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29일 토요일

"특목고 교사의 학생 폭행사건" 기사의 리플을 보고......


 네이트 온 메신저 하단에 뉴스기사 제목이 하나씩 올라온다. 가끔 클릭해서 그 기사를 보게 되는데, "특목고 교사가 명문대 합격 제자 폭행"이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교사가 학생을 폭행해왔던 것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니라, 그렇게 관심을 끄는 기사는 아니였지만, "특목고, 명문대 합격 제자"라는 선정적인 기사 제목에 혹해서 클릭하게 된다. 교사의 제자 폭행이라는 사건에 특목고나 명문대 합격 제자라는 것은 아주 쓰잘데기 없는 사실의 나열이지만, 한국과 같은 학벌사회, 학벌에 경배하는 개한민국적 상황에 얼마나 적합한 기사의 제목인가? 문제의 본질보다 학벌을 강조하고 그 폭행이 일어난 곳이 소위 말하는 개한민국의 최상위 개층들의 집합소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그 기사를 보면서 씁쓸하기만 하다.

 

 그런데, 그 기사보다 가관인 것이 눈에 들어온다. 리플 쓰는 사람들 중에 인간 말종이 많다는 것을 알기에 별로 읽고 싶은 생각을 잘 안하는 편인데, 소위 베스트 리플이라는 것들을 보면서 개한민국의 국민들은 점점 광견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에 참담함을 금할 수가 없다. 돈에 눈이 멀어서 자신들의 욕망을 투영한 부조리한 인간을 선거를 통해서 뽑을 때도 알아봤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개한민국은 광견들의 나라가 되어가는 듯 하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익명성 때문에 아무리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한다고해도 거기에 동조해서 베플에 추천하는 인간들조차 광견이니 말이다.

 

 리플을 보고 하도 열받아서 캡쳐를 해버렸다.  (기사와 리플 출처 링크 )



 이 리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사를 한번 볼 필요가 있다. 수업시간에 늦은 학생과 교사가 실랑이를 벌이다. 폭행사건이 발생했는데 학생은 뼈가 부러졌고 전치 12주의 상처를 입었다는 내용이다. 당사자인 교사와 학생의 인터뷰와 목격자인 학생의 인터뷰가 같이 실려있다. 피해학생과 목격 학생의 진술에 의하면 폭행을 당한 것이 명백하고, 가해자 선생의 진술에 의하면 학생에게 맞아서 돌발적으로 뺨을 때렸고 그로 인해 넘어져서 다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 학생이 선생의 뺨을 때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명확한 진술이나 증인언이 나오지 않는다. 단지 선생 일방의 주장일 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기정사실화 해버렸다. 뭐가 사실인지도 불명확한 상황에서 판단하고 편들기를 시작해서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맨위에 리플을 보면 사적복수와 폭력을 금지하는 대한민국의 법체계를 완전히 무시하는 광견적 사고를 보이고 있다. 한화 김승연회장이 폭력배를 동원해서 사적 폭력과 복수를 한 사건이 법의 처벌을 받은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인 것을 본다면, 개한민국 국민들의 의식수준은 김승연보다 더 찌질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만약에 학생이 잘못을 했다고 치더라도 선생이라는 자리에 맞는 처리방법과 절차가 있음에도 사적 폭력을 가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 우선되어지, 사적 폭력을 옹호하고 있다. 교사란 지식만을 습득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전반에 필요한 소양까지 갖춰야지만 되는 것인데, 교사의 부족한 소양과 폭력은 무시하면서 원래부터 부족한 청소년, 학생을 마치 교사보다 더 소양적인 인간인양 착각해서 매도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두번째 리플은 양비론을 펴는 듯 하지만, 결국에 부족하고 모자란 행동을 한 학생을 비난하고 있다. 학생이란 불완전한 존재고 그래서 자라고 배우고 있는 과정에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그런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기 보다는 학생이란 절대적 권위에 복종해야 되는 노예나 사육품으로 취급해서 선생의 권위에 도전한 것은 대단한 죄악이고, 그것을 학생의 시각에서 진술된 것이 문제라고 말하는데. 목격자가 학생인데 어른의 시각이 들러갈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고, 피해자가 학생인데 어른들의 시각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부터 그 광견에게 묻고 싶다. 결국은 학생이란 자신과 같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고 자신보다 하류에 있는 모자란 불량품으로 취급해서 그들 학생들의 관점이나 시각자체부터가 대단한 문제인것 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마치 멀쩡한 사람인것 처럼 마무리하는데, 학생을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이나 문제의 핵심은 과도한 폭력을 당한 학생이라는 것을 완전히 왜곡해서 해석해버리는 자신이 광견이라는 것은 왜 모르는지 모르겠다.

 

 세번째 리플, 정말 상대할 가치가 없다. 일제와 매국노들이 주입시켜 놓은 "조센징은 맞아야 말 잘듣는다."는 인식 수준 그 이하다. 사건의 과정에 대해서 한 일방의 진술을 가지고 함부로 일반화하는 것도 찌질하기 그지 없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전치 12주가 나올정도로 맞아야 할 상황이란 말인가? 과연 저 광견은 얼마나 도적적이고 제대로 된 인간인지 궁금하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댓글 3개가 베스트 댓글이라는 이름으로 맨 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게 개한민국의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분노하고 참담하기 그지 없다. 돈벌레와 돼지들이 많다는 것은 알았어도 합리적 사고마저 포기하는 광견과 좀비들의 생각이 인기있는 댓글이 되고 당연하다듯이 말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2008년 11월 19일 수요일

감성이 담긴 휴대폰 백서..... 책 "모바일 오디세이"를 읽고.


 개인적으로 전화라는 기계를 무척 싫어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어렸을 때는 수화기 저편에 들려오는 낯선 사람과의 대화는 정말 고역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이야 조금씩 변했지만,) 다른 가족들이 있으면 내가 아무리 전화기에 가까워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전화를 때도 잘못 거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웬만해선 전화도 걸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친구들은 우리 집으로 전화를 해서, 나의 가족 중에 누군가를 거친 다음에야 나랑 통화를 있었다. 

 

 집전화라는 것이 가족 공동체의 통신수단이었다면, 휴대전화는 지극히 개인적인 통신도구이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휴대전화에 대한 거부감은 집전화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작다. 그렇다고 통신기기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손에 휴대폰을 가지게 시기도 남들보다 늦은 편일 뿐만 아니라, 매일 날아오는 스팸 문자와 광고전화를 제외하면 휴대폰은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소위 캔디폰이다. 주인을 잘못 만나서 주기능인 통신수단은 뒤로 알람과 시계의 역할이 주기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휴대폰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충분히 휴대전화를 버려도 정도의 생활패턴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휴대폰을 언제나 손에 쥐고 다니는 이유는 뭘까? 사실 전화라는 것은 거는 사람 쪽에서 용건이 있기 때문에 통화가 되지 않으면 답답한 쪽은 전화를 사람인데도, 휴대전화를 두고 외출한 날이면 답답하고 허전한 이유는 뭘까? 습관처럼 들고 다니는 휴대전화가 어느 새인가 나의 일부가 되어 버린 상황은 조차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휴대전화를 버리는 순간 아마도 세상과 소통하는 마지막 수단마저 버린, 은둔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망상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 휴대전화의 기능 , 내가 유일하게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가장 좋아하는 문자 기능, 그것은 휴대전화를 쉽게 버리지 못하게 만든다. 수줍어 하고 무뚝뚝해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문자는 어떤 때는 진지하게, 어떤 때는 장난 삼아, 하지만, 말보다는 쉽게 소통의 세계로 나가게 만든다. 한가지 단점이 있다면 무뚝뚝함이 상대를 가린다는 정도. 친한 친구들에게는 " 사냐?"라는 문자를 보내거나 받으면, 응답이나 친구들의 응답은 "그래" 또는 "잘산다." 끝나버리는 냉정함이 넘쳐나고, 성별이 다른 사람에게는 장난스러운 문장으로 표현함을 물론이고 내용 또한 길다. 뿐이 아니라 문장의 마지막에는 "^^" "^^;" 같은 이모티콘은 빠지지 않는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문자기능은 어느 순간엔가 음성통신을 넘어서 친숙한 소통의 수단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문자를 받으면 답장이 문자로 오느냐 음성통화로 오느냐에 따라서 신세대와 구세대를 구분하는 척도라고 하니 만큼 젊은 사람들에게 문자는 가장 기본적인 소통의 수단이 것이다. 이렇듯 집전화를 넘어서 휴대전화. 음성통화를 넘어서 문자 그리고 영상통화까지. 기술의 발달은 소통수단의 다변화까지 많은 변화를 야기했다. 소통 수단의 선호까지 세대별로 차이를 만들었음을 물론이고 수단의 차이가 소통의 단절까지도 야기하는 복잡한 형태의 세상이 것이다.

 

 그렇게 전화와 휴대폰으로 인해 변화한 세상과 변화할 세상에 대해서 정리한 책은 무미건조할 있는 기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속에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캔디폰을 들고서 만지작 거리는 나에게 책은 하나의 문화 또는 생활의 필수도구로 자리잡은 휴대전화는 단지 소통의 도구를 넘어서 감성의 도구로 자리잡고 있음 보여준다. 휴대전화의 이용패턴이 너무나 초라해질 정도로(원래 초라했지만). 그래서 책을 덮으면서 생각난 친구들에게 문자를 날려본다. "잘사냐?"

 

모바일 오디세이 (본책 + 다이어리) - 8점
정여울 지음/라이온북스

책 "대중의 미망과 광기"를 읽고........


 

 파울로 코엘로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정신병원을 주무대로 하고 있다. 이것은 작가 자신의 병력을 투영한 듯한데, 작가는 속에 작은 우화를 통해서 정신병에 대해서 색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우화는 어떤 왕국에서 왕과 왕비만 정상이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비정상인 상황에서 결국에 왕과 왕비도 비정상적으로 행동할 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준다. 그를 통해서 다수의 비정상적인 사람이 명의 정상적인 사람을 '미치게' 만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의 정신병력은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정상인이 겪을 밖에 없는 것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듯했다. 작가의 이런 항변은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불안정성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대중이라는 무리가 만들어내는 광기의 무서움이랄까?

 

 하지만, 최근에는 집단지성 or 대중지성이라는 것으로 새로운 흐름이 나오고 있다. Web 2.0 만들어낸 공개, 공유, 참여라는 것을 통해서 다양한 생각들이 모이면서 획기적인 발견이나 발전의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많은 인터넷 관련 회사들은 최근에 자사의 API 소스코드를 개방 또는 공개함으로써 네티즌들이 보다 창조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IT관련 분야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이야기 되는 것이 리눅스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비록 집단지성이라는 개념이 IT관련분야 특히 관련 분야에서 많은 지목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학적으로도 간접 민주주의를 넘어 직접민주주의로의 가능성을 보여줄 정도다.

 

 대중의 가지 특성, 광기와 지성은 언제 어디서 발현 할지 수가 없다. 하지만, 집단지성보다는 대중의 광기가 쉽게 인식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주 출현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기억하는 만으로도 황우석 사태를 비롯해서, 최진실의 자살로인 인한 증권녀에 대한 마녀사냥, 그리고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가 촉발한 세계적인 금융위기 등등. 일부러 역사책을 찾지 않아도 광기의 모습은 얼마 전에도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인 사건들이다.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인간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반성은 하지 않고 비슷한 일의 계속 반복하는 것이 과연 인간다운 것인지 의문이 든다. 개인적으로 잘못을 반성하고 고쳐나가는 것이 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런 쓰잘데기 없는 자존심이라는 것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은 반성하려 하기 보다는 망각에 힘을 쓴다.

 

 그에 반해서 특히 사회적 관점에서 집단지성이 광기보다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의 보수적 성향에서 찾을 있을 것이다. 아무리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고수하려는 성향은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적이거나 혁신적인 집단지성은 변화를 싫어하거나 기득권을 잃기 싫어하는 집단에 의해서 광기로 매도되어 버린다. 집단지성은 강하게 분출되었다가도 그런 저항에 막혀서 힘을 크게 발휘하지 못한다. 결국에 집단지성은 발현은 창대할지 모르지만, 정착은 시나브로 이루어 밖에 없다. 조금씩 보수적인 사람들이 집단지성의 편으로 흡수되면서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가 진보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혁명과 같은 일보다는 서서히 진보하는 이유도 때문이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는 대중의 광기와 집단지성의 출현은 빠르고 일상화 밖에 없다. 아날로그와는 달리 디지털이라는 것은 복제와 전송이 너무나 쉽다. 그래서 정보의 전파력은 상상을 초월해서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뿐만 아니라 정보의 수정이 너무나 쉬워서 잘못된 정보의 재생산 또한 너무나 쉬운 실정이다. 그런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것은 대중의 광기이다. 집단지성은 파괴적이기보다는 생산적이고 반면에 광기는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마녀사냥과 같이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재단할 없는 사회이기는 하지만, 피해자에게 심각한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를 가하고, 최악의 경우 피해자를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그래서 광기가 출현했던 역사의 현장은 우리에게 좋은 반성의 도구이고 학습의 도구가 있다. 책을 통해 현재의 금융위기와 대중의 광기로 일어난 투기에 대한 기록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광기는 시대가 변해도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탐욕이라는 것이 만들어내는 광기의 현장은 시간의 차이일 언제나 계속 반복되는 것을 보여준다. 마녀사냥은 인터넷과 언론의 여론몰이로 피해 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수가 있다. 그래서 책은 "역사는 반복된다. 그래서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것을 보여준다. 실러가 말한 "사람은 혼자 있을 분별력 있고 이성적이다. 그러나 군중 속에 있으면 멍청이가 된다."라는 말을 실천하면서, 이성적으로 생각할 있는 통찰력을 전해줄 것이다.



대중의 미망과 광기 - 10점
찰스 맥케이 지음, 이윤섭 옮김/창해

2008년 11월 7일 금요일

올바른 역사 교육관은?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권력의 힘을 빌어 역사교과서를 고치려고 한다. , 우라는 것의 잣대는 지극히 주관적이라서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달라질 밖에 없는 것을 가지고, 자신들의 잣대가 아주 객관적인 잣대인양 역사교과서 집필진과 출판사를 압박한다. 그들이 좌편향이라고 지적하는 것들은 문맥 상으로 보면 그렇게 문제 것이 없어 보이는 것들인데, 문장의 표현을 꼬투리 잡아서 좌편향이라고 한다. 뿐이랴. 그런 지적이 잘못된 것이라고 집필진과 관련 종사자들이 지적하면, 그들은 북한을 찬양하는 교과서고 한국의 정통성을 말살하는 교과서라고 선동질 한다. 그런 선동질 뒤에 반드시 따라 나와야하는 근거를 제대로 밝히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런 상황인데도 우매한 많은 국민들은 그것을 그대로 믿어버린다. 좌파, 북한, 빨갱이라는 단어들이면 역사교과서와 집필진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가치와 정체성을 저해하는 사악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들은 사악한 존재로부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구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제국주의 망령을 되살리려는 일본의 극우세력 괘를 같이 한다. 일본의 극우세력은 소위 자학사관을 벗어나, 번영했던 일본의 역사를 통해서 긍지와 자긍심을 만들자고 하는데, 지금의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와 하등의 차이가 없다. 국가의 정체성과 자긍심 그리고 애국심을 심어줘야 한다 논리와 표현만 다를 , 본질은 변화가 없다. 일본 극우와 그들이 괘를 같이 하는 이유는 그들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세력들이 나라를 팔아먹었던 매국 친일의 후손들(mbc 뉴스 후에서 "부활하는 친일" 참고)이다. 결국에 한국의 극우 세력 소위 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치장한 세력들은 같은 배에서 태어나 외모만 다른 이란성 쌍둥이일 뿐인 것이다.

 

 그렇게 청산되지 못한 친일 세력들은 여전히 암적 존재로 남아서 우리 사회의 내부분열을 일으킴은 물론이고 그들의 논리를 사회전체에 퍼트리기 위한 교묘한 술수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그것의 시작이 역사 교과서의 수정이라는 이름인 것이다. 하지만 방법이 얼마나 졸렬한지 일본의 극우세력보다 못한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계례 신문은 사설 "일본 극우세력보다 못한 정권의 교육관"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행태를 비판을 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극우 세력들은 역사를 왜곡하는 교과서를 만들지언정 권력을 등에 없고 함부로 정부가 나서서 검인정 체제를 무력화시키는 짓을 하지 않는데 2mb 정권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교육관이라는 것이 과거의 독재시대의 그리고 이전에 교육관, 국가의 명령을 따르는 시민을 생산하는 것이다.(개인적으로 그런 교육관을 사육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일방적인 정보의 주입을 강요하고, 암기 시켰다. 비판적 사고력을 키우는 교육보다는 얼마나 지금 국가를 이루고 있는 시스템에 순응하고 적응하냐는 것이 핵심 목표였고 최대 가치였던 것이다. 그래서 교육이라는 것은 세뇌와 순응을 위한 수단이자 도구였던 것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가지고 역사라고 우기기도 하고, 진정 가르쳐야 것들을 빼버린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고 유지해야 질서에 해악이 되는 것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의 그런 편협함 교육관은 같은 시대의 아픔에 대해서 감싸거나 치유해주지 않고, 오히려 상처를 주는 행위로 다시 돌아왔다. 독립운동 단체라는 집단이 과연 독립운동 단체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독립공원 내에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소위 위안부 박물관)" 건립에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박물관이 독립공원 내에 들어서면 "우리민족은 적극적인 항일투쟁보다 일제에 의해 수난만 당한 민족"이라는 왜곡된 역사인식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자긍심, 애국심을 주창하며 역사 왜곡과 편집을 일삼는 논리나 행태는 일본의 극우나 한국의 우파나 독립운동 단체나 똑같다. 이것을 보고 독립운동 단체에 속한 이들의 선조들이 지하에서 땅을 치며 분노하지 않을까?

 

 이렇게 잘못 만들어진 역사관과 가치관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박노자와 하워드 진을 통해서 우리의 교육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있다. 박노자는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에서부터 신화가 되어버린 인물의 어두운 면까지 과감 없이 이야기를 한다. 역사의 음과 양을 모두 알아야 비판정신은 물론이고 역사를 바르게 인식할 있다는 것이다. 하워드 진도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현재의 역사 교육관을 비판한다. 현재의 학교라는 곳이 "생각 없이 외우기만 잘하는, 비판적인 사고를 포기한, 자신을 틀에 맞추는……. 신성한 체제 연장에 필요한 이념적 특성을 주입하기 위해 알려준 외에는 아무것도 해서는 되는 것으로 아는 이른바 착한 학생들에게 상을 주도록 설계된 학교를 만든다."라고 말한다. 그로 인해서 "승자의 역사교육은 어쩔 없이 역사에 대한 망각 증세를 유발하는 엄청난 규모의 거짓 교육에 의존할 밖에 없다."라는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내가 받아 왔던 역사 교육, "이준 열사의 할복" 대한 신화 같은 것들이 거짓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 다시 알게 뿐만 아니라, 과장된 신화들이 넘쳐난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알아 있게 것이다. 과거의 잘못된 정보와 지식에 대해서 지금에야 정확한 사실과 대면했을 때의 혼란은 나라는 자아의 정체성 마저 흔들었다. 처음에는 사실을 거짓이라고 부인하며 과거에 받아들인 것들을 사실이라고 스스로 세뇌하며, 사실을 알려준 저자나 책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결국에 불변인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상황이 반복된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사육 당하고 있다는 분노까지…...

 

 과연 역사를 통해서 애국심, 정체성, 자긍심이라는 것이 강요할 있을까? 그것은 불변의 진리와 다시 직면했을 그냥 사라져 버리는 구름일 뿐이다. 기계적으로 세뇌되어지고 받아들여진 것들은 결국에 이런 지금과 같은 역사적 갈등을 만들어 뿐이다. 실체라는 것이 거짓이고 위선이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의 무너져 버리는 신뢰의 붕괴는 화를 가져올 것이고, 대결의 양상은 크게 번질 뿐이다. 많은 전쟁과 인종 갈등, 그리고 계급갈등은 그런 잘못된 역사의 교육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2008년 11월 3일 월요일

회의주의자 되기......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를 통해서 언제 어디서나 원하기만 하면 많은 정보를 쉽게 얻을 있다.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서 수질, 수온 그리고 사는 물고기들의 종류가 다른 것처럼, 인터넷이라는 공간의 정보도 질과 양은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들은 중요한 정보를 찾기가 쉽지 않은데 비해서, 쓸데 없는 정보들이 너무 넘쳐난다고 인터넷을 쓰레기의 바다라고도 말한다. 자연의 바다는 자신이 어느 정도의 자연 정화능력이 있어서, 자신의 한계치를 넘지 않는 범위에 한해서 스스로 정화를 한다.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자연정화의 기능은 없다. 디지털의 특징이라고 있는 복제와 전송의 편리함이 그런 자연정화를 어렵게 만든다. 

 

 인터넷 세상에서는 사실이라고 믿었던 정보는 어느 순간엔 거짓이고, 거짓이라고 믿었던 정보는 실제로는 진실이다. 사실을 가장한 거짓된 정보들은 많은 이들을 기만하고, 진실된 정보는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해서 심연 끝에 머무르기도 한다. 그래서 인터넷의 정보를 모두 신뢰해서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맹신한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간의 특성 때문인지 몰라도.

 

 혈액형으로 사람의 성격을 구분하는 것이 비과학적인, 미신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여전히 혈액형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구분 짓고 있으며. 과학과 종교를 구분하지 못해서 종교에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종교를 마치 과학처럼 포장해 버림을 물론이고, 기존의 과학적 가설이 거짓이라고 거짓말을 일삼는다. 뿐만 아니라 "아니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속담에 대한 맹신으로 연예인들의 신변잡기에 관한 루머와 소문들은 어느 순간엔가 진실되어 버린다. 당사자들이 아무리 부인을 해도 그만이다.

 

 노벨상 수상자 버트런드 러셀은 "인간사 바깥에 놓여 있는 것들은 진실이 아니라 사실이다. 진실이란 믿음의 속성을 띠며, 믿음은 심리적 사건이다."이라고 했다. 우리는 사실보다는 믿음을 바탕에 진실을 맹신한다. 믿음의 바탕이 되는 것은 권위 있는 사람의 이름 값일 수도 있고, 매일 신문에서 접하는 기자라는 직함일 있다. 이런 믿음의 바탕이 만들어낸 진실은 믿음의 붕괴로 거짓이 있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하물며 인터넷이라는 곳은 이런 믿음의 체계가 부실한데도, 인터넷이라는 자체가 믿음의 바탕이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가 주입식 교육을 받음으로써 정보 습득은 했지만, 정확한 판단을 내릴 있는 습관을 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권위와 말에 대한 믿음이, 실존하는 사실의 정확한 판단을 가로막게 만든 것이다. 정보의 습득에는 능숙하나 비판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세상에 사실보다는 믿음에 기댄 거짓된 정보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열광하고 습득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서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진다고 해도, 믿음은 이미 뇌리에 박혀버린 상태다. 결국에 우리는 사실보다는 믿음을 신뢰하며 계속 나이를 먹어간다.

 

 이런 상황 속에서 거짓의 생명력은 점점 길어진다.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이미 진실로 믿어버린 것에 대한 신뢰는 지속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믿고 있는 믿음이 붕괴되었을 때의 좌절감을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인간의 고집 때문이다. 그래서 잘못된 종교적 진리나 믿음을 비롯해서 미신에 대한 믿음은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서 사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지속될 뿐이다. 오히려 사실보다는 믿음을 강요하는 거짓된 행위들로 표출되기도 한다.

 

 우리가 믿어야 것은 사실이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회의주의자들은 믿음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사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세이건은 회의주의에 대해서 "상충하는 가지 욕구 사이에 절묘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앞에 차려진 모든 가설들을 지극히 회의적으로 면밀히 검토하는 것과 아울러, 새로운 생각에도 크게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회의에만 머문다면, 여러분은 어떤 새로운 생각도 보듬지 못하게 됩니다.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세상을 비상식이 지배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괴팍한 노인네가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귀가 가볍다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마음을 열면, 그리고 회의적인 감각을 터럭만큼도 갖추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가치 있는 생각과 가치 없는 생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모든 생각들이 똑같이 타당하다면 여러분은 길을 잃고 것입니다. 결국 어떤 생각도 타당성을 갖지 못할 것이기에 말입니다."라고 했다. 머리 아프고 철학적인 듯한 정의로 회의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며, 또한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그에 반해서 러셀은 보다 간단하게 회의주의를 요약해서 말한다. "첫째,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문제의 경우, 비전문가는 그에 반하는 의견은 의심해야 한다. 둘째, 전문가들이 동의하지 않는 문제의 경우, 그에 대한 어떤 의견도 비전문가는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된다. 셋째, 전문가들이 받아들일 만큼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의견이라면, 비전문가는 그에 대해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 현명하다." 라고. 그러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에의 의지가 아니라 정반대인 '진실 규명의 욕구'이다."라고 말한다.

 

 인터넷이라 세상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계속해서 인터넷을 쓰레기의 바다로 만들 것이고,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우리를 권위에만 의지하고 기대하는 해바라기로만 만들 뿐이다. 결국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의주의적 태도이며, 사실에 대한 추구만이 정보에 대한 신뢰를 쌓아나가는 방향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