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20일 금요일

임진왜란의 다른 해석이 아닌 역사의 소설적 재탄생. 소설 "숙적"을 읽고......

 


 스포츠에서는 마케팅이나 관중들의 흥미 유발을 위해서 선수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라이벌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탄생한 라이벌이 좋은 방향으로 작용해서 선의 경쟁을 펼친다면 서로의 기량이 같이 상승함은 물론이고, 관중들 또한 라이벌이 만들어내는 경쟁과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열광한다. 반면 선의 경쟁이 아닌, 질투와 시기가 바탕이 라이벌간의 경쟁은 결말은 영화나 소설에서 보여지듯 좋지 않은 결말을 만들어 낸다. 보통 스포츠와 같은 분야는 선의의 라이벌 구조가 많지만, 권력과 같이 커다란 이권이 개입된다면 라이벌 구조는 쉽게 왜곡되어 버린다. 인간의 본성 중에 하나인 탐욕, 그리고 지나친 승부욕으로 서로를 경쟁을 위한 파트너가 아니라 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소설 '숙적' 그런 관점으로 임진왜란 당시 1군과 2군의 장수였던 고니시와 가토의 관계에 보여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같이 총애를 받으며 성장했으면서도 서로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을 쌓아가는지, 그리고 결말을 통해서 얻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역사적 사실을 보더라도 장수는 교묘하게 서로의 대치점을 형성하고 있다. 전형작인 사무라이 기질의 장수인 가토와 장사치 출신으로 무사로써의 능력은 전혀 없지만, 외교와 행정에 뛰어난 고니시.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문관과 무관의 반목이 있었던 것처럼, 그들의 반목은 서로의 전문분야와 능력에 대한 폄하의식이 밑바탕을 이룬다. 그들이 가진 종교에서도 대치점을 이루는데 고니시는 기독교 교인이고, 가토는 불교 교인이다. 거기에 가정환경까지 더해서 본다면, 무역으로 단단한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부유하게 자랐던 고니시에 비해, 가토는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났다. 고니시는 돈으로 탐욕을 채운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가문에서 전략적으로 키워진 인물이라면 가토는 자수성가했다고 말할 있다.

 

 겉으로 보이는 사실만으로 라이벌로써의 조건은 충분하지만, 이들의 라이벌 의식을 자극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그는 전쟁의 전술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부하를 다루는 법에도 능수능란 했던지, 고니시와 가토를 각각의 재능에 맞게 활용하면서도 사이의 경쟁을 붙여 라이벌 의식을 심어준다. 보통 전쟁 시에는 무관들이 승진이 빠른 법이지만, 도요토미는 고니시를 승진시킬 때에는 가토와 같은 무장들과 차별을 두지 않았다. 특히 가토와 고니시를 제후로써 봉할 때는 서로 이웃하고 있는 영지를 나눠 줌으로써 경쟁의식을 극대화 시킨다. 책의 초반부는 고니시와 가토의 이야기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능수능란한 전략에 놀라움을 느낄 있다.

 

 둘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이야기의 구조가 완성되고 나면 임진왜란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재미있는 것은 임진왜란에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서 일본의 시각을 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시작되면 고니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개되는데, 우리에게 용맹하고 잔인한 1군의 사령관 고니시에 대한 인식을 바꿔버린다. 가토와 고니시의 라이벌이야기도 재미있게 전개되지만, 특히 흥미로운 것은 임진왜란과 관련된 일본측의 시선이다. 비록 소설이라고 하지만, 저자는 사실에 바탕을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사료나 취재과정을 언급하면서 어느 정도 역사에 바탕을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책에서는 고니시가 임진왜란을 피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고니시는 기독교신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에 기독교인들을 앞세움으로써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책에서 고니시는 순교자에 가깝게 그려진다.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고 기독교 사상을 지키려고  끝까지 노력한. 하지만  "예수를 배반한 기독교" 보면 고니시가 기독교 사상에 충실한 신자만은 아니였다. 당시 전쟁에 참가한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민경배씨는 " 십자가의 표지 아래서 이들이 남달리 인간적이요, 잔인한 살상을 했다는 기록은 하나도 찾아볼 길이 없다. 우리 겨레 역사의 한에 사무쳐 뼈에 스며 있는 악랄한 일본 군인의 만행에 대해서 이들은 예외가 만한 행동 하나 남겨 놓지 못하고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고니시가 도요토미를 거짓 외교문서와 사절단으로 속이면서 본격적으로 임진왜란은 촉발되는데, 책에서 고니시가 한양과 평양으로 빠르게 진격한 것이 선조를 만나서 화의협정을 맺기 위해서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고니시는 그의 허위보고가 발각될 것이 두려워 더욱 반란집압(임진왜란) 열성을 보이는 처럼 밖에 없었다고 한다."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다른 기독교인 장수 구로다는 5500개의 코를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한 것을 보면 고니시가 기독교적 가치를 실천했거나 하려 했다는 것은 과장된 것으로 해석할 있다. 비록 "숙적" 소설이지만 실제의 역사적 평가와 많이 빗나가는 점이 발견된다.

 

 임진왜란의 후반부에 오면 고니시는 일본군의 동향을 조선군에게 일부러 알려줘서, 일본군을 패배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측 기록에도 이런 고니시의 행동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유에 대한 책과 역사의 평가는 조금씩 다른 차이를 보인다. 책에서는 고니시가 기독교 사상에 바탕을 전쟁의 무의함과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가들의 평가는 "전쟁이 장기화 그리고 전신의 교착상태는 기리시단 군대의 군기 해이, 신앙적 타락을 초래했다." 한다. 고니시의 도요토미에 대한 반감으로 인한 배신에 많은 방점을 두고 있다.

 

 노벨상 후보까지 오를 정도로 뛰어난 작가인 엔도 슈사쿠가 이렇게 역사와 다르게 고니시를 묘사했을까?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있는데, 하나는 고니시에 대한 일본측 역사적 평가와 우리 나라의 역사적 평가가 다르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것이 쓰여진 사람의 주관이 많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역사라는 것을 함부로 단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에 공개된 정조의 어찰을 가지고도 정조의 독살설과 정조와 심환지의 관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것을 보면 역사의 해석에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있다는 보여준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엔도 슈사쿠는 일본 사료의 해석에 충실했다고 생각할 있다. 

 

  번째는 엔도 슈사쿠라는 작가에 대해서 자세히 주목해 필요가 있다. 엔도 슈사쿠의 종교가 기독교이고 그의 소설은 그런 종교를 바탕으로 많이 쓰여졌다는 점이다. 그도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역사적 사실에 자신이 추구하는 관점이나 주제의식을 첨가하기 위해서 고니시라는 인물에 소설적 창작력을 입힌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고니시의 생각과 가토의 생각을 비교해보면 명확하게 엔도 슈사쿠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있다.

 

 가토는 자신의 숙적이 죽었음에도 희열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모든 것이 허무하고 덧없음 깨닫게 된다. 이런 감정은 도요토미가 만들어 놓은 굴레 라이벌 구도에서 갇혀 자신의 생각과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꼭두각시 때문에 살았기 때문이다. 반면, 고니시는 죽음의 순간, 도요토미가 만들어 놓은 굴레를 벗어나 자신이 원하던 삶을 선택했기 때문에 후회도 들지 않고 희열과 의의를 느낀다고 한다.

 

 , 엔도 슈사쿠는 가토와 고니시를 통해서 사회가 만들어 놓은 성공의 틀들(권력, ) 같은 것에 얽매여 사는 삶보다, 가치 있는 이상과 신념(여기서는 기독교적 가치) 바탕으로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삶을 사는 사람은 비록 결말이 좋지 않더라도 후회는 없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희열과 의의를 느꼈다고 표현할 정도로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소설 속의 임진왜란의 내용이 역사와 달라서, 어떻게 보면 역사의 왜곡이나 잘못된 역사의 해석으로 비판 받을 수도 있지만, 소설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집중해야 작품이다. 그렇게 책을 읽는다면 명의 운명적 라이벌의 삶을 쉽게 비교하면서 재미있게 즐길 있는 작품이다.


숙적 1 - 8점
엔도 슈사쿠 지음, 조양욱 옮김/포북(for book)

2009년 3월 17일 화요일

직장인 서바이벌 매뉴얼 그러나......책 "회사가 붙잡는 사람들의 1%비밀"을 읽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웰빙 열풍과 함께 다운시프트족이라고 해서, 연봉을 포기하더라도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낼 있는 직장으로 이직하는 사람들이 주목 받기도 했었다. 단지 가족들을 위해서 돈만 벌어다 주는 가장의 역할을 벗어나 진정한 가족으로써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가족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일에 매몰되어 행복이라는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이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었다.

 

 물질지향적이며 권력지향적인 각박한 직장 환경 속에서 받는 스트레스 탈출을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세계적인 경기침체 상황 속에 다운시프트라는 말은 함부로 꺼내기도 힘든 말이 되어 버렸다.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은 직장을 구하지 못해 아우성이고, 기존의 직장인들도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의 서슬퍼런 칼날이 언제 숨통을 압박해 올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있다. 지금은 직장에서의 생존이 중요해진 상황이 되어 버렸다.

 

 승진도 해야 하고 연봉도 많아야 하고, 직장에서 짤리지 않아야 하고. 책은 그런 직장인들을 위한 전투 매뉴얼이랄까? 그런데 직장을 치열한 경쟁의 장으로 보느냐 아니면 직장을 아주 이상적으로 연대와 공존을 위한 협력의 장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책에 대한 가치 평가는 확연하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책의 내용이 결코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은 별로 없는 하다. 철학 책도 아니고 인문학 책도 아닌 실용서에 그런 것을 찾는 내가 이상한 놈이겠지만……

 

 사실 직장은 가정과 집처럼 안락하고 따스한 공간이 없다. 소수의 몇은 아닌 곳도 있겠지만, 태생적으로 직장이라는 곳은 내부 경쟁은 물론이고 외부 경쟁까지 해야 하는 치열한 경쟁의 장이요 전쟁터이다. 도박장에는 도박에 맞는 룰을 있고 축구장에는 축구에 맞는 룰이 있듯, 직장에도 직장에 맞는 룰이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책의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최근의 경향을 보면 과연 직장이 경쟁의 장이 되어야 하고, 전쟁터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소비자들의 요구가 강화되고 있고, 공정무역을 통해서 착한 소비를 추구하는 똑똑한 소비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공공부분과 기업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제구조에 사이에 중간영역으로 3섹터 또는 사회적 기업이라고 해서 공익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이익을 내는 형태가 등장하고 있다. 이미 유럽의 많은 나라는 상당한 점유율로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고 한다. '88만원 세대' 저자 우석훈 박사는 한국의 경제구조가 취약한 것은 3섹터가 차지하는 비율이 너무 작기 때문에 조그만 경제충격에 다른 나라보다도 영향을 받고 있다 했다. 그래서 지금은 2mb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3섹터를 육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년에 미국 유수의 MBA재학생들이 뽑은 가고 싶은 직장에 국제기구를 비롯한 NGO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비싼 학비를 들여서 MBA 졸업하고도 가고 싶은 곳이 높은 연봉을 주는 직장이 아니라 적은 돈이라도 공익과 보람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위키노믹스"에서는 " 세대는 자신이 '생성한 부를 공유해야 한다.' 강력한 신념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사회적, 공적인 집단의 책임과 공공선을 매우 강하게 의식한다." 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나타나고 있는 사회의 경향을 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흐름은 조금씩 경쟁이 아니라 협동을 통한 연대와 공존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와 직장이라는 곳은 여전히 경쟁을 최고의 가치로 꼽을까?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진정한 프로젝트와 허위의 프로젝트를 구분한다. 여기서 프로젝트란 현대인의 과제나 인생의 목표 또는 주제 같은 것을 말한다. 진정한 프로젝트는 선택의 자유를 깨닫고 자신을 통해서 이성적으로 판단한 이것을 바탕으로 개인적 결정을 내리는 사람의 프로젝트를 말하고, 허위 프로젝트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 그러므로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자신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선택하는 것들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직장의 경쟁과 승진이라는 것은 인생의 목적과 주제를 찾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그냥 하고 있는 허위 프로젝트가 아닐까? 돈을 벌기 위해서 취직을 하고,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키우고. 다람쥐 챗바퀴 돌듯,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인생의 굴레를 그저 맴돌기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일탈이라는 , 다른 길을 벗어 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움이고 공포이기에 우리는 그저 지금의 만들어진 시스템 경쟁이라는 전쟁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ps> 책의 목적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책의 가치는 다섯개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충실하다. 뿐만 아니라,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한번은 읽어봐야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회사가 붙잡는 사람들의 1% 비밀 - 10점
신현만 지음/위즈덤하우스

2009년 3월 16일 월요일

사랑을 표현하는 법. 소설 "매뉴얼"을 읽고......

 


 
핵가족화 사회. 그리고 부모든 자녀든 각각의 구성원들이 자신만의 공간 속에서 서로간의 연대감이 희미해져 간다.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경상도 남편, 아버지들의 모습이 코메디 프로그램의 개그 소재가 되었지만, 그것을 현대 사회에서 파편화 되어가는 가족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은유일 뿐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라는 말처럼, 가족간에 느끼는 유대감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을 있다면 좋으련만, 우리는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인 동시에 표현되지 않은 사랑을 알지 못하는 둔감한 존재들일 뿐이다.

 

 가족들의 사랑이나 배려를 무관심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가족들이 보여주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구속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핵가족화란 핑계, 각자 개인의 삶도 중요하다는 핑계로 많은 현대인들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믿음에 대해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사랑한다 말해야 상대방이 나의 사랑을 있듯, 가족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표현을 해야지 전달되고 돈독해 진다. 우리는 그것을 쉽게 망각한다.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이 언제나 자리에 있는 것처럼, 가족 그리고 안에 사랑은 내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자리에 있으리라는 잘못된 믿음이 현대인들을 힘들게 한다.

 

 혈연으로 이어졌다고 가족간의 연대와 사랑이라는 감정은 영원한 것은 아니다. 시드니 셀던은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말을 제목으로 쓰지 않았던가?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중심으로 관계와 사랑들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우정은 영원한 것이고, 나의 사랑은 영원 불멸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간의 사랑도 아름다웠고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의 어딘가에는 사랑들을 부정하는 다른 편이 존재한다. 확인하지 못한 사랑들에 대한 의구심들이 사랑에 대한 믿음을 하나하나 부식시킨다. 부식과정에서 어느 때는 의구심이 분노로 미움으로 그리고 증오로 변해 나를 힘들게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나이가 들어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이 조금씩 커질 쯤에, 그땐 부모님이 이렇게 말해줬으면 내가 지금 이렇지 않았을 것인데 라는 지난 날의 후회와 원망들은 어김없이 우리의 뇌를 스치며 지나간다. 부모님을 이해하면서도 그때 조금만 부모님들이 이렇게 해줬다면 이라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잘못에 대한 희생양으로써 우리는 부모님이나 가족들에게 원망과 안타까움을 쏟아낸다. 그것은 가족이기 때문에 이해하고 감싸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에 따른 행동이 가족간에도 커다란 상처가 수도 있음을 우리는 모른다. 가족이라는 곳은 우리의 나쁜 감정들을 쏟아 버리는 쓰레기통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상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극복하지 못하는 골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러면서 사랑한다는 말은 위선과 가식이 되는 것이다. 사랑의 표현은 "사랑한다."라는 말로 모든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한다." 말조차 하지 않은 보다야 나을 수도 있지만, 이미 닫혀버린 마음에 사랑이라는 말은 상처를 주는 가시일 뿐이다.

 

 말이라는 것은 밖으로 나와야 말이 되는 것이고, 글이라는 것은 글씨로 쓰여져야 글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도 어떤 것으로 표현되어져야만 사랑이 되는 것이다. 사랑의 표현은 사소한 관심과 진심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들이다. 이런 것들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낯설 밖에 없지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숨겨야 것들 일까? 사랑은 만들어져 나온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이고, 표현하는 것이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아버지가 이제 5살이 딸을 위해서 "매뉴얼"이라는 소재는 매력적이다. 자신을 기억하기도 힘든 나이에 딸의 곁을 떠나는 아버지가 있는 사랑의 표현이랄까? 딸이 자라나는 과정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딸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사랑을 표현할 없었던 아버지가 마지막 사랑을 매뉴얼에 담은 것이다. 속의 아버지는 딸을 가르치려고만 들지 않았다. 솔직하게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이야기하고, 솔직하게 아버지로써의 감정들을 하나하나 표현하면서, 자신의 존재 부재로 인해 나오는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고 있다.

 

 만약 살아있어서도 딸에게 이렇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솔직한 이야기를 했을까라는 의문을 가져보기도 한다. 죽었든 살았든 중요한 것은 속의 아버지가 글이라는 것을 썼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말로서 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하려 했다면, 매뉴얼에 있는 내용들 중에서 빠진 내용도 많았을 것이고, 아니면 다른 내용들도 많았을 수도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많인 생각의 인내의 과정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매뉴얼이기에 사랑이 넘쳐나고 절절한 것이 아닐까? 말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도 좋지만, 책처럼 매뉴얼이라는 이름으로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자녀들에게 아니면 다른 가족들에게 솔직하고 진솔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어떨까? 사랑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


매뉴얼 - 8점
롤라 제이 지음, 공경희 옮김/그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