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15일 화요일

신문 어떻게 읽어야 할까? 책 "신문 읽기의 혁명 2"를 읽고.

 

 세상이 교과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제대로 배우는 것은 대학에 들어가면서다. 성인이 그때, 우리를 구속하고 억압하던 학교라는 틀을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는 동시에 어른들의 보호막이 없는 세상을 몸으로 부대끼면서 배운 것과 현실이 다름을 조금씩 조금씩 느끼게 된다. 맹목적으로 믿었던 교과서와 어른들이 말하는 이야기들 그리고 뉴스와 신문의 기사들이 위선에 거짓임을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고, 단단히 굳었던 비판적 사고능력이 조금씩 조금씩 깨어난다. 처음에는 누군가에 의해 왜곡된 사실과 자신이 직접 접한 현실의 괴리로 혼란스러움을 겪게 되지만,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지적 사고 능력은 맹목적인 추종을 하는지 아니면 비판적인 시선으로 진실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된다.

 

 요즘은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이를 비교해 봄으로써 비판적 사고력을 키울 있는 환경이 발달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위에 과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란 기본적인 특성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믿고, 믿고 싶은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자신이 믿고 있는 정보가 왜곡된 정보라는 사실을 말해도, 자신이 그렇게 믿고 싶다면 거짓된 정보를 언제나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보의 르네상스를 넘어 정보의 과잉이 되어버린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정보만을 우선 취득하고 열중한다. 다른 곳에 쉽사리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로 인해 지식의 편협함이 야기되고,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점점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비판적 사고력이라는 것이 생길 여지는 정보통신의 시대라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어 보인다.

 

 클릭 번으로 많은 뉴스를 쉽게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종이로 만들어진 신문이라는 매체가 그래도 가치를 가지는 것은 기사의 사실성이나 객관성을 떠나서 자신의 취향이 아닌 정보까지도 종합해서 보여주는 때문이지 않을까? 인터넷과 마찬가지로 신문이라는 매체도 기사를 취사선택해서 정보를 취득할 있는 편협함이라는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전체를 한번 훑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데 그런 신문을 읽다 보면 내가 신문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때가 많다. 기사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가도 논조가 다른 신문의 비슷한 기사가 반대되는 이야기를 해도 고개를 끄덕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판적 시선으로 신문을 읽으려 노력하는데도 쉽게 신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사실과 안에 숨어 있는 의미를 읽지 못한다.

 

 그래서 논조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신문을 골고루 보면서 제대로 신문을 읽으려 노력해야지 하고 마음을 잡지만, 안에 남아 있는 같은 기운이 그것을 참지 못한다. 극단적 이분법적 사고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나와 가치가 다른 논조를 가진 신문을 보지 않게 된다. 소위 "조중동"이라고 불리는 이런 신문을 보지 않아도, 한국의 신문시장이라는 것이 보수로 많이 편향되어 있기에 다른 신문과 내가 선호하는 신문을 비교해 읽으면 충분하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해 본다. 아무튼 그렇게 신문을 점점 조심스레 읽게 된다. 신문이란 사실 그리고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읽어야 된다고 말이다.

 

 사실 선진국에서는 선거 때가 되면 신문사들이 선호하는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다. 사설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 선진국의 신문들은 그런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 감추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밝히는 것일까? 아마도 그곳 시민들은 신문이라는 것이 사실만을 추구하거나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고 용인하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신문이라는 것도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하나의 경제적 객체로 보는 것이다. 신문들이 자신의 이익이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의견을 표출하는 것에 대해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신문사도 정치적 중립이나 객관적인 사실의 보도보다도 이면에는 경제적 이익추구라는 관점이 존재하고 존재할 밖에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선진국 시민들이 신문을 보는 이유는 자신의 관점에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누구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한다. 그래서 사람을 이기적 동물이라는 경제학적 정의는 너무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사실이 되어 버렸다. 그럼 우리는 거기에 맞는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기 위해서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 경제, 정치, 사회라는 분야로 분리해서 생각해보자. 우선 미시적 경제 관점으로 접근하면, 일상에서 우리는 상거래나 일을 통해서 이득을 추구하고 있다. 특히 이런 현상이 사회적으로도 나타난다. 학연, 지연, 혈연을 통해서 어떻게든 서로 이득을 추구했고, 여전히 추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이득을 목적으로 인간관계를 확장시키는 사람들까지 존재할 정도로 우리는 이기적 동물이라는 정의를 충분히 실행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정치분야에서는 다른 현상이 나타난다. 폐기 처분되어야 지역감정과 왜곡된 색깔논쟁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행사하는 정치적 행위에 대한 의미를 망각하게 만든다. 정치꾼들과 거기에 야합하는 신문들이 만들어낸 선동 안에서 유권자인 우리들은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는 투표를 하지 못한다. 오히려 자기 이익에 반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노동자와 서민들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인 민노당을 선거에서는 지지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는 지방의 재정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종부세 폐지" 대해서도 지방에서 지지도가 높은 기현상까지 발생하게 된다.

 

 그럼 경제적 이해관계는 분야에 따라 왜곡되고 다르게 표현되는 것일까? 특히 정치분야와 정치가 힘을 좌우하는 거시적 경제분야에서 말이다. 분야들의 특징이라면 상당히 추상적으로 일반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고 접근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존재한다. 그래서 신문이라는 도구에 많이 의존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입장을 정리하게 된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런 원래 신문이라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매체다. 결코 그들의 사적 이익에 반해서 행동하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결국 구독자가 접하는 정보라는 것이 신문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보가 된다.

 

 그렇다면 신문이라는 것이 어떤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가 생각해봐야 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신문이라는 매체의 수익구조를 밖에 없다. 수익구조를 살펴보면, 구독료보다 광고에 수입이 차지하는 비율이 크다는 것을 있다. 결국 신문이라는 광고를 발주하는 기업의 눈치를 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광고주에 대한 비판적인 신문기사를 쉽게 싫을 없을 뿐만 아니라, 기업에 유리한 기사들을 많이 재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신문이 전하는 정보라는 것은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보가 되는 것이고, 구독자들이 받아들이는 정보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보가 아니라 기업의 이익을 위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그래서 유권자인 구독자들은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보다는 기업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

 

 "신문 읽기의 혁명 2"에서 저자는 그런 관점에서 신문을 읽을 때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서 읽어서는 된다고 말한다. 정치경제적 관점으로 신문을 읽으라고 말한다. 정치와 경제가 섹션으로 구분되어 있어서도, 정치경제적 관점으로 가사를 읽어야지만, 기사가 담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신문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정치권리를 행사함으로써 스스로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소수의 특정 계층을 위해 봉사해왔던 것이다. 자신들의 잘못 행한 정치적 행위로 인한 삶의 피폐화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신문이 만들어낸 거짓 프레임 안에 갇혀 버림으로써 변화를 통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기회마저도 스스로 거세해 버리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그래서 신문을 제대로 읽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현재 우리는 단재 신채호가 100여년 전에 신문에 기고했다는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 함으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글이 지금에도 유효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신문에 대한 맹신에서 시작된 어리석음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바꾸고 똑똑한 민주시민이 되어야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책의 제목처럼 이제라도 제대로 "신문 읽기의 혁명" 통해서, 소수의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노예가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는 민주시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신문 읽기의 혁명 2 - 8점
손석춘 지음/개마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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