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8일 화요일

통쾌한 설정과 전개 하지만 허무한 결말. 영화 "모범시민"을 보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정의란 무엇일까? 정의란 존재하는 것일까? 법이라는 것은 원래부터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을 위한 것이다. 지강헌이 외친 "유전무죄 무전유죄" 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효하다. 뿐만이 아니다. 여전히 권력 앞에서 법이라는 존재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헌법을 수호해야 하고 법치를 외치는 대통령은 헌법이 보장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함부로 불법으로 매도하는 세상이니, 우리는 민주주의와 법정의의 후퇴를 당연하게 받아 들여야 할까?

 

 그렇게 법과 공권력에 대한 정의에 믿음은 점점 후퇴해 간다. 법은 휴지가 되어 버리고 공권력이 법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속으로 속으로 분노를 삼킨다. 용산에서 일어난 가지지 못한 이들의 억울한 죽음에도 그저 슬퍼만 뿐이다. 슬픔과 분노는 울분으로 바뀌고 마음 깊은 곳에서 복수의 마음을 키운다. 그렇게 정의가 사라져가는 세상, 가진자들이 정의를 유린하는 세상에 통쾌하게 지붕 뚫고 하이킥을 날릴 날을 기대하면서.

 

 영화 "모범시민" 공권력을 향한 평범한 시민의 분노와 복수라는 설정만으로 충분히 기대하게 만든다. 대리만족이랄까? 사적 복수가 허용되지 않는 현실에서 영화 속에서나마 대리만족을 느낄 있다면 이것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대상이 특히 지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대면서 떡찰이라고 불리는 집단이라면 통쾌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정치권력에 대한 복수도 설정하고 보여준다면 좋았을 것을 부분이 없는 것이 조금은 아쉽다고 할까?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클라이드(제랄드 버틀러) 어느 명의 강도로 인해서 아내와 아이들이 무참하게 살해 당한다. 범인은 잡혔지만, 검사 (제이미 폭스) 높은 승률을 유지하기 위해서 범죄자들과 협상을 하게 된다. 살인을 저지른 주범은 가벼운 형량을 언도 받고, 도둑질만 하던 다른 범인이 사형을 언도 받는 기이한 상황이 발생한다. 미국의 경우 폴리바겐이라고 해서 범죄자와의 유죄협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아직 우리나라에는 없는 제도로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다.

 

  영화의 경우 폴리바겐 제도와 제도의 허점 그리고 공권력의 부족한 사명의식을 지적한다. 하지만, 영화는 닉이 재판으로 범인들을 심판할 없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원래 영화의 목적은 개인이 공권력에게 행하는 사적 복수이기에 그런 부족한 설명은 무시하고 넘어가도 영화의 흐름을 이해하고 즐기는데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클라이드는 드디어 복수를 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범죄자에 대해서 복수를 시작하고 차츰, 공권력에 복수를 한다. 치밀한 계획으로 만들어진 사적 복수는 검사 닉과 재판을 했던 판사만을 향하지 않는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권력을 향한 복수다. 그리고 복수를 통해서 공권력이 가진 불합리와 불의를 비웃기 시작한다.

 

 정말 우리에게 공권력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법의 수호자이고 정의의 수호자 인가? 현실은 충분히 그렇지 않다. 국민의 법감정이라고 불리는 것과 법집행은 이미 많은 괴리를 보여왔다. 그래서 피해자나 다른 국민들은 분노하고 법체계과 공권력을 불신하기 시작한다. 막대한 비자금을 조성한 이건희나 정몽구는 밖에서 여전히 떵떵거리면서 기업을 경영하고 있으며, 분식회계로 국가경제를 위태롭게 했던 김우중은 이제 사면을 받아서 자유를 누리지 않던가? 그런데 돈과 권력이 없는 잡범들은 그들보다 죄값을 치른다. 그렇게 법과 현실의 괴리는 점점 커져 간극을 메우지 못하고 있다.

 

 그런 현실에서 영화는 설정과 복수의 과정만으로 관객들에게 충분히 통쾌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무차별 살인이라고 있는 클라이드의 복수가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고 박수를 정도로 통쾌한 이유가 바로 때문이다. 직접 말은 하지 못해도 우리나라에서 정의라는 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불의에 대한 복수를 통해 정의를 바로잡으려는 착한 마음이 이러한 상상을 부추긴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이런 설정과 내용의 전개는 마지막에서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솔직히 말하면 허무하다고 해야 할까? 정말 어이없는 결말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헐리우드식 결말이라고도 했다. 법에 의지하지 않고 폭력으로 클라이드를 제단하는 닉과 경찰의 모습 과연 그들이 정의를 구현할 생각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들도 불법과 탈법을 정의 구현에 동원하게 된다. 그게 정의라고 말할 있을지 모르겠다. 결국 검사 닉도 클라이드와 다르지 않는 사적 복수를 했을 뿐이라는 것이 정확한 말이 되지 않을까? 단지 닉이 가진 지위가 검사라서 그들이 행한 폭력이 쓰레기 같은 권위를 가질 뿐이다.

 

 영화는 공권력이라는 권위에 의한 정의 구현이 정의라고 말하는 하지만, 결국에 객관적인 정의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적 복수도 정의가 아니요. 공권력도 정의가 아님을 보여준다. 영화가 내놓은 마지막 결론은 결국 정의라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변명하는 사람의 지위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의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경찰이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진압을 시민을 진압해도 공권력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을 받지 않는 이유와 스폰서 검사로 다양한 향응과 뇌물을 제공받았던 천성관은 검찰총장 후보였다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은 이유가 영화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이해되게 만든다.

 

댓글 1개:

  1. trackback from: 노트북 포맷을 다시 했다.
    노트북 포맷을 다시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포맷 안하는 방법 없을까 os다시 까는 것은 그렇다지만 프로그램 설치하면서 낭비되는 시간이 장난이 아니다. 금쪽같은 내 시간 ㅎㅎ 구글에서 소프트웨어를 인터넷 접속해서 사용하게끔 한다고 하느것 같은데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길을 잃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길을 잃어서 방황해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런 상황을 만나게 되면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외로움과 두려움은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면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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