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11일 월요일

용서가 어려운 이유. 영화 "용서는 없다"를 보고.

 

 이상하게 우리나라에서 용서라는 단어를 먼저 꺼내는 사람은 주객이 전도된 경우가 많다. 용서를 빌어야 인간들이 과거의 일이라며 자신들의 과오를 하찮게 여기거나 시대에는 어쩔 없었기 때문에 그냥 용서하고 넘어가자고 말한다. 어떤 인간들은 비겁하게 한마디 덧붙인다. 미래를 위해서 과거를 덥자고.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치부에 대해서 드러내놓고 사과할 용기조차 없는 비겁한 인간들이다. 어떻게든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려고 하거나 때론 감추려하고 어떤 경우에는 이념적 색깔을 뒤집어 씌워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러는 사이에 피해자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 분노를 가슴에 억누르고 살면서도 언제든 용서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거대한 보상금도 아니고 "눈에는 , 이에는 "라는 식의 복수도 아니고, 단지 가해자들의 진심에서 나온 사죄의 한마디 뿐인데도 사죄하는 인간들은 없고 용서를 구하는 인간들도 없다. 오히려 권력과 부를 장악해서 자신들은 떵떵거리면서 호의호식하고 있다. 과거의 고통이 현재의 고통으로 이어지고, 과거의 부정과 폭력은 현재의 부와 권력으로 이어지는 세상이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상황이 이런데도 어떤 인간들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분노에 대해서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함부로 말한다.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지 않는 상황에서 과연 누가 용서를 한단 말인가? 사죄를 구하지 않은 침묵하는 피해자들이 나서서 가해자에게 사죄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을 용서해가 아니라, 상처를 다시 들쑤시기 싫어서 아픔에 대한 기억들을 스스로 지워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런 상황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용서를 받았다는 식으로 해석해 버린다. 침묵하는 다수의 피해자들은 한마디로 용서해서가 아니라 상처를 잊으려 하기 때문인데도.

 

 영화 "용서는 없다." 이런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서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 피해자의 복수를 다루고 있다. 복수를 실행하는 이성호(류승범) 다른 복수의 화신이 되어 버리는 부검의 강민호(설경구) 치열한 대결은 영화 전반을 이끌어 간다. 연기 잘하는 배우로 평가 받는 설경구와 류승범이 각각 역할을 맞아서 팽팽한 긴장감을 영화 내내 유지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용서에 대해나 심각한 탐구를 한다. "눈에는 , 이에는 "라는 방식으로 피해자의 아픔을 가해자가 직접 느끼도록 만들어 버린다.

 

 이런 식의 복수는 커다란 아픔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번쯤 꿈꿔 봤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법이 있고, 다양한 상황변수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쉽게 실현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 분노의 마음이나 복수의 꿈은 결국에 피해자의 상처를 곪게 만든다. 그런데 그들은 알고 있다. 분노와 복수의 마음이 얼마나 자신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가는지를. 그래서 가해자를 용서하거나 잊는 것이 자신의 심신 건강에 좋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어떤 책에 재미있는 우화가 하나 있었다. 말을 함부로 하고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에게 아버지는 나무 울타리에 수십 개의 못을 박도록 시켰다. 아이가 못을 박았다고 하자, 아버지는 아이에게 다시 못을 뽑으라고 시켰다. 그래서 아이는 못을 뽑고, 다시 아버지에게 뽑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자국이 숭숭 있는 나무 울타리를 가리키며 아들에게 말했다. "울타리에 선명한 자국이 보이니? 울타리가 예전처럼 말끔해지기는 힘들 같구나. 네가 화가 나서 내뱉는 말들은 자국처럼 흔적을 남긴단다. 네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나서 아무리 미안해한들 흔적을 지울 없듯이 말로 새긴 상처도 때로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을 명심해라."라고 했다.

 

 이렇듯 사소한 한마디에도 다른 어떤 이의 가슴에 남긴 상처도 지울 없는 것이 되는데, 하물며 다른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상처의 자국은 어떻겠는가? 경험하지 못하면 없는 상처의 깊이에 대해서 너무 쉽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듯, 이성호는 강민호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새겨버린다. 영화는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놓은 상태에서 전개된다. 그래서 영화는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의 팽팽함을 주지 않는다.

 

 대신, 강민호가 딸을 구하려는 부성애에 기대어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다 보니 딸을 찾기 위한 강민호의 몸부림과 이성호를 무죄로 만들기 위해서 증거를 조작하는 강민호의 행동을 통해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고, 영화를 끌어나간다. 그래서 영화의 반전은 범인의 정체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어떻게 이성호가 강민호에게 죽을 만큼 괴로운 상처를 새기는지가 영화의 커다란 반전으로 작용한다. 어떻게 보면 잔인하고, 정말 충격적인 반전이다. 그런데 그러한 반전이 전해주는 충격이 영화의 제목이 "용서는 없다"라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죽는 보다 용서하는 것이 어렵다" 이성호의 대사는 용서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암시하는 대사다. 뿐만 아니라, 대사는 강민호가 이성호의 입장이 되었을 때의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에 대한 복선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결말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반전의 잔인함 만큼 영화의 엔딩 또한 무겁고 어둡다. 이러한 엔딩을 통해서 용서한다는 행위자체가 피해자들에게 또한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문득, 어떤 책에서 읽었던 용서에 대한 이런 문구가 생각난다. "용서를 때는 이미 용서한 잘못뿐만 아니라, 용서 자체도 잊혀져야 한다.". 당신은 같은 용서를 본적이 있는가? 그런대 생각해 보니 이성호는 누군가에게 사죄를 받아 본적이 없다. 결국 용서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는 인간들의 어리석은 속마음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말부터 먼저 하는 것이 우선인 같다. 영화 속의 이성호와 같은 아픔을 이해하고, 당신은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어본 적이 있는가? 생각해보면 용서가 어려운 것은 진심으로 사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큼 우리는 사죄에 인색하게 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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