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27일 화요일

"위대한 리더처럼 말하라"를 읽고......

위대한 리더처럼 말하라 - 8점
전미옥 지음/갈매나무


 
제목에는 "말하라"라고 되어 있지만, 책은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책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필요하다. 잘못된 마디가 상대방에게 되돌릴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잘못된 줄의 글이 의도와는 다른 뜻을 상대방에게 전달되어,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더욱이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우리가 선택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많아지면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상대방과 소통을 것인가 고민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을 군중 속에 고독을 느끼는 존재로 묘사될 만큼, 커뮤니케이션의 단절현상 또한 존재한다. 이런 단절현상은 점점 개인중심화 되어가는 경향이 강해서 일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치열한 경쟁만을 강요 받은 우리가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을 잊어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고민과 문제해결을 위해서 리더라고 불리던 인물들은 어떤 식으로 타인과 소통하는지를 보여주며 도움을 주는 책이, 책이다.


 책은 심플, 스토리, 유머, 개성, 균형, 공감, 경청, 칭찬, 따뜻함, 카리스마라는 10개의 주제로 소통의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담으려고 해서 그런지 조금인 일관성이 부족한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속에 등장하는 리더들 중에 생소한 인물도 있지만, 친숙하고 관심을 가졌던 인물의 이야기가 많아서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있다는 것이 책의 가장 장점인 같기도 하다.


 다양한 인물들의 저마다 특징적인 커뮤니케이션의 기술들을 전부 각자의 것으로 소화할 있다면 좋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특성과 성향에 맞는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오프라 윈프리 같이 포근하고 친근감 있는 외모가 아니라, 첫인상이 험악한 사람이 포옹하기 위해서 다가선다면 누구나 한번 쯤은 흠칫하며 주저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인 처럼. 소통의 도구를 선택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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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24일 토요일

'베오울프' 노무현, '그렌델' 이회창 그리고…. 괴물 드래곤'이명박'

 

 괴물이 괴물을 만들어낸다. 괴물의 원천은 욕망이다. 욕망은 돈과 권력, 그리고 욕정이다. 정의라는 단어는 그런 욕망의 유혹 앞에서 너무나 쉽게 좌절한다.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기에 불완전한 생명체 인간이기에 욕망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하고 매력적이다. 하지만, 욕망에 굴복해 욕망의 괴물이 되고 , 욕망의 괴물은 다른 욕망을 쫓는 불나방들을 끌어들인다. 불나방들은 괴물만 꺽으면 자신들이 마치 영웅이 처럼 생각하지만, 그들 또한 욕망의 유혹에 넘어간 욕망을 탐하는 작은 괴물들일 뿐이다. 작은 괴물은 욕망의 괴물을 넘지는 못한다. 오히려 욕망의 괴물이 세상의 악을 물리치는 영웅이 되어 버린다. 욕망의 괴물은 모든 것을 가졌기에 자신의 권력과 돈을 관대한 처럼, 자상한 처럼, 베푸는 처럼 보이도록 무지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은 괴물을 왕으로 영웅으로 모시지만, 괴물은 그저 백성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존재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욕망의 괴물은 강력한 욕망의 괴물을 만들어 낸다. 자신의 욕망이 그대로 투영되어 강력해진 욕망의 괴물을……. 자신의 적자인 괴물이 부활하고 활개치면서 그의 가련하고 무지하고 어리석고 없는 불쌍한 백성들은 고통을 받으며, 죽기도 한다. 괴물의 정체를 모르는 무지의 백성들은 다시 그들의 왕이나 다른 용사가 영웅이 되기를 구세주가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괴물을 처치하기 위해서 나타난 왕과 용사는 욕망에 굴복한 다른 괴물일 뿐이다. 거절할 없는 치명적인 유혹에 무릎 꿇을 밖에 없는 하찮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찮은 인간을 만들어 또한 권력과 돈과 공포 앞에서 무조건 머리 숙여 영웅이 나타나기만을 바라는 어리석은 백성들이기도 하다.

 

 "베오울프" 영웅이 것은 자신이 만들어 하나의 괴물을 자신이 없앴기 때문이다. 선왕 "호르트가르" 돈과 권력 그리고 욕정에 취해서 무기력하고 나태해져 자신이 만들어낸 괴물을 "베오울프" 처단하도록 했지만, "베오울프" 자신이 만들어 괴물 앞에 죽어가고 고통 받는 백성을 외면하지 않고, 직접 싸웠던 것이다. 당장의 앞의 공포에 두려워하는 나약한 백성들은 그가 이겼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진정한 괴물 욕망은 어느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욕망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괴물이 나타나면 괴물을 없애줄 영웅만을 기다릴 뿐이다. 기존의 영웅은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의 입과 입으로 전해며 잊혀져 , 새로운 영웅을 기다리고 찬양한다. 이런 순환의 고리는 어리석고 욕망에 약한, 불완전한 인간이 존재하는 계속 반복된다. 이런 순환의 역사는 영웅과 괴물을 구분하지 못하고 공포와 권력 앞에서 나약한 우둔한 백성들이 존재하는 계속 반복된다.

 

 우리는 지난 대선으로 노무현을 "베오울프" 만들어 냈다. 부패하고 권위적이며 기득권의 이회창이라는 괴물 "그렌델" 물리친 "베오울프"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베오울프" 나라의 최고권력을 얻었다. 어리석은 백성은 그가 휘두르는 칼이 부패하고 썩어빠진 곳을 시원하게 드러내기를 바랬다. 그리고 치열한 전투로 혼란한 민심을 하나로 묶어 두기를 바랬다. 하지만 "베오울프" 역시 욕망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유혹에 타협하며 처음 칼을 들었을 때의 이상과 정의감은 희미해졌다. 전투에 패했던 괴물들이 최후의 발악을 했던 탄핵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넘으며 "베오울프" 그의 신하들은 의회의 힘까지 장악했지만, 그들의 이상과 정의감은 공허한 메아리였을 뿐이다. 정의감에 넘쳐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권력은 그들이 막상 권력을 얻게 되면서, 그들은 욕망의 권력에 취해버렸다.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은 그저 명분일 뿐이다. 말로 백성을 현혹시키기 위한 술수일 뿐이다. 그들은 그저 권력에 취해있고 싶어서, 그들은 그저 우월감을 있는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서 뿐이다. 실현되지 않는 명분과 말뿐인 공허한 명분으로 백성들은 힘들다. 영화 "베오울프" "그렌델" 팔을 잘라 괴물을 죽음으로 몰고갔지만, 현실의 베오울프는 "그렌델" 이회창을 죽이지도 못하고 잠시 잠들게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욕망의 괴물이 되어 버림으로써 "그렌델"에게 부활의 힘을 제공했다. 그리고 자신이 투영되고 자신의 잘못된 욕망은 새로운 욕망의 괴물의 씨앗이 되어버린다. 영화 괴물 드레곤은 베오울프가 씨앗이요 자양분이 되어 만들어내지만, 현실 최대의 괴물 이명박은 정신마저 썩어가는 우둔하고 어리석은 백성이 자양분이 되어 버렸다. 비리가 넘쳐나는 최악의 괴물이 돈이라는 것에 눈이 멀어버린 우리의 욕망을 자양분 삼아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백성을 우리를 이끌 적당한 인물이 없는 현실 속에서 어쩔 없는 선택을 강요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괴물들을 키워온 것은 우리들이요, 제대로 인물을 키워오지도, 찾아보지도 못한 것이 우리들이다. 명백한 법적인 범죄보다, 실망과 배신감의 상처를 크게 생각하는 어리석은 우리들. 범죄와 신의라는 단어에서 객관화해야 문제를 객관화해서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개인적 심적인 감정으로만 우리는 신의를 저버린 , 죄를 최악의 죄로 단정해 버린다. 그런 주관화의 치명적인 실수는, 개인적 감정을 객관화한 치명적인 실수는 괴물의 탄생을 만들어 뿐이다. 그저 괴물의 권력에 돈에 머리를 숙이며 , 들은 하려는 노예근성 앞에서 영웅은 리더는 결코 탄생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괴물의 앞에서 지배당할 뿐이다. 역사의 악순환은 영원히 계속될 뿐이다. 이런 악순환을 끊어 버리는 것은 영웅도 위대한 용사가 아니라 국민과 백성이고, 이어야 한다. 욕망의 괴물들이 이상 번성하지 않게, 욕망의 불나방들이 이상 번성하지 않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몫이요, 백성들의 몫이다.

 

 "베오울프" 같은 영웅의 탄생을 기다리는가? "베오울프" 죽어서 영웅이었는지는 몰라도 살아서는 자신의 욕망을 위한 하나의 괴물이 였다. 남의 부인을 탐하고, 나중에 조강지처를 버리고 젊은 여자에 빠진 색의 욕망에 물든 괴물. 그리고 자신은 드레곤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무지하고 순진한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았던 괴물이 였다. 영웅은 없다. 단지 영웅의 탈을 인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인간이 괴물이 되는 것도 순간이요. 찰나의 순간이다. 영웅이란 나약하고 무기력한 다수 인간들의 비겁함과 노예근성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세상을 바꿀 있다는 의지, 두려움에 굴하지 않는 용기, 잘못을 잘못이라 당당하게 말할 있는 진실한 마음이 있다면 그대와 내가 바로 세상의 영웅이고 주인이다. 언제까지 누가 나서서 세상을 바꾸어 주기를, 언제까지 누가 나서서 살게 해주기만을 바랄 것인가? 그것도 인간이 아닌 괴물을 통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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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7일 토요일

카메라를 들고 싶게 만드는 거장의 유혹 "영혼의 시선"

영혼의 시선 - 10점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지음, 권오룡 옮김/열화당

 

 일요일 저녁, 저녁식사를 하면서 TV 봤다. "경제야 놀자"라는 코너에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관한 얘기가 나온다. 순간 나는 " 내가 최근에 책의 저자네"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책을 선택한 것은 내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알아서도 사진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서도 아니다. 이웃 블로거 고난님의 추천으로 보게 책이다. 그래서 그가 위대한 사진작가라는 정도 밖에 몰랐다. 어떤 사진을 남겨 왔으며 어떤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모른다. TV 보면서 "결정적 순간" 사진작가로 불리며, 순간의 장면을 포착해 내는데 뛰어난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진을 찍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사진에 찍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저기 군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편이지만, 사진 찍히는 것보다 찍는 편을 선호한다. 옛날 카메라가 처음 나왔을 카메라가 사람의 영혼의 빼앗아 간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진에 찍힌 사람들이 카메라를 부셔버리는 일도 있었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저런 미신에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카메라의 렌즈가 나를 향하면 어색하고 불안하다. 그리고 렌즈 통해 투영된 나의 다른 모습이 사진에 나타나면, 나는 나를 외면한다. 나는 속의 내가 너무 낯설다. 어쩌면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에 속에 나가 너무 낯설어서 외면하는지도 모른다. 카메라가 영혼을 가져가 사진이 비춰주는 것이라면, 아직 나의 영혼과 대면 용기가 없다.


 반면에 사진 찍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없다. 그렇다고 그것을 취미로 삼을 만큼도 아니다.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사물이 렌즈를 통하면 눈이 보여주는 형상과는 다른 형상과 마주친다. 눈이라는 도구가 전체적인 모습을 속에 심어준다면, 카메라의 렌즈는 눈이 집중하지 못해 유심히 관찰하지 못한 것들을 재창조한다. 물론 그런 재창조가 맘에 들지 않은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전체의 아름다움이 커서 부분의 아름다움으로 담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카메라를 통해 내가 기억의 순간을 담는다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을 대신해서 다른 곳에 저장한다는 점에서, 셔터를 누를 때의 흥분과 떨림은 매번 즐겁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글은 이런 사진에 대해서 가지는 개인적 감정이나 느낌을 제쳐두고, 그저 글을 읽는 만으로 카메라를 들고 싶게 만든다. 거장이 도달한 경지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나의 열정은 사진 '자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피사체의 정서와 형태의 아름다움을 찰나의 순간에 기록하는 가능성, 다시 말해서 보이는 것이 일깨우는 기하학을 향한 것이다."라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문장으로 사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심오하고 철학적인 분야인가에 대해서 그저 감탄하게만 만든다.


 사실 "영혼의 시선"이라는 책을 처음 손에 쥐게 되었을 실망을 했었다. 100 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분량에 가격은 300 페이지가 넘는 책과 맞먹는 13000 이었다. 책의 가치를 페이지와 가격으로 판단 없겠지만, 같이 책의 가격과 비슷하면서도 두께가 얇은 것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게 실망으로 나타났었다. 하지만 짧은 글에 담겨진 강렬한 충격과 느낌은 실망감을 일소에 날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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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5일 목요일

일본을 보면 한국이 보인다. "부의 위기"를 읽고.....

 
부의 위기 - 8점
오마에 겐이치 지음, 지희정 옮김/국일증권경제연구소


 
소설가를 제외한 일본 저자의 중에서 다치바나 다카시 작품과 함께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의 저자는 오마에 겐이치다. 마음에 든다고 해도 그를 처음 알게 것이 , 권의 책을 보고였다. "보이지 않는 대륙"이라는 책을 우연히 접하게 되면서 그의 통찰력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전에 신문광고를 보고, 작년에 출판된 "부의 위기"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대륙" 통한 좋은 인상 때문에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소제목은 "중류층이 끝장난다". 작년에 우리나라에 출간된 일본의 하류사회화를 예상하는 책들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있는 책이다. 최근의 일본경기가 살아난다는 언론의 보도를 보면 중류층이 끝장난다는 소제목에 얼핏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저자는 경기회복에 속지 말라고 말한다. 경기 지표는 향상되어도 서민들의 생활경제는 향상되지 않고 오히려 하락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상 경제학적 상식이 일본에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의 경기회복상황은 중국특수에 힘입은 것일 중국특수가 아니라면 이익을 있는 일본 기업이 없는 상황임을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1000 엔이 넘는 정부채무, 44 엔의 세수의 2 가까이 되는 82 엔의 세출을 지적하며 일본 경제의 불안요소라고 한다. 그러면서 변화한 사회 구조를 주목한다. 양극화로 인해서 중산층이 붕괴되고 중하류층의 증가를 주목한다. 이런 양극화의 원인으로 비정규직의 증가와 기업간의 격차, 그리고 연공서열주의의 붕괴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 다양한 대책을 제시한다. 우선 기업의 입장에서 주목해보면. 백화점 매출과 할인점의 매출변화를 통해서 소비자의 소비패턴 변화에 주목한다. 중하류층이 증가하면서 백화점의 매출은 점점 줄어들고 할인점의 매출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패션도 고급브랜드 보다는 중저가 브랜드들의 매출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변화의 이면을 보면 소비자들은 값은 싸면서 세련된 상품을 소비하는 성향이 증가하고 있다. 기업은 이런 소비자의 변화를 주목하고 시장을 개척해야 된다고 한다. 따라서 기업은 제품의 실용성을 강조하고, 가격의 메리트와 함께 소비자의 감성까지 만족시킬수 있는 상품을 도입해서, 정체된 소비를 활성화 시켜야 된다고 한다.


 이번에는 중하류층의 의식에 대해서 지적한다. 연공서열시대의 생활패턴이 무너진 상태에서 이상 마련에 매달리지 것을 충고한다. 조금만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여유롭고 만족스러운 생활을 있는 합리적인 소비자의 사고를 주문한다. 자동차도 이상 소유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도시의 경우 대중교통만으로 충분한 이동편의를 얻을 있다. 자동차를 소유함으로써 낭비하는 금전적 낭비보다는 공부에 돈을 투자해서 연봉을 올리는 것이 효과적인 지출이라고 충고한다. 자녀 교육에서도 돈보다는 시간을 투자하라고 한다. 자녀들과 대화를 하면서 인생관과 인생철학을 길러주는 것이 험난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근성을 길러주는 것이 나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고들은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분석해서 합리적인 소비를 것을 충고한다.


 국가의 입장에서 이런 사회적 변화에 대한 대책은. 우선 시장을 개방해서 물가를 낮추고 삶의 질을 바꿔야 된다고 한다.  저자가 중하류층으로 구분한 연봉액수는 600 엔이다. 우리나라 돈으로 5천만 원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상당히 금액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높은 물가로 인해 중하류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저저의 제안 중에 기발하고 재미있는 것은 외국에 토지를 구입해서 그곳에서 농사를 하면 물가를 많이 낮출 있다는 것이다. 농산물을 수입한다는 생각에서 토지도 수입할 있는 발상의 전환은 재미있으면서도 기발하다. 뿐만 아리나 호주의 조립식 주택도 수입하면 가격을 낮출 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서 일본 소비자의 폐쇄성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최근 삼성가전이 일본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고 철수 했다는 기사를 통해서 있듯이, 일본 소비자들의 폐쇄성은 물가를 낮추는데 장애가 된다고 지적한다. 밖에도 뒤쳐져 있는 각종 인허가제도와 구조의 개혁도 필요하다고 한다.


 사실 책에 일본이라는 말을 한국으로 고치면, 내용의 대부분이 우리 사회의 현실에 그대로 직면한 것임을

있다. 부분은 일본의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부분도 있어서 우리와 맞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우리사회도 최근 20대를 88만원 세대라고 칭하는 처럼 소득의 양극화 뿐만 아니라 삶의 저하를 경험하고 있다. 정규직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비정규직을 늘어나고 있다. 기업의 이익은 더미 처럼 불어나지만, 일자리를 창출하는 투자에는 인색한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가 통제하고 개방된 시장 정책으로 인한 높은 물가로 고통 받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다. 최근의 어떤 조사는 일본보다 높은 기록적인 물가를 가지는 상품도 있다고 한다. 일본보다 사회 안전망도 없고 그렇다고 경제규모도 크지 않고, 국민의 소득도 높지 않은 상황에서 어쩌면 우리는 일본보다 심각한 변화에 직면할 있다. 경제는 심리라고 하는데 이런 좋지 않은 지표와 현상들이 계속된다면 경제의 활력을 잃음과 동시 많은 국민들이 삶의 행복감마저 잃어 버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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