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28일 월요일

한국 보수의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한 .........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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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루그먼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그냥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라는 것이 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다. 처음 책을 펼쳤을 제일 먼저보는 것은 저자의 프로필이다. 그것을 통해서 저자의 성향이나 지나간 과거를 조금이나마 유추하면서 책을 읽게 된다. 가끔 그것이 저자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 독서를 방해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저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눈에 띠는 약력 중에 레이건 정부시절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그가 미국의 대표적인 주류 경제학자인 알았다. 자유주의와 세계화를 주장하는 우파학자인줄 알았다. 그런데 페이지 페이지씩 읽어 갈수록 저자를 약력만으로 평가했던 생각을 송두리 뒤집어 버린다. 그는 민주당을 옹호하면서 공화당에게는 거침없는 비판의 칼날을 가한다. 난도질이라고 정도로 100여년의 미국역사의 흐름을 이야기하면서 공화당의 정책에 지금의 흐름에 대한 비판은 거침이 없다.  그러면서 분배정책에 대한 강력한 정치적 힘이 필요함은 물론이고, 지금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의료와 의료보험의 민영화 같은, 미국 내부의 의료보험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는 클린턴 행정부 도입에 실패한 의료보험제도를 의회와 정부를 모두 장악하게 민주당의 번째로 추진해야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책이 2mb정부가 추진하려 했던 의료 민영화(명확하게 포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2mb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보수집단은 결코 포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여론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대한 문제만 엿볼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보수집단(개인적으로 책에서 말하는 보수집단은 보통 말하는 보수가 아니라 꼴통보수라고 생각한다. 번역자도 옮긴이의 말을 통해서 번역은 보수집단이나 보수주의라고 했지만, 꼴보수, 수구 보수에 가깝다고 했다.) 태동부터 시작해서 그들이 어떻게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지에 대한 과정이 심도있게 분석되어 있다. 특히 보수집단이 차근차근 정치적 주류가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결실이 레이건과 부시 부자에서 나타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치 과정이 짧게는 지난 10(흔히 말하는 좌파정부)시절에 행해졌던 한국 꼴통보수들의 행태와 거의 판박이를 이룬다. 미국의 경우에 꼴통보수들이 정치를 장악하는데 수십년이 걸렸지만 한국의 경우는 기간이 너무 짧다. 압축성장을 해왔던 한국경제를 닮아서 인지 아니면 한국정치 특유의 역동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닮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보다 무서운 것은 미국의 보수정권과 행태와 똑같은 정책을 펼치려는 2mb정권이 국정방향이다.


  크루그먼은 양극화를 발생시키는 것은 경제자유의 정도나 개방의 정도가 아니라 정치적 양극화가 소득격차의 확대를 불러왔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 뉴딜정책으로 계층간의 차이를 좁히는 대압착의 시대에 들어섰다. 과정을 통해서 미국의 분배구조는 건전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1970년대 뉴딜정책을 무산시키려는 급진적인 우파(꼴통보수)들이 공화당을 장악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노조를 무력화 시켰으며, 치솟는 경영진에게 가해지던 정치적, 사회적 장애물도 제거했으며, 부자에 대한 세금도 삭감했다고 한다. 특히 우파들이 본격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레이건에 대해서도 그는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문화와 성에 대한 불안감에 호소하고, 공산정권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며, 무엇보다 민권운동과 결과에 대한 백인들의 반발심을 암암리에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레이건이 본격적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던 시기가 히피문화가 주류를 이루던 때이고,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라는 점과 여전히 흑인 대한 차별의식이 많이 남아있던 시대라는 점에서 본다면 크루그먼의 진단은 설득력을 가진다. 뿐만 아니라 레이건 했던 선동적인 거짓말은 "연금을 받는 부유한 부인" 이야기는 분배에 대한 반감을 적극적으로 자극했다는 것이다. 명확한 근거를 대지 못하면서도 이런 선동적인 거짓이 먹혔던 미국사회나 노무현 정권의 분배정책이 하위계층에게 돈을 퍼준다고 한나라당의 선동이 먹히는 우리사회는 차이는 없어 보인다. 물론 앞에서 이야기했던 다른 원인도 한국에 그대로 대입해 보면 똑같은 형태를 띤다. 히피문화에 대한 반감은 권위를 거부하는 신세대와 386세대들의 문화에 대한 반감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은 북한에 대한 두려움으로, 민권운동에 대한 백인들의 반발은 인권운동에 대한 기성세대의 반발로.


 최근의 한국 꼴통보수들이 감세정책을 들고 나왔다. 명목은 경제 활성화라는 이름으로. 그것 또한 미국의 꼴통보수 정권에 의해서 시행되었던 정책으로 한국은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려 한다. 감세에 대해서는 경제학 서적에서도 경제활성화를 위한 방편으로 소개하고 있기는 하다. 그것을 공급경제이론이라고 하는데 크루그먼은 "공급경제이론은 특별한 근거도 없이 세금 감면으로 경제를 활성화할 있다고 주장했지만 보수주의 경제학자들을 비롯해 경제학의 여러 분야에서는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연구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다. 결국에 이런 감세정책은 양극화를 확대활 뿐이라는 것이다. 전형적인 대중인기영합주의 정책일 뿐이고, 그것은 꼴통보수들의 핵심세력 경제계와 부유층을 위한 정책일 뿐인 것이다. 이렇게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미국 대신 한국을 넣으면 그렇게 유사할 수가 없다. 한국의 꼴통보수라는 인간들의 기본 지지기반이나 이론적 기반이 미국 꼴통보수라는데서 그런 이유를 찾을 있겠지만, 미국이 이미 실패하거나 명확한 성과를 이루지 못한 것들이 한국에서는 대단한 성과를 정책인 처럼 선전되고 있고, 그것이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통하는 정책이라는게 안타깝기만 하다.


 미국에서는 꼴통보수들의 정책적 실패와 친부자 정책으로 대중들의 지지를 잃어가면서도 선거에서 성공할 있었던 이유가 나온다. 앞에서도 나온 이야기기는 하지만 교묘하게 인종갈등을 유도한 것이다. 특히 남북전쟁 당시의 앙금이 남아 있는 남부지방에서 인종갈등을 이용함으로써 민주당의 지지기반을 무력화 시켰다고 한다. 지역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한국의 정치꾼들이랑 겹쳐 보이는 이야기다. 아니라 가장 민주적인 나라라고 생각했던 미국에서 투표를 방해는 치졸한 행태를 꼴통보수들이 보여준다는 것에 놀랐다. 선거인 명부에서 민주당 성향이 강한 흑인이나 이민자들을 누락시킴으로써 투표를 방해했다. 뉴욕타임스' '유권자들의 대량 숙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크루그먼은 꼴통보수들의 이러한 정책이 힘을 잃고 있다고 한다. 이민자들의 증가로 인해서 백인 유권자의 수가 줄었고, 백인들 중에서도 인종차별주의자가 줄었다는 것이다.


 다시 양극화의 문제로 돌아와서 크루그먼은 "미국의 극심한 불평등은 대부분의 가정의 구매력을 낮추는 이상으로 우리 사회에 심각한 부담을 지우고 있다. 그리고 불평등이 우리에게 끼치는 다른 악영향도 있다. 우리의 정치를 부패시키는 것이다."라고 한다. 양극화의 강력한 해소를 위해서 정치적 행위가 필요하며, 의회와 정부를 동시에 장악하게 민주당에게 양극화 해소를 위한 정치적 행위 주문한다. 시작이자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의료보험제도"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지금같이 역주행하고 있는 2mb정부와 꼴통보수들의 몰락이 미국에서 처럼 다음선거에서 다가올가? 크루그먼이 예상하는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한국은 여전히 반공사상과 북한 정권에 대한 반발, 맹목적인 지역주의 그리고 경제발전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 살아 있는 상태여서, 꼴통보수들이 전략적으로 이용할 것들이 넘치고 넘치는 상황이다. 한국의 정치적 역학구조는 미국보다 복잡해 보인다. 과연 미국 처럼 꼴통보수가 쉽게 몰락할 것인지 의문이 든다. 특히 진보주의가 공산주의라는 잘못된 생각이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과정은 길고 고단해 보인다. "진보주의자들은 미국의 민주주의와 법치를 존중하기 원한다. 보수주의자란 이들은 대통령의 독재 권력을 원하고, 없는 사람들을 감금하고 고문을 가하는 부시행정부에 박수갈채를 보냈다."라는 크루그먼의 말로 진보와 보수의 차이를 대신한다면 조금은 선동적일까? 내가 느끼는 한국 사회의 진보와 보수는 크루그먼의 의견과 다르지 않은데…....  크루그먼은 마지막 부분에 진보주의와 꼴통보수에 대해서 순화적으로 다시 정의하고 있다. "진보주의는 복지국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주의는 민주주의와 법치도 추구한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피부색이나 종교, 성적 취향이 다른 시민들에게 똑같은 권리를 부여하기 꺼리는 일부 시민들을 이용하는 정치적 전략을 핵심으로 한다."라고.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 10점
폴 크루그먼 지음, 예상환 외 옮김/현대경제연구원BOOKS

2008년 7월 27일 일요일

남성들이여, 배워라 노력하라 변화하라. "왜 여자 아이들이 더 공부를 잘할까?"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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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안 300페이지 이상의 두꺼운 책에 이해도 쉽지 않은 책을 읽느라 골이 지끈거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작정 쉬운 책에 두께가 얇은 책을 읽겠다는 생각에 책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책보다가 제목부터 눈에 확들어온다. 최근에 남녀공학 학교에서 남학생들의 성적이 하락하고 여학생들의 성적이 높아지면서 남학생교실과 여학생교실을 분리하거나 처음부터 남학생학교나 여학생학교로 분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에서 본다면 원인을 분석한 듯한 책제목은 나의 관심을 끈다. 두께도 200 페이지라 그냥 쉽게 읽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들었다.


 얼마 전까지도 알파걸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의 약진에 대해서 많은 사회적 이슈를 유발했었다. 여학생들에 눌려서 남학생들이 기를 펴지 못한다는 학부모들의 한탄까지 나올 정도니, 남성중심의 한국사회가 참으로 많이 급변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차별 받고 있음을 물론이고 비정규직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또한 한국의 상황이다. 아직은 남녀 평등의 사회로 가야 길이 멀기는 하지만 알파걸의 출현으로 사회변화의 가속도를 붙이고 있는 상황이다.


 여전히 남성중심주의 사고가 남아있는 어머니들과 남자들은 이런 상황을 인정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명확하게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들의 아들들이 또는 자기가 피해를 받고 있거나 여성들에게 눌려 살고 있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그런 피해망상을 해소하려는 다양한 꼼수를 생각하거나 공격대상을 물색한다. 아들들의 어머니들이 생각한 꼼수는 남녀공학학교를 다니는 아들들을 남학교로 전학시키거나 남녀분반을 요구한다. 그러면 아들들이 알파 걸들과 대등하게 경쟁할 있는 처럼 믿는다. 자신들의 치맛바람이 만들어낸 우리 속이 그들을 나약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남성중심주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어떤가? 자신과 이전의 남성중심주의사회가 만들어 놓은 유리천창이라는 차별의 장벽은 인식하지도 못한 자신들이 피해를 당한 것처럼 차별을 받는 것처럼 피해망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여성들에게 절대적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높여서 말한다. '여성들도 군대가라' 말을 서슴없이 한다. 군대라는 것이 여성을 억압하고 정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남성들의 도구였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


 남성중심주의 사고에 익숙한 이들은 지금의 결과를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쉽게 승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파걸로부터 배워야 것들을 모조리 무시하고 단지 그들은 최근에 만들어진 여성중심의 정책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조차 하지 못한다. 이미 나온 결과는 단지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 페미니스트들이 만들어낸 정치적 행위의 산물로 취급할 뿐이다.


 하지만 알파걸들은 단순히 여성들이 정치적 행위로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니다. 단지 억압받았던 여성들이 자신을 옭매던 껍질을 깨기 시작하면서 그들 스스로가 이뤄낸 결과물들이다.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억압받고 차별받던 그들이 그런 차별의 껍질들을 깨고 자신의 자리를 찾은 뿐이다. 책에서는 그것을 "무의식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열등감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자신감이 살아나게 된다. 변화의 시작은 바로 여학생들의 내면에 있었다. 여학생들의 심리에 커다란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라고 분석한다. 여성들이 남성보다 못했던 것은 자신감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자신감의 발현은 과거에 남성의 역할과 여성의 역할의 구분이 무너지면서라고 한다. 가정일은 여성의 것이고, 바깥일은 남성의 것이라는 구분은 여성의 잠재적 능력을 억압하고 있음을 물론이고 남성의 잠재적 능력을 억압하고 있었다. 이것에 대해 여성개발원의 안상수 박사는 성차별적 고정관념을 갖게 되면 사고의 유연성이 떨어지고 그만큼 경쟁력도 떨어진다고 말한 것을 보면 있다. 이를 뒷받침 하는 듯한 재미있는 사례가 있는데, 일본의 경우에는 알파걸이라는 말이 없다는 것이다. 통계적으로도 여성의 약진이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은 아직도 성역활의 구분이 강한 나라라는 것이 그것을 뒷받침한다고 한다.


 그런데 성역활의 구분이 약해진 지금의 세상에서 남성보다 여성이 약진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서 "남자 아이들의 경우 고정관념 분류에 따라, 양성성이냐 여성성이냐 남성성 혹은 미분화인가에 따라 성취동기 차이가 크게 없었지만 여자 아이들의 경우 양성성인 아이들이 남성, 여성, 미분화 여자 아이들에 비해 성취동기가 높았다. 뿐만 아니라 양성성인 여자 아이들이 전체 남자 아이들에 비해서도 성취동기가 높게 나타났다."라고 한다.


 그것 뿐만 아니라, 여성의 뇌와 남성의 뇌가 차이가 있는데, 여성의 뇌가 멀티테스킹에 능하다는 것이다. 시간과 속도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멀티테스킹을 필수적인 능력이 되고 있는데, 남성은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서 에드워드 할로웰에 의하면 "여자들은 멀티태스킹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수다로 푸는 경향이 있으며, 수다의 대상이 되는 동료나 친구들에게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는지 아주 표현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남자들은 멀티태스킹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과잉 공격으로 대처하는 경향이 강하며, 이는 최악의 대처법이라고 그는 단언한다. 업무에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대처한다든지 전화에다 핏대를 올린다거나 소위 '경적으로 빵빵 우려대는' 짓을 해서 일을 망치기 쉽다" 것이다.


 반면에 루벤 구어 박사는 자신의 연구에서 남자들과 여자들이 과제에 집중할 두뇌가 활성화되는 패턴이 다른 것을 발견했다. 과제가 어려워질수록 남자들은 두뇌의 부분만 집중적으로 활성화되는데 비해 여자들은 두뇌의 여러 부분이 동시에 활성화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를 근거로 루벤 구어 박사는 여자들이 과제에 몰두할 여러 가지 요소를 한꺼번에 고려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추정했다. 결국에 수렵과 농경시대에는 남성의 능력이나 기질이 각광받는 시대였다면 지금은 여성의 능력이나 기질이 각광받는 시대인 것이다.


 결국에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로 것은 "남성은 남자답게 여성은 여성답게"라는 문구가 아니라 성적기질을 골고루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서 이미 많은 인재관련 전문가들은 양성성을 키워라고 주문해왔다. 그런 뜻에서 책의 저자도 비슷한 주문과 방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말한다. "아버지들이여, 배워라 노력하라 변화하라."라고. 방법으로 "공감능력을 배워라. 상대방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읽는 연습을 해라. 끊임없이, 사소한 것이라도 대화를 시도하라.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라. 때로는 눈물이 약이 된다고 믿어라. 부엌 친화적인 남자가 되라."라고 한다.


 이젠 남성이 가졌던 과거의 영광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근력과 체격으로 여성을 억압하던 시대는 완전히 사라졌다. 어떤 성이 어떤 성을 당연히 이겨야 하는 대결의 시대도 사라졌다. 이제 필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이해하고 닮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경쟁이 아니라 같이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것이다.


Ps> 1) 자녀들의 양성성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버지라고 한다. 아버지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가사분담을 하느냐가 많은 영향을 준다고 한다. 여성보다 세상의 변화에 느린 남성 그리고 아버지들은 반성합시다.


 2) 책을 통해서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겉으로는 척하는 남성들이 실제로는 여성보다 약하다고 한다. 연구에 의하면 남성이 공포나 불쾌한 상황에서 강렬한 두뇌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유는 남자들은 심하게 불쾌한 자극에 대해 '회피 또는 공격' 두가지로만 반응하도록 설계되었을 수도 있다. 반면에 여성들은 그런 상황을 충분히 즐길 수도 있는 것이다.

 3) 참고로 나는 페미스트도 아닌 그냥 평범한 남자다. 

왜 여자 아이들이 더 공부를 잘할까? - 10점
유진규 지음/디자인하우스

2008년 7월 25일 금요일

몰락한 지식인과 대안에 관한 "지식인의 죽음"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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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언론에서는 한국사회에는 원로가 없다고 했다. 진보와 보수를 모두 아우르며 존경을 받는 그런 인물이 없다는 말인데, 년이 지난 지금은 그런 원로가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치적 이념이나 성향을 떠나서 대중적 존경을 받을 있는 인물이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강한 신념과 철학으로 어딘가의 대표 또는 어느 진영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지만, 그것이 이념과 성향에 상관없는 이들에게 받아들이기는 힘드나 보다. 많은 전직 대통령들이 퇴임과 동시에 정치적 성향을 배제하고 시민사회를 위한 봉사를 했더라면 아마도 그들은 지금 한국 사회의 원로가 되었을 텐데…... 권력을 달콤함에 중독되어 버려서인지 퇴임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 한다. 고어 부통령처럼 환경이나 다른 시민사회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정치권과 멀리했다면 우리의 전임 대통령들 중에도 대중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사회의 원로로 인정 받았을 인물들이 있었을 텐데……


 이번에 누군가 우리사회의 지식인들이 죽었다고 한다. 돈과 권력에 결탁하면서 지식인의 사명이나 소명은 엿으로 바꿔 먹으시고 박쥐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돈과 권력이 철학이요 이념이자 신념이다. 그것만 있으면 변심에 대한 지식인의 양심은 보상받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박쥐 같은 군상들은 우리 사회의 일부의 지식인들이다. 민주화 이전에 지식인을 탄압하고 억압하고 검열했던 권력과 정권에 대해서 비판의 날을 서슴없이 날리던 이들이 민주화 이후에 권력 뿐만 아니라 돈에 굴복해서 침묵하는 다수가 되어버린 것이 서글프다. 권력 위에 있는 삼성이라는 재벌의 불법과 비리에 비판하는 지식인들의 수는 점점 들어가고 오히려 그들을 옹호하는 지식인들이 활개치는 현상은 지식인들의 죽음을 보여주는 현상이 아닐까?


 지식인들의 죽음에 대한 경향신문의 심층취재로 탄생한 책은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현주소에 대한 적나라한 보고서다. 특히 민주화 이후 지금의 지식인들의 정의 or 위치에 대해서 "지식인은 이제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 되었다. 지식인은 비판적 이성이 거세된 전문가로 대체되고 있다. 권력에 위험하지 않은 지식인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키워지고 있다."라고 말한다. 경제라는 것이 모든 국민의 관심사이자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린 서글픔이 지식인들에게서도 묻어나고 있는 것이다.


 뒷장에서 '지식인의 죽음' 부른 3가지 요인을 제시하고 있는데 '지식인의 죽음' 부른 요인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자본 종속과 시장 논리 지배' '서구 학문 중심주의 의존'라고 한다. 미국 중심의 학연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는데 학문의 획일화를 불러일으킴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학연이라는 지독한 카르텔의 장벽으로 장하준교수 같은 사람이 한국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영국에서 활동하는 현실을 개탄하게 만든다.


  뿐인가 정치와 돈가 만들어는 막강한 파워와 거기에 굴복하거나 결탁하는 지식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우리사회에 지식인들이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지성의 전당이던 대학이 언제부터인가 직업훈련소가 되어버리고, 거대자본들은 대학의 편의시설에 하나 잠입하면서 비판적인 지성인을 만들고 탄생시켜야 곳에서 돈과 권력에 복종하고 순응하는 것을 가르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지식인들은 돈과 권력에 결탁하거나 스스로 몰락했다. 그들에게 지식이란 인류와 세상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결국에 자신의 입신과 영달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사명인 '비판' 포기한 스스로가 '비판'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을 대신하는 다중지성으로부터.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많들어낸 다중지성이 그들을 비판하고 그들을 대체하고 있다. 책에서 다중지성을 지식인들의 대안으로 꼽고 있다. 문제는 다중지성이 과연 얼마만큼 신뢰성과 권위를 확보할 있을까? 사람이 가진 권위나 지위만으로 많은 대중들은 그를 신뢰하게 되는데, 지식인은 죽었다고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학문적 권위나 지위는 죽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다중지성과 몰락한 지식인을 같이 놓고 봤을 여전히 몰락한 지식인이 신뢰를 받을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대중들의 비판의식이 아닐까? 비판은 지식인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가능한 것이고 그것이 모임으로서 다중지성은 몰락한 지식인들을 대체할 강력한 힘과 신뢰를 갖지 않을까?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10점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후마니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