많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경쟁이 사회를 발전시키고 진보시킨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인류의 오랜 역사를 봐도, 인류가 경쟁했던 것은 인류 자신이 아니 였다. 인류는 척박한 자연환경과 싸우고 생존하기 위해서 부락을 형성하고 사회라는 것을 형성했다. 맹수들과의 생존경쟁을 하기 위해서 무기를 만들고, 협동을 해서 사냥을 했다. 그렇게 인류는 자연과 다른 종과 경쟁하면서 발전하고 진보한 것이다. 인류 내부의 경쟁으로 발전하게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그것을 발전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고 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류는 인류자체와 맹목적인 경쟁을 하기 시작한 것일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류가 다른 종들의 우위를 점하면서부터 이상 경쟁의 상대를 외부에서 찾기 힘들어 지면서라고 생각한다. 자연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개발을 해서 인류의 의도대로 있는 정도가 됨으로써 경쟁의 상대를 상실하게 것이 원인이리라. 경쟁의 유전자가 내부에 충만한 인류는 다른 경쟁의 상대를 찾기 시작했으나 이상 외부에서 찾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협동하던 인류는 이제 내부에서 경쟁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내부에서 치열한 경쟁 중이다. 같은 종임에도 불구하고, 치열함은 야생의 동물세계와 맞먹는다.

 

 하지만, 최근에 인류는 경쟁의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맹목적인 경쟁이 만들어낸 미국발 금융위기를 비롯해서, 인류의 경쟁으로 마구 망쳐놓은 자연이 역습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위기에 인류가 선택한 것은 경쟁을 통한 극복이 아니다. 경쟁이 만들어낸 폐해를 경쟁으로 해결할 없다는 것을 알게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금융위기를 맞아 전세계가 협동해서 위기의 해결을 위해서 노력 중이다. 국의 통화정책을 공조하기도 하고, 부족한 자금이 있으면 서로 빌려주기도 하는 상황인 것이다. 자연의 역습에 대해서도 기후협약 같은 것을 만들어 온난화 방지에 나서기 위한 노력이 한참 진행 중이다.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완벽한 협동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피해와 재난에 인류가 직면한다면 협동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경쟁사회와 비정규직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 비정규직에 관한 글이 올라왔었다. 경쟁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경쟁은 필연적이며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글의 논지였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라는 말을 탄생시킨 다윈의 진화론에 바탕을 이런 생각을 보통 다위니즘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글에서 전재하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경쟁을 했던가? 정규직들은 비정규직이랑 같이 밥먹는 것도 싫어해서 비정규직만의 자리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던가? 정규직은 비정규직이랑 출퇴근 버스에 함께 있는 것이 싫어서 출퇴근 버스에서도 서로를 구분하는 짓거리를 저지르지 않았던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경쟁을 했다면 승진에 차별이 없어야 하고, 월급에 차별이 없어야 하지 않은가? 하지만 현실은 비정규직은 승진을 기대할 없을 뿐만 아니라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월급에서도 정규직에 한참 모자라지 않던가. 그런데 무슨 경쟁을 하고 그런 경쟁에서 무슨 발전이 있다고 그런 전제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경쟁시키면 초등학생이 중학생을 이길 정도로 발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초등학생들을 좌절감을 맞보고 일찌감치 경쟁을 포기할 있을 정도의 충격만 뿐이다. 원래 청소년 시절에는 달의 차이가 지적 능력이나 체력적 능력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경쟁이라는 자체가 없다. "아웃 라이어"라는 책에서는 스포츠 영역에서 뛰어난 선수들이 특정 달에 몰려있는 경우가 많은 것에 대해 추적한 것이 나온다. 결론을 이야기하면, 조금이라도 먼저 태어난 아이들이 나이 또래에서 운동능력이나 지적능력이 대체로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런 학생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지속적으로 운동을 하게 되고, 반면 어린 시절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스포츠를 그만두게 된다. 그렇게 시절부터 인정받은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훈련과 연습을 통해서 성인이 되어서도 뛰어난 선수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특정 달에 태어난 사람 중에 뛰어난 운동선수가 많을 밖에 없다고 한다. 같은 나이 또래에서 생일 차이로도 능력치가 그렇게 차이가 나는 마당에, 하물며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경쟁시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경쟁이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이듯,  정규직과 비정규직과의 경쟁이라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것도 그런 것이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사이에는 개인의 능력으로 뛰어 넘을 없는 나이라는 장벽이 있듯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는 제도와 환경 그리고 사회적 인식이 만들어내는 장벽 앞에서 경쟁이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 하다. 비정규직 개인의 능력보다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이 경쟁이나 발전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경쟁해야 발전한다는 소리는 전혀 논리적으로도 말이 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이런 논리는 5% 괴물들이 좋아하는 소리다. 노동의 유연화를 외치는 인간들이 좋아하는 소리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경쟁이 아니다. 그런 경쟁을 통한 발전이 아니다. 결국에 그들이 원하는 노동의 유연화라는 것은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를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정규직에 있다고 안심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도 어느 순간엔가 비정규직으로 전락할 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중산층의 몰락도 줄어드는 정규직과 늘어나는 비정규직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일본에서 하류사회라는 말이 주목받은 것을 보더라도, 우리나라도 앞으로는 하류 사회로 진입할 밖에 없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상황을 로마시대에 비유하자면, 정규직은 로마시대의 시민이요, 비정규직은 검투사들이다. 5% 상위층에 있는 인간들이 귀족이라고 불리는 집단들이다. 검투사들은 5% 유희와 쾌락을 위해서 콜로세움에서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움을 벌인다. 시민들도 관객석에 앉아서 그런 유희를 즐긴다. 마치 자신들도 그런 귀족이 된것 처럼 착각하면서. 비정규직의 터지는 경쟁을 즐기는 것이다. 정규직들이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에 대해서 침묵하고 오히려 박해하는 상황을 콜로세움의 관객석에 않아서 보여주는 시민들의 광기와 비교해서 생각해보라. 얼마나 닮았는지. 시민들은 처음부터 검투사들을 자신과 같은 계급으로 보지 않는다. 시민들은 검투사들을 같은 인간으로 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비정규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규직의 인식과 행태는 로마의 시민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런데 검투사들의 숫자가 무한하지 않다. 목숨을 대결에서 패한 이들은 이상 검투사 노릇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새로운 검투사가 필요하게 된다. 로마시대에는 정복전쟁을 통해서 획득한 노예들이 검투사로 지속적으로 유입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 전쟁과 정복을 통한 검투사 공급은 쉽지 않다. 현실적으로 가지의 방법이 가능한데, 하나는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것과 시민들을 계급에서 탈락시켜서 검투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현실적으로 단일민족이라는 이상한 믿음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많다. 그래서 노동시장을 개방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반면 신자유주의 사상을 물든 시민들에게 경쟁을 통한 발전이라는 주기도문만 열심히 강조하면, 시민사회에서 가장 하층에 있는 시민들을 검투사로 쉽게 만들 수가 있다. 노동의 유연화라는 것은 시민들 중에서 쉽게 검투사를 만드는 길을 만들어 놓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자신이 시민 계급에 있다고 해서 검투사가 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계급에서 이탈해서 검투사가 있게 변한다.

 

 시민의 검투사화가 가능한 사회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퇴행하는 것이다. 콜로세움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죽어가는 검투사들을 대신해서 점점 많은 시민들이 검투사로 변해감으로써 시민계층의 두께는 점점 얇아질 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일본에서 말하는 하류 사회, 90% 하류(검투사) 되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귀족들은 그것에 대해서 상관하지 않는다. 아무리 시민들이 줄어들고 검투사가 늘어난다고 해서 귀족들의 부와 권력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한가지 위험적 요소가 있다면, 혁명의 가능성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귀족들이 장악한 언론과 미디어의 강력한 힘에 세뇌되어서 그런 혁명의 가능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순과 현상은 사회 구조와 제도의 모순임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미디어는 책임을 개인의 무능으로 돌려버리기 때문에 검투사들은 스스로만을 탓할 뿐이다.

 

 경쟁사회에 비정규직이라는 것은 경쟁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이 아니다. 검투사들이 귀족들의 노리개이자 유희의 도구였듯, 비정규직은 5% 특권층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희생양이자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정규직을 위해 만들어진 탄탄한 보호 장치들 때문에 착취하지 못했던 것을 비정규직을 통해서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경쟁한다는 것도 말이 되는 이야기이지만, 발전이라는 것은 더욱더 말이 되는 소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