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8일 수요일

권위나 권위주의나

 

 권위나 권위주의나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사전적 의미로 권위주의가 의도적으로 위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 사람들을 복종시킨다는 점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는데 말이다. 권위가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에 대해서 무슨 소리냐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스탠리 밀그램은 권위와 복종의 관계를 직접적 실험을 통해서 이미 연구했다. 권위주의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는 귄위에 복종하는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권위에 복종하는 것일까? 우선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책임감에서 자유로워 진다고 한다. 자신의 내적 충돌이나 양심의 혼란이 있기는 하지만,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권위자에게 책임을 대신 돌려버리는 것이다. 영화 "리더- 읽어주는 남자"에는 그런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영화를 보면 수용소에서 간수로 종사했던 피고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여주인공 "한나" 시킨 것이라며 죄의 책임을 "한나"에게 돌려버린다. 자신의 행한 행위는 단지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행한 범죄에 대해서 책임을 완전히 회피해 버린다. 다른 피고들이 자신의 죄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어떤 누군가의 희생양을 찾은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편에는 그대로 그들은 어떤 권위자가 시켰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책임을 회피한 것이다.

 

 다음으로,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에서 이유를 찾을 있다. 개인이 혼자 때는 양심이 작동하지만, 어떤 조직에 속해 있다면 개인적으로 생긴 내적 충돌이나 양심은 조직의 견제와 규제를 받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 우리사회에서도 많이 있는데, 법률자문기구에서 전교조 교사의 시국선언은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는 자문에도 불구하고 교과부는 지금 전교조를 강력하게 탄압하고 있다. 교사들 개인의 양심보다 조직의 논리와 규제를 앞세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직 국세청장을 비판한 글을 내부 게시판에 공무원은 성추행 같은 비리를 저지를 공무원이 가벼운 징겨를 받는데 비해 파면 당했다. 소위 말하는 양심선언을 사람들 대부분이 조직으로부터 어떤 차별과 멸시를 받고 있는지 더해서 생각해 본다면, 권위에 어쩔 없이 복종해야만 하는 조직원들의 심정과 현실을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느낄 있다.

 

 어떤 보수논객이 노무현 대통령은 권위주의를 타파하는데 공헌을 했지만, 권위 마저도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권위나 권위주의나 시민을 복종시키려는 목적은 별반 차이가 없는데 그것을 구분하는지도 모르겠고, 지금의 2mb 지금 권위를 세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대로 지금 권위가 세워지고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권위가 지금은 무자비하다. 그가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활용하는 것들은 과거 독재정권이나 권위주의 정권에서나 있던 것들이다. 국정원, 검찰, 국세청, 경찰 그리고 법원의 판사들까지. 그들도 복종을 하면서 책임을 모두 정권에 돌리면 그만인 것이기에 대단한 복종경쟁 중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침묵하던 학자들이 파시즘에 대한 경고를 내고 있다. 반대편에서는 합법적인 민주주의 선거를 걸쳐 탄생한 정부가 무슨 파시즘이냐는 반론도 있지만, 인류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던 히틀러와 나치 정권도 민주주의 절차를 통해 탄생한 정부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그런 잔혹한 일에 독일국민들을 동원할 있었던 것일까? 스탠리 밀그렘은 "독일인들을 복종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은 불복종에 대한 일시적인 당황이나 수치심이 아니라 형벌의 메커니즘을 내면화한 것인데, 이것은 권위자가 장기적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의 상황, 촛불을 든지 1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 유모차부대는 경찰 수사를 받고 집회에 참석했던 대학생들은 공안부서에 긴급체포 되었다. 조중동에 대한 불매 운동을 주도했던 시민단체는 처벌을 받았고, 인터넷에서의 자유는 사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사이버 이민을 가고 있다. 밖에도 잘못된 권위를 비판했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처벌의 두려움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이다. 스탠리 밀그램이 분석했던 독일의 상황이 지금 우리에게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형벌의 메커니즘의 내면화가. 때문인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을 글을 쓰기 위해서 스스로를 검열하고 있다.

 

 권위나 권위주의나, 차이가 없다. 같은 족속들이다. 우리가 타파해야 했던 것은 귄위주의만이 아니고, 2mb 일당들이 세우려 하는 권위라는 것도 같이 타파해야 것들이다. 인간이 사회라는 무리를 이루어 사는 이상 오랜시간 내면화되어 권위에 대한 복종을 본다면, 권위라는 놈은 사전적 의미가 가지는 권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라스키는 "권위자의 명령을 무조건 수용하는 우리는 아직 문명화환 사람이라고 주장할 없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라스키의 말을 인용하면, "우리가 조금이라도 의미 있고 중요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의 기본적인 경험에 반하는 어떤 것도 수용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전통이나 습관 또는 권위자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충분히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수용을 요구하는 확실성이 우리가 경험한 확신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기표현은 뿌리에서부터 방해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국가에서 자유의 조건은 권력이 강요하는 규범을 광범위하고 일관되게 회의(懷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앞으로 2mb 정권은 권위라는 것을 앞세워 국민을 복종시키려 것이다. 우리는 잘못된 권위에 불복종해야 하며, 용기를 내어 저항해야 한다. 자신의 내면의 충돌과 양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말을 기억하자.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용기 없는 사람들 때문에 폭정은 영속된다."

 

책 - "권위에 대한 복종"을 읽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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