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14일 화요일

입시전쟁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현재. 책 "입시전쟁 잔혹사"를 읽고....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죽어야 정신을 차릴까? 해마다 200여명의 아이들이 입시로 인해서 죽어간다는 것은 알기나 할까? 아무리 언론에서 청소년 자살률이 OECD국가 1위라고 떠들어도 귀에 읽기일 뿐이다. 대중들과 언론은 연예인들의 자살에는 슬퍼하고 애도를 표하면서, 피우지 못한 꽃봉오리들이 그냥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귀하지 않은 생명이 어디 있고, 안타깝고 슬프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중국의 교육체제와 입시문제를 비판한 신세대 작가 "한한", 자신의 자전적 소설 "삼중문"에서 "죽은 책을 공부할 뿐만 아니라 죽도록 공부하다가 공부로 인해 결국 죽게 되다니. 아마도 중국에서 실연으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드는 것은 마음 약한 사람은 이미 고교 입시와 대학 입시의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거의 죽어서 그런 모양이었다."라고 했다. 우리 나라에서 젊은 베르테르 처럼 실연으로 자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처절한 입시전쟁에서 생존했다고 해서 자살자의 수는 줄지 않는다. 오히려 자살자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08  사망원인 통계연보" 보면, 2007년에 37시간마다 10 청소년 1명이 자살로 사망했지만, 성인은 81분마다 자살로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가장 아름다운 시기여야 10 청소년 시절에는 치열한 입시전쟁을 견뎌야 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약육강식의 생존 전쟁을 견뎌야 하는 정글 같은 사회의 단면인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는 자살자의 수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를 나타내는 바로미터 임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흔하디 흔한 사건으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의 종착역은 죽음이어야 이유가 없음에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문제의식을 가지 않는 사회, 그런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사회, 우리 나라는 언제부터인가 그런 곳이 되어 버렸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기에 우리 사회는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일까? 아니 우리는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일까? 지독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에 스스로를 몰아 넣으면서 자초한 망국적인 현상을 아닐까. 자살하는 사람이 자신이 되었을 , 주변과 사회에 도움을 구하지 못하는 현실과 냉대 어린 시선은 우리가 지금 자살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현실이자 시선이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는 여전히 타인의 죽음에 무관심하고 냉정하기만 우리는 죽음의 방관자를 넘어서 죽음의 생산자가 되어 버렸다.

 

 선진국 콤플렉스와 서양 콤플렉스로 지독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으로 스스로를 몰아 넣으면서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2 국가로 머물러 있다. 권력자들은 우매한 국민들을 향해 선진화라는 아젠다를 설정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은 권력자들의 허황된 거짓말을 믿으며 경쟁만이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요 힘으로 믿는다. 순진한 국민들은 그렇게 서로를 죽일 듯이 경쟁에 매달리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권력자들의 부정부패에 실망하고 한탄만 뿐이다. 유전무죄와 권력 앞에 관대하기만 불평등한 앞에 분노하기 보다는 권력과 돈을 가지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하고 자기 자식만은 돈과 권력을 가질 있도록 교육이라는 도구에 매진한다.

 

 역사적으로 조선시대부터 있어온 입시부정과 권문세가 자손들의 족집게 과외, 그리고 조선 말기의 부정부패가 넘치는 과거시험을 통한 매관매직의 행태는 지금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교육문제의 과거이기도 하고, 현재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하다. 계절에 맞게 바꿔 입는 옷처럼, 시대마다 교육의 옷만 바뀔 교육 문제의 분질, 사회문제의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탄생한 조선말기의 지도층들의 행태에 분노한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개혁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아직도 단지 계급, 약탈자와 피약탈자로 구성되어 있다. 면허받은 흡혈귀인 양반계급으로부터 끊임없이 보충되는 관료계급, 그리고 인구의 나머지 4/5, 문자 그대로의 '하층민' 평민계급인 것이다. 후자의 존재 이유는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에게 피를 공급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조금 과장되어 생각 하자면, 지금 우리의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자신들만의 권력유지을 유지하기 위해서 국제중, 특목고, 그리고 사악한 사립대학이 공조를 이뤄서 돈으로 약탈자와 피약탈자를 구분지어 버린다. 자율이라는 이름을 앞세우지만, 책임을 지지 않는 방종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 많은 약탈을 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피약탈자 자신들이 약탈 당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 단지 권력과 돈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탓할 뿐이다. 어떻게든 자신이나 자식들이 약탈자가 있도록 힘쓸 뿐이다. 철저하게 계급 상승만을 꿈꿀 , 불합리와 모순에 저항하고 싸우려 하지 않는다. KBS 오락 프로그램 "1 2" 출연자들이 복불복게임을 하면서 "나만 아니면 !"라고 외치듯, 자신과 자식들만 피약탈자가 아니면 되는 것이다.

 

 "험난한 역사를 겪어온 한국인들은 '승자독식주의' 저항하려 하기보다는 '승자독식체제' 또는 근처에라도 참여하는 쪽으로 모든 에너지를 집중시켰다. 그래서 중앙정부도 아무 문제없다는 정부 인사에서 그러한 '승자독식주의' 유감없이 실천하였다."라는 강준만 교수의 지적은 그런 현실을 냉철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역사에부터 학습한 피약탈자들은 계급상승을 이뤄줄 있는 방법을 스스로 학습한 것이다. 그래서 자식들에게나마 이런 자신의 계급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치열한 입시 경쟁으로 가족들을 몰아 넣는다.

 

 스스로가 원한 것도 아닌, 어른들과 사회에 의해 강제된 입시전쟁 속에서 아이들이 배운 것은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라 "승자독식사회"라는 현실과 냉혹한 경쟁 뿐이다. 아이들의 개성을 죽이고, 아이들의 자존의식마저 말살하고 있는 지금의 교육체계 안에서, 입시경쟁과 약육강식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오히려 강화시켜나간다. 그렇게 죽어있는 교육을 받으면서 우리는 스스로 학습하는 법도 배우지 못하고, 스스로 비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함으로써 약탈자들에게 계속해서 약탈만 당할 뿐이다. 언젠가는 자식들이 약탈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임계치에 도달한 많은 아이들은 자살을 택하고, 입시 전쟁에 생존해 성인이 이들도 그런 한계에 좌절하며 다시 자살을 택하는 것이 현실임을 망각한다.

 

 문제의 근원이라고 있는 교육과 입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저자는 SKY 소수정예화를 주장한다. 그렇게 해서 한국 엘리트 시장의 독과점 체제를 해체하자는 것이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개인적으로 의문이다. 모자란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SKY 인문사회분야와 과학과 공학위주로 개편하고, 지방국립대에도 서울대 만큼의 지원으로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도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법대나 상대 같은 곳들은 해체해버리면서 학문중심의 대학으로 변화하면, 권력과 돈으로 연결되는 학연주의와 학벌주의는 희석되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등록금 천만원 시대에 지방국립대에 대한 대폭적인 지원으로 교육의 질을 향상하는 동시에 등록금을 공짜로 한다면, 충분히 유명 사립대와의 경쟁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잡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지방 인재들의 유출을 어느 정도 차단하고 지방의 경쟁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것만으로 한국 사회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교육문제와 입시문제를 해결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는 특정 분야나 요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시선으로 접근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말로만 "교육은 100년지 대계"라고 하지 말고,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회전체의 문제로 차근차근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사회전체에 커다란 의제를 던져야 때라고 본다. 매년 입시전쟁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81분마다 죽어가는 우리 어른들을 위해서.

입시전쟁 잔혹사 - 8점
강준만 지음/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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