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1일 월요일

책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를 읽고.....


 

 털어서 먼지 나는 사람 없듯, 역사라는 것도 좋은 이면에는 어두운 면이 있기 마련이다. 역사의 양면을 가지고 어떤 것에 가치를 매겨서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사람 저마다의 관점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결정된다. 어떤 사람에 대한 평가나 인상이 자신이 가진 관점에 따라 달라지듯, 역사에 대한 평가 또한 각자의 관점에 따라 평가되기 마련이다. 사람마다 어떤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다르듯 역사의 평가에 대한 호불호도 다를 밖에 없다. 하지만, 역사 교육에서 어느 일방의 평가만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위험할 밖에 없다. 거창하게 그것이 역사를 통한 애국심 교육과 국가와 역사에 대한 자긍심 교육이라는 명목을 내세우지만, 자칫 잘못하면 맹목적인 파시즘을 야기할 수가 있다. 히틀러라는 인물이 게르만 족은 위대한 역사와 혈통을 가진 종족이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며, 독일 국민들을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었다. 그것은 파시즘의 징조였고, 결국에는 2 세계대전과 유대인의 학살이라는 참혹한 혼돈으로 세계를 몰아 넣었다. 일본의 군국주의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또한 히틀러와 괘를 같이했던 것들이다.

 

 역사라는 것은 정확한 사실을 가지고 평가를 시작해야 한다. 양이든 음이든 과장하거나 숨기려 해서는 안되고, 정확하게 공개해서 저마다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평가할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역사 교육이란 어느 관점을 바탕으로 역사의 평가를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를 평가할 있는 방법과 관점을 기르는 것이야 한다. 그럼에도 지난 역사 교육은 권력을 가진 집단이 일방적으로 평가한 역사의 관점을 강제로 학생들에게 주입해왔다. 궁극적으로 집단이 원하는 것은 역사 관점의 주입을 통한 동조세력을 만들고 반대세력의 확장을 저지하는 것이었고, 결국에는 자신들의 권력을 지속적인 유지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학교라는 틀을 떠나서 다양한 시선과 관점을 가진 책이나 정보를 접하게 되면, 이제껏 배워왔던 역사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박노자교수가 "나를 배반한 역사" 라는 책은 그런 관점이 충분히 묻어날 뿐만 아니라, 다른 관점과 다른 역사적 사실을 접했을 때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했다.

 

 어느 쪽의 역사에 대한 일방적인 평가의 주입과 확대의 가장 파국은 "파시즘"이라면, 다른 문제는 역사를 신화로 바꿔버린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위대한 탐험가요 모험가이지만, 그가 처음 상륙했던 지역의 원주민들을 모두 몰살한 잔악한 정복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백인 우월주의를 앞세운 역사 교육은 그런 잔혹함을 완전히 배제해버렸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위대한 탐험가라는 신화로 존재하게 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존경받는 링컨 대통령은 노예를 해방시킨 사람이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경제학자인 장하준 교수는 "나쁜 사마리아인"이라는 책을 통해서 링컨은 보호주의 무역을 폈던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남북전쟁의 이면에는 자유무역과 보호주의가 충돌한 것이라고 말한다. 농산물이 주요 수출품이었던 남부와 공업은 발전했으나 영국에 비해서 열악한 경제력 때문에 산업에 대한 보호가 필요했던 북부의 충돌이 만든 전쟁이라는 것이다. 링컨은 북부의 경제를 보호하려는 보호무역주의자였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링컨은 강경한 노예해방주의자가 아니 였다는 평가도 있다. 노예 해방을 위해서 남부와 전쟁을 생각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전쟁보다는 평화와 대화를 중시했던 그의 철학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약한 노예해방정책은 자신의 지지기반인 노예 해방론자의 반발을 초래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최근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거국 내각을 구성하면서 언급되고 있는 책인 "Team of rivals"에는 이런 과정들이 설명되어 있는데, 특히 링컨이 노예 해방선언을 시기와 목적에 대해서 전쟁의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과정을 전혀 모른 링컨이라는 인물을 하나의 신화로 인식한다.( 책의 끝도 링컨을 신화로 만들면서 결론을 맺는 단점이 있다.)

 

 한국에서 신화가 되어 버린 역사를 본다면 박정희라는 인물을 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 개발의 영광은 박정희라는 인물의 영광이 되어버리고, 그의 독재 앞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착취당해야만 했던 노동자들의 땀과 피는 완전히 무시되어 버린다. 당시의 개발 독재가 지금의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것은 박정희 혼자만의 영광이고 업적이 아니라, 노동을 착취당하며 묵묵히 일해왔던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같이 누려할 영광과 업적인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개발 독재의 역사는 박정희라는 인물의 신화가 되어버렸고, 대선이나 총선이 되면 그의 신화는 우매한 국민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독재에 대한 향수마저 자극하면서 잘못된 폭력이나 공권력에 대해서 침묵을 떠나서 환호까지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잘못된 교육이 만들어낸 기현상은 결국에는 갈등만 유발할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의 나열, 그리고 역사를 해석하는 방법과 관점을 기르는 교육을 통해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거기에 하워드 진은 역사 교육적 관점에 더해서 하나를 가르쳐야 된다고 한다. 그것은 동안 무시 되어 왔던 계급과 계급갈등 문제를 정직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계급과 계급갈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헌법은 많이 평등하다는 것을 강조해서 이런 계급 갈등을 가리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노동운동에 대한 천박한 인식이나 파업권에 대한 천박한 인식 그리고 선거나 투표에서 특권계층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투표현상을 보면 이런 교육의 절실함이 느껴진다. 이런 교육이 오히려 갈등을 불러 일으킬 있겠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알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갈등보다는 화해의 길이 모색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 - 8점
하워드 진.도날도 마세도 지음, 김종승 옮김/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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