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8일 일요일

우리는 교육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책 "핀란드교육의 성공"을 읽고

 

 우리나라 정치꾼들이나 교육관련 공무원들이 입만 열면 하는 거짓말이 있다. "교육은 100년지 대계다."라는 말이다. 정치꾼들은 정권이 바뀌면 자신의 취향대로 교육을 좌지우지한다. 특히 이번 2mb정권과 무리배 집단은 아주 졸열한 방법으로 역사교과서를 왜곡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이 전혀 참여하지 않은 뉴또라이 진영의 역사교과서와 역사관이 어떻게 역사교과서에 첨가 수가 있으며, 교육의 내용에 대해서 왈가불가 한단 말인가? 교육관련 공무원들 역시 자신들의 소신보다는 정권의 코드에 맞춰서 바뀐 정권에 맞춰서 교육과정과 내용을 개편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교육은 100년지 대계다."라고 말하는 정치꾼과 교육관련 공무원들이 있다면 그들은 양심이라고는 없는 뻥쟁이들이다.

 

 아니 뻥쟁이보다 사악한 집단이다. 그들은 교육에 대한 철학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교육이란 초기 공교육이 확립되던 시기, 산업화로 발전하는 사회에 표준적인 인재를 조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들에게 학생들이란 단지 사회를 지탱하는 부속품이요. 교육은 부속품이 만들어지도록 만드는 생산 과정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정한 어떤 기준에 미달하는 불량품은 가차없이 폐기해버린다. 반면 부품 한국이라는 기계에 맞는 최상의 부품은 터무니 없는 가격을 매겨버린다. 그로 인해 학생들은 너도 나도 최상의 부품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 학창시절을 제도교육이라는 부품공장에서 낭비한다. 아니 낭비를 떠나서 부품이 완성되기도 전에 망가져 버리는 상황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사악한 집단들은 부품공장의 문제를 재료의 문제로 돌리고 있다. 그래서 재료를 단련시키기 위해서 일제고사라는 첨가물과 함께, 빨리 최상품의 부품을 만들기 위한 공장을 세웠다. 국제 중학교와 각종 특목고들을 말이다. 한국기계의 선진화를 외치던 2mb라는 메모리는 교육의 선진화는 들어보지도 못했는지, 학교라는 부품공장을 과거로 점점 되돌리고 있다. 말로는 다양화를 외치고 있지만, 점수라는 한가지의 측정치로 모든 것을 평가한다. 2mb라는 용량의 한계에서 나와서 그런지 몰라도 그런 첨가물들은 각종 부작용을 양산하고 있다. 일제고사의 성적을 조작하는 사건이 여기 저기서 발생하고 있으며, 학부모들은 보다 좋은 공장을 찾아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학원들은 일제고사라는 첨가물에 대응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개발해서 학부모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있다.

 

 그런데 사악한 집단의 거짓말은 국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것일 뿐임에도 우리는 그런 거짓말을 언제부터인가 맹신하기 시작한다. "학생들의 능력을 시험"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무식한 소리 한마디로 말이다. 중국의 신세대 작가 한한은 자신의 소설 "삼중문"에서 시험의 결과가 좋지 않아 자살하는 것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말했다. "죽은 책을 공부할 뿐만 아니라 죽도록 공부하다가 공부로 인해 결국 죽게 되다니. 아마도 중국에서 실연으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드는 것은 마음 약한 사람은 이미 고교 입시와 대학 입시의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거의 죽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인가 한국 사회에서 시험이라는 잣대가 절대적인 잣대가 되어 버리고 학업문제로 인한 청소년들의 문제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생각한다. 자살한 학생만 못난 것이 되는 것이 한국이라는 사회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에서는 근본적인 교육개혁이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다. 전교조교사와 일부 학부모 단체를 중심으로 가장 모범적인 교육시스템이라는 "핀란드식" 교육 개혁을 외치고는 있지만, 대답 없는 메이리 뿐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씌여진 굴레는 학력저하의 주범이라는 적반하장의 목소리일 뿐이다. 이미 핀란드라는 나라의 교육시스템은 전세계가 인정하고 있는 상태고, 미국을 비롯한 많은 선진국들은 핀란드 교육시스템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도 말이다. 사악한 집단과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맞으면 선진국 타령을 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에 맞지 않으면 선진국이라고 좋은 것은 아니다라는 식의 이중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그래서 사악한 집단과 "핀란드식 교육개혁" 원하는 집단간의 접점은 쉽게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사악한 집단들이 잘하는 거짓말을 실제로 지켰더라면 한국의 교육은 훨씬 비약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핀란드의 경우 1970년부터 교육개혁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 1990년대에 지금과 같은 교육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100년지 대계답게 오랜 시간을 두고 교육 개혁의 방향을 논의 했다면, 우리는 핀란드 부럽지 않은 교육개혁을 했을 것이다. 문제는 잘난 척에 바쁜 옹고집쟁이들이 거짓말만 뿐이라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핀란드식 교육 개혁의 철학을 이해할 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이해하지도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추구하는 교육의 목적은 선진국들이 추구하고 있는 교육의 목적과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다. 인재라는 것을 하나의 부품이나 국가 발전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할 아니라, 머리 속에 지식이 많은 사람을 인재라고 생각하는 전근대적인 잣대를 교육의 목적으로 삼아버린 것이다. 선진국들이 이미 10 전부터 학력관을 지식중심에서 사고력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래서 일생을 통해 배워나가기 위한 , 학습력을 사회에 나가기 전에 익히게 하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선진국들의 교육방향에 가장 적당한 교육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나라가 핀란드이고 많은 나라들이 서로 벤치마킹을 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많은 나라들이 핀란드식 제도를 본따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핀란드식 교육은 제도보다는 국민들과 교사, 그리고 교육당국의 철학과 인식을 공유 하는데서 시작하고 있다. 일본은 교육개혁을 하기 위해 핀란드식 교육과정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교육과정심의회 미우라 슈몬 회장은 이런 말을 남겼다. "학력 저하는 이미 예측하였던 불인이다. 각오하면서 교과심의를 해왔다. 아니 반대로 평균 학력이 내려가지 않고서는 앞으로의 일본은 아무것도 된다는 생각이 맞을 것이다. 결국 못하는 아이는 못하는 그대로 괜찮다. 전후 50 동안 밑바닥까지 뒤쳐진 아이들을 끌어올리는 힘쓴 노력을 이제는 잘하는 아이가 뻗어나갈 있도록 애써야 때다. 백명 사람이 나와도 좋다. 앞으로는 바로 이들이 일본을 이끌고 나갈테니까. 특별한 재주가 없는 아이라면 똑바른 정신 정도만 키워주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일본이라는 단어만 없다면 우리나라의 정치꾼들과 많은 학부모들 그리고 교육정책당국의 생각을 그대로 표현해주는 것이다. 정말 무책임하고 잔인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대한민국의 교육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말이라는 것이 현실이 그저 참담하게만 느껴진다.

 

 이런 인식을 보면 핀란드식 교육의 중심은 제도가 아니라 철학과 인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40년에 가까이 진행된 교육의 개혁이 말해주는 것은 제도가 아니라 철학과 인식의 적립을 위한 개혁과정이었고, 최근 10년의 제도개선이 국민들의 반발 없이 세계최고의 교육제도가 확립된 것이다. 부분을 완전히 무시한 교육제도만을 받아들여서는 교육에 대한 철학적 분열과 갈등 그리고 알맹이 없는 껍데기 교육제도만을 받아들이게 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점수가 아니면 학생들의 능력을 수조차 없다고 하고, 수치 목표가 없으면 교사가 어떻게 일하는지 가늠조차 있겠냐며 되레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핀란드식 교육철학이 공감 받을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핀란드식 교육철학이라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철학과 전혀 다른 점이 없는데도 핀란드식 평준화 교육은 좌파식 교육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긴다. 핀란드식 교육 철학은 자유, 책임, 협동, 평등 이다. 지금 언급된 철학들 중에 자유민주주의에 어긋나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썩어빠진 정치적 논리를 교육에 끌어들이는 정치꾼들에 의해서 좌파식 교육이라는 멍에가 만들어진 것이다.

 

 우선 자유에 대해서 핀란드와 우리의 인식의 차이를 보자. 1%만을 생각 하시는 2mb 무리배는 자유라는 것을 대학학생선발권의 자유로만 인식하는 천박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핀란드에서는 학생, 교사, 학교, 지방정부에게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자세히 들어가면. 우선 학생들에게는 어떤 공부를 것인지에 대한 자유가 주어진다. 수업시간에 교과와 상관없는 행위를 하고 있어도 교사들은 학생에게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 단지 다른 학생들의 수업에 방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만 주의를 받을 뿐이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학생은 학생으로써의 의무를 포기한 것이고 교사는 교사로써의 의미를 포기한 행위로 보인다.

 

 하지만, 이면에는 다른 교육적 철학이 숨겨져 있다. " 방법 방법을 동원해서 흥미를 유발시키기는 하지만 본인 스스로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무릇 인간이란 때부터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태어나며 스스로 배어가는 존재라는 신념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면서, 강요하면 본래의 학습 능력과 효과가 사라져버릴 뿐만 아니라 교육에 있어서도 오히려 마이너스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동시에 거기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 스스로를 위해서 공부한다.'라는 극히 '보통의 교육' 철저히 받고 있다." 것이다. 반면에 우리 나라는 학생들의 두발마저도 강력하게 통제할 정도로 학생들을 통제하려고 하지, 자유와 책임이라는 것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학생들의 조그만 일탈이나 실수를 전혀 용납하지 못하는 강압적인 분위기가 넘쳐난다. 핀란드의 교육은 개인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확고한 교육적 철학을 바탕에 두고 있는 것이다.

 

 교사에게도 커다란 자유권이 있다. 교과서가 없기 때문에 교육과정의 편성에 강력한 , 자유권을 가지고 있다. 학생을 시험으로 평가하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교사에 대해서도 특별한 평가 시스템이 없다. 교육기관이나 지방정부가 하는 것은 교사의 감시나 평가가 아니라 교사와 학생들에게 필요한 지원이 무엇인가를 고민한다고 한다. 교사의 자질에 대한 평가는 수업을 받는 학생들과 그들의 학부모님들의 권리일 뿐이라고 한다. 교사의 책임이라는 것은 학생들의 공부에 대한 흥미와 동기를 유발하는 것이고, 공부하고자 하는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바탕에는 교사의 자질과 능력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의 철저한 신뢰가 바탕이 되고 있다.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석사학위가 있어야 정도의 자질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일제고사의 선택권을 학생에게 교사를 파면시켜버리는 이상한 나라다. 교사의 자율권은 전혀 없고, 책임만을 강요한다. 교사들은 정부에 복종만 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핀란드의 교육은 경쟁이 없다. 16 이전까지 시험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은 시험을 통해서 경쟁해야 이유가 없다. 교육이라는 것의 목표가 스스로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어느 지방을 가든 어느 학교를 가든 똑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있는 평등 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민자 자녀를 위해서 모국어 수업을 보장한다. 학교에 모국어 교사가 없으면 다른 학교에 가서 수업을 받거나 교육당국에서 교사를 파견해서 학생들의 수업 받을 권리를 철저하게 지켜주고 있다.  최근에 이민자 자녀가 늘어나고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핀란드의 이런 정책은 앞으로 도입이 필요한 정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보다 문제인 것이 여전히 남아있는 피부색깔에 의한 차별, 그리고 출신 국가에 대한 차별의식의 개선을 우선해야 것이다. 탈북자 학생들이 말하길 못사는 북한에서 왔다면 멸시를 받기에 차리리 중국 조선족이라고 말하는 것이 멸시 받는다고 하니, 우리 내부의 차별의식은 피부색을 넘어서 이젠 출신국가의 경제력까지 뻗어있다.

 

 그러한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교육의 재정립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국민이 공유해야 한다. 어느 일방만 그것을 공유해서는 지금과 같이 정권이 바뀔 마다 교육정책과 목적은 요동칠 밖에 없다.  말로만 "교육은 100년지 대계"라고 하지 말고, 정말로 100년을 준비한다는 생각으로 교육의 목적과 철학을 정립하고 교육제도를 정립해 나가야 한다. 핀란드의 교육의 성공은 명확한 교육의 목적과 철학의 승리이지 제도의 승리가 아니다. 경쟁의 노예들과 시험의 노예들이 교육의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분명히 쉽지 않은 과정이 것이다. 그러기에 핀란드 교육의 성공에 대해서 명확한 분석과 연구를 모두가 공유하면서 우리에게 맞는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이제 시작하자. 학생들을 어떻게 복종시킬지, 학생들을 어떻게 관리할지 고민하지 말고, 우선 아이들을 어른들의 소유물이나 부속물이 아니라 명이 우리와 같은 하나의 인간이라는 관점으로 어떻게 자유와 책임을 부여하고 가르칠지 시작하자. 점수로 어떻게 아이들과 학교를 세우고 교사를 평가할지 고민하지 말고, 교육의 목적이 학벌인지 학력인지 사고력인지부터 명확히 하자. 그리고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지식을 주입시켜줄지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스스로 배울 있는 힘을 키워 있는지 고민하자.

핀란드 교육의 성공 - 8점
후쿠타 세이지 지음, 나성은.공영태 옮김/북스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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