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22일 수요일

비밀 같기도 하고, 비밀이 아닌 것 같기도 한......"The secret"을 읽고.....

 
시크릿 - 6점
론다 번 지음, 김우열 옮김/살림Biz


 
표지의 문구부터 거창하다. " 세기 동안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이라고…… 얼마나 대단한 비밀이게 이런 문구를 삽입해가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자 하는지 궁금했다. 얼마나 대단한 자신감이기에 이런 문구를 함부로 가져다 있는지 궁금했다. 이런 문구에 속아서 책을 읽은 후회했던 책들이 많지만, 여전히 이런 문구에 혹해서 책을 읽는다.


 개그 콘서트의 코너 중에 "같기도"라는 것이 있다. 어떤 동작이나 인물을 흉내내면서도 조금씩 원래의 형태를 빗겨나게 표현하면서, "이건 ~같으면서도, ~ 아녀"라는 말과 요란한 몸짓으로 웃음을 선사하는 코너다. 책을 읽은 "같기도" 생각났다. "같기도" 표현으로 하자면 책의 비밀은 비밀이면서도 비밀이 아니다. "끌어 당김 법칙"이라는 새로운 법칙을 만들기는 했지만 법칙에 포함되어 있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이미 다른 책에서 소개 되어진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많은 자기계발도서들의 집합체라고 할까? 그래서 나에게는 책에서 말하는 비밀이 비밀이기도 하고, 비밀이 아니기도 하다.


 우선 끌어 당김 법칙의 번째는 생각이다. 머리 속에 자신이 원하는 것이나 목표로 하는 것을 생각함으로써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우주의 에너지가 끌어당겨진다는 식으로 얘기하지만, 그건 허황된 면이 있다. 식으로 해석 하지면, 생각은 "목표"이라는 단어로 바꿔 생각 있다. 목표를 반복적으로 생각함으로써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계획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책의 내용 중에는 행동이나 계획할 없는 것들이 실현되고 이루어진 사례들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생각을 한다는 것은 목적의식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고 그곳에 자신의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기에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못하거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동기부여의 씨앗이 밖에 없다. 매일 어떤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목표" 매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과정인 처럼.


  번째는 믿음이다. 효과 없는 약을 특효 약이라고 믿게 해서 환자에게 복용시켰는데 환자의 병이 호전되었다는 "플라시보 효과"처럼, 꿈을 이룰 있다고 목표를 달성할 있다고 믿는 것은 과정에서의 역경과 어려움을 이겨내는 원동력일 뿐만 아니라 에너지다. 연료가 없는 버스가 목적지로 가지 못하는 처럼. 그리고 믿음은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긍정적인 생각을 지속적으로 부여한다. 부정적인 생각이 목표를 불명확하게 하고 자신감을 상실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생각으로 자신의 목표를 회의적으로 보거나 일찍이 포기하기에 비밀의 힘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생각 목표는 많이 잡지만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들의 많은 것들은 부정적인 생각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은 에너지인 동시에 목표를 지켜내는 방패인 것이다.


  번째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맥스웰 몰츠의 "성공의 법칙"이라는 책에 보면 이미지 트레이닝이 나오는데 그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책에서 활용방법은 소망을 소망했던 것을 그리는 것이고 이미지 트레이닝은 어떤 행동이나 상황에 대해서 머리 속으로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상상하는 과정이다. 많은 운동선수들이 이미지 트레이닝을 훈련으로 활용하고 효과가 긍정적인 처럼 책에서 말하는 그림 그리기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있다. 긍정적으로 상황을 그림으로써 목표를 명확하게 하고 긍정적인 믿음과 생각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번째는 감사하기다. 번째와 번째는 번째와 번째 것들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세상을 보는 긍정적인 마음을 만들어내는 가장 좋은 도구이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생겨나는 긍정적인 마음과 생각은 끌어당김 법칙의 가장 적인 부정적인 생각을 억제하면서 긍정적인 생각과 믿을 강화한다.


 끌어당김의 법칙이란 간단하다. 생각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믿는 만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법칙이고 법칙의 내용도 생각, 믿음, 그림 그리기, 감사하기, 같은 누구나 쉽게 실천할 있는 것이기에 비밀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물과 공기가 인간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되는 보물이지만 고마움이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처럼, 비밀도 너무 쉽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서 우리가 무시했지 않았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비밀같기도 하고 비밀이 아니기도 하다고 말했지만, 너무 당연한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는 것으로 재미있고 즐거웠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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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8일 수요일

슬프디 슬픈 영화 "사랑방 선수와 어머니"......

  어제 시사회를 통해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슬프다는 생각만 드는 영화다.

코메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는 적고, 영화의 마지막 클라이막스에서 주는 감동은 전혀 없다. 차라리 영화 엔딩 크레딧과 함께 나오는 NG장면들이 웃기다. 웃음과 감동을 제대로 섞지도 못하고 장르 타겟을 잡지 못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런 영화가 되어 버렸다. "색즉시공"이나 "두사부일체"같이 초반에 시종일관 막가파식 웃음을 관객에게 주다가, 뜬금없는 감동의 장면을 줬다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영화가 되었을 텐데……. 공식을 따르려고 노력은 했지만, 결과는 미약하다.


정준호의 연기는 그가 출연해 보여줬던 여러 코메디 연기 이상의 것은 없다. 기존의 연기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너무 익숙하고 너무 식상하다. 차라리 그가 영화 "공공의 2"에서 보여줬던 악역연기 같이, 이제는 코메디를 벗어나 다양한 연기를 시도해야 때라는 생각이 든다. 김원희의 연기도 정준호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녀가 "헤이헤이"라는 오락프로그램에서 보여주던 정형화된 코믹연기를 답습한다. 그러다 영화의 마지막에 보여주는 진지한 연기 모습은 이질감을 더할 뿐이다.


 그렇다고 스토리가 신선해서 색다른 묘미를 전해 준다면 모를까? 누구나 뻔히 아는 이야기를 답습한다. 헐리우드도 소재고갈에 시달리는 마당에 한국영화계도 별다르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너무나 뻔한 이야기는 웃기지도 감동적이지도 않는 상황에서 나에게 실망감으로 다가온다.


 올해 한국 영화 중에서 " 말리는 결혼"보다 수준 낮은 작품의 탄생이다. 그래서 슬프디 슬프다. 영화 제작편수와 투자자본이 줄어들어 힘들다는 충무로에서 이런 영화를 답습하니 스스로 늪으로 몰아 넣는 같아 슬프다. 시나리오의 참신함도 연출의 기발함도 영상의 볼거리도 없으니, 영화에 참여했던 많은 스텝들의 땀과 열정이 작품에 묻혀버려 슬프다. 다른 사람 만하는 한국 영화계의 치부를 완벽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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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6일 월요일

영화 "디워(D-war)"에 대한 단상......

 인터넷 상에 "디워(D-war)"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애국주의 국수주의 마케팅이라고 폄하하는 언론과 영화평론가들 그리고 그들에 동조하는 네티즌과 "디워(D-war)"라는 영화 심형래를 옹호하는 네티즌들과 치열한 논쟁 때문이다.

 사실 나도 "디워(D-war)"의 제작 소식을 접했을 때 보다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 팬카페에 가입해서 꾸준히 "디워"의 제작 과정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심형래 감독을 응원해 왔던 사람이다. 그 카페사람과 심형래의 영화와 그를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형래가 보여주는 열정과 도전정신에 감동해서 응원하는 것 처럼, 나도 심형래는 인물의 열정과 도전정신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영화를 꼭봐야 한다는 그런 생각은 없다. 단지 그가 포기하지 않고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결과물보다 난 심형래가 걸어왔고 걸어가려는 길을 보는 것이 더 즐겁다.그래서 아직 "디워"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모두 가입하고 있는 팬카페와 다른 토론 사이트들의 글들을 보면서 우려할 수 밖에 없다. 지금의 현상을 보면서 팬들의 맹목적인 추종은 황우석 사태의 묻지마식 믿음이 생각나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남 잘되는 것을 견딜수 없어 어떻게든 깍아내리려는 이중성을 보게 된다.

 개봉하기 전부터 디워라는 영화가 영화적 작품성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은 이미 언론을 통해서 잘 알려져있었다. 디워는 원래부터 흥행을 목적으로하는 오락영화였고 주 타겟이 어린 학생들과 청소년을 비롯한 가족관람객을 타겟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심형래감독은 이미 많은 언론을 통해서 자신이 추구하는 영화관이 무엇인지 확고하게 밝힌 상태일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들어 왔던 작품들은 모두 그 영화관에 충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형래감독의 이런 영화관과 철학을 알고 있는 평론가나 기자들은 그런 과점으로 영화를 평가하기 때문에 우호적일 수 있는 것이고, 반대편에서 있는 소위 평론가나 기자들 그리고 영화에 대해 높은 철학적 사고를 가진 이들에게는 이 작품의 평점은 낮을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각기 다른 과점에 대해서 관대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게 된다. 그것이 팬들의 맹목적인 추종으로 인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전문가들이 매기는 평점과 관객의 시각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의 평점이나 의견은 영화를 선택하는 참고 자료일 뿐인데, 자신들의 맘에 들지 않는다고 기자들에 대한 비난하는 리플이나 글은 의식의 후진성을 너무 잘 보여준다.
국민학교 때 웅변을 배우면서 외웠던 원고 중에 "나를 착하다고 만 하는 사람보다 나를 나쁘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라는 문구가 기억이 난다. 근거도 없이 깍아내리기 위한 맹목적인 비난이라면 그것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건전한 비판은 내가 발전하기 위한 밑거름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지금의 작태는 건전한 비판에 대해서 마저 재갈을 물리는 격이다. 오히려 이런 팬들의 맹목적인 추종과 사랑이 심형래감독의 앞으로 행보에 장애만 될 뿐이다. 건전한 비판을 막아버리고 오만과 독선에 또는 매너리즘에 빠져들게 만들 뿐이다.

 편을 갈라 싸우고 서로를 구분하고, 모든 것을 흑백논리로 보고 양쪽을 비난하면 양비론이라며 또 비난하고, 이것은 우리 사회의 단편이다. 다양한 목소리와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옳다고 생각하면 수용하는 것이 성숙한 인간이고 사회다. 말로만 국제화 시대 글로벌 시대라고 외치지 말고 우리 사회 안에 글로벌과 국제화 즉 다양한 의견과 사상 그리고 생각에 대한 포용을 시작했으면 한다. 나에게서 거리를 두고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 볼수 있다면 이런 다양한 의견에 대해서도 포용하는 사회가 될 수 있다. 가끔은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봤으면 한다.

 ps> 화려한 휴가와 디워를 가지고 대결하는 팬들이 있다. 디워가 개봉하기 전 팬카페에서 디워의 흥행에 영향을 줄 다른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화려한 휴가"가 "디워"의 흥행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지만, 난 관객의 타겟이 다른 두 영화는 작품의 완성도만 보장된다면 시너지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말했다. 화려한 휴가는 30대 이상의 관객에게 디워는 초등학생과 청소년들을 포함한 가족관객에게 어필을 하기 때문에 두 영화는 서로 흥행에 영향을 적게 준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다양한 관객층을 극장으로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어떤 기사를 보니 두 영화가 같이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는 기사가 떴다.  두 영화가 올해 침체했던 한국영화에 어떤 활력을 줄지 무척 기대된다.

2007년 8월 5일 일요일

"입시 공화국의 종말"을 읽고 밑줄~!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사라진 마을은 출산율 저하로 또는 이농으로 걱정하면서, 아이들의 웃음이 사라진 놀이터는 걱정하지 않는가?

 

 2007 4 중순 A과학고를 방문한 KAIST 서남표 총장은 교장으로부터 학교에 대한 소개를 받고서는 한숨을 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건 '야만'이야. '집단 수용소', 학교가 아니야." 과학고 교장은 다음과 같이 자랑했다고 한다. "학생들이 오전 5시부터 12시까지 수업과 자습을  한다. 이를 위해 기숙사 문을 자정까지 잠가 놓는다." 총장은 비단 A 과학고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과학고와 특목고에서 같은 현상을 목격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 학교는 기회주의, 출세주의를 가르치는 동시에 수많은 아이들을 폭력자로 만든다. 피해자와 가해자들의 망가진 인생들에 대한 책임은, 학교를 '우승열패' 지옥으로 만든 학벌 카스트 제도와 제도의 폐단을 알면서도 혁파시키려 하지 않는 우리들 모두 같이 지게 었다.

 

 비유기성, 그것도 광범위하고 철저한 비유기성을 통해 공교육의 차원에서 고등학교 교육과 대학 교육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리는 것이 그들이 일차적으로 노리는 것이다. 끊어진 연결고리를 학생들 각자가 알아서 연결시키도록 유도한다. 그런데 어떻게 학생들이 스스로 이것을 있겠는가? 그것은 결국 사교육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사교육 시장의 확대와 팽창은 불을 보듯 뻔하다. 고등학생들뿐만 아니라 중학생들과 초등학생들도 논술학원을 다닌다. 논술 고사의 도입과 더불어 촉발된 사교육시장의 급격한 팽창은 각종 통계자료에 의해 명백히 드러난다.

 

 세계적인 명문 대학들이 본고사를 대신 복잡한 다면평가를 통해서 학생들을 선발하는 이유는 " 차례 시험으로 학생의 잠재력을 평가할 없으며 창의적이고 다양한 대학 문화를 만들 없다" 믿기 때문이다.

 

 개인의 인권과 인격이 최소한이라도 보장되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들에게 끝없는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물질적 고통을 주고 사회 전체의 발전을 가로막을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과 사회에 아무런 미래도 보장할 없을 것이다.

 

 한국 ,,고교생의 학력은 OECD 회원국의 국제학업성취도비교와 국제수학과학능력평가에서 영역마다 1~4위를 차지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다.

 

 한국의 교육은 '', 자아의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사유와 행위를 가르치지 않고, '' '', 타자를 구분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자아는 타자와 사회를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국가를 위해 왜소화하고 부정하며 무화시켜야 무엇으로 가르친다. 개인은 언제나 초개인적 사회 집단과 국가에 자리를 주고 그것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집단주의와 국가주의가 한국의 교육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이념이다. 이러한 집단주의적, 국가주의적 이념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국기에 대한 맹세'이다. 개인에게는 그저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 요구될 뿐이다.

 

 ,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자아는 타자로부터 거리를 두는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거리를 있는 정신적 능력을 소유해야 한다. 나는 자신을 마치 남처럼 바라볼 있어야 한다. 내가 자신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며 자신을 객체화시킬 있어야 한다. 이처럼 개인이 가지 정신적 능력을 겸비할 비로소 그는 자의식을 소유한 존재라고 표현된다.

 

 한국의 엘리트는 어떻게 이른바 비엘리트와 구분되는가? 그것은 너무나 간단하다. 대학의 서열이다. 대학 서열 피라미드에서 상층부를 차지하는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엘리트이다. 그들 역시 이른바 비엘리트들과 마찬가지로 없이 뛰는 조그만 선수들이다. 다만 그들은 한국 사회가 강요하는 감옥의 논리에 보다 충실한 대가로 정답 찾기에서 승리한 사람들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들은 남보다 실수를 덜한 대가로 명문대에 합격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아니 완벽하게 몰주체화되고 몰개체화된 인격체들이다.

 

 이미 서열 관계가 정해진 관계로 대학 사이에 선의의 경쟁도 존재하지 않는다. 경쟁은 이미 대학 입시에서 끝난다. 제대로 사회라면, 그리고 제대로 교육이라면 경쟁은 , , 고등학교가 아니라 대학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어떻게 것이 경쟁을 하지 말아야 시기에 경쟁을, 그것도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무한 경쟁을 강요하고, 진정으로 경쟁이 시작되어야 하는 시기에 경쟁이 끝난다. 자연히 대학의 교육은 대충대충 이루어진다. 모든 과목이 개론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며 수업 진행도 산만하고 엉성하다. 전문성의 함양을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기와 진배없다.

 

 한국 사회는 이제 "국가의 개인들"에서 "개인들의 국가"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국가나 사회를 중심으로 개인을 바라보는 관점을 버리고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개인들이 상호작용을 통해서 그리고 상호작용을 위해서 구성하는 단위로 바라보는 관점을 취해야 한다. 국가나 사회가 해야 일은 교육을 통해 개인이 타고 다양한 관심이나 개성과 특성 적성을 마음껏 발휘하고 발전시키도록 '산파' 역할을 하는 것이고, 다채로운 능력과 역량을 갖춘 개인들을 조화롭게 조직하는 것이다. 바로 이들이 '인적 자원' 되는 것이고 '인재' 되는 거이며, 국제 경쟁력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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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이 삶의 전부인 학부모와 사람들을 위한 책"입시 공화국의 종말"을 읽고.....

입시 공화국의 종말 - 10점
김덕영 지음/인물과사상사

 

 덴마크의 대학에서 물리학 시험 답안을 두고 교수와 학생 간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기압계로 고층 건물의 높이를 재는 방법을 묻는 문제에 학생이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기압계에 줄을 매달아 아래로 늘어뜨린 길이를 재면 된다" 답을 것이다. 중재를 맡은 다른 교수는 학생에게 "6분을 테니 물리학 지식을 이용한 답을 내라"라고 했다. 학생이 써낸 답은 기압계를 가지고 옥상에 올라가 아래로 떨어뜨린 낙하 시간을 "낙하거리=1/2(중력가속도X낙하 시간의 제곱)" 공식에 따라 높이를 구하는 것이다. 처음에 0점을 주장한 교수는 답에 높은 점수를 줬다. 중재를 맡은 교수는 다른 답을 생각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러자 학생은 "옥상에서 바닥에 닿도록 줄에 기압계를 추처럼 매달아 흔들어 진동주기를 통해 건물 높이를 있다." 대여섯가지 답을 제시해 교수를 놀라게 했다. 원래 문제의 출제 의도는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압이 낮아지는 원리를 이용, 기압계로 지면과 건물 옥상의 기압차를 측정해 건물의 높이를 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학생은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같은 답만을 가르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학생이 1922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닐스 보어이다. 보어가 당시 생각해낸 중에 스스로 가장 만족한 것은 "기압계를 건물 관리인에게 선물로 주고 설계도를 얻는다"였다.

    - '닐스 보어의 기발한 시험 답안','데일리포스트' 2007.03.25,  "입시공화국의 종말" 중에서 발췌


 위의 이야기를 글로 보거나 다른 이로부터 전해 들었다면 "정말 기발하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문제 출제했던 교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십중팔구는 속의 교수와 똑같은 반응으로 답안에 대해서 실갱이를 했을 것이다. 그럼 거기서 걸음 나아가서 교수를 한국의 선생님으로 바꿔 생각한다면, 아니 그냥 한국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학생의 논리 정연하고 기발한 답에 대해서 점수를 사람은 이나 될까? 점수는 고사하고 학생의 해명에 기울여 들어줄 사람은 이나 될까? 생각해 본다면 닐스 보어같이 기발한 대답을 생각해내고 선생님에게 자신의 정답에 대해서 똑바로 설명하고 이의를 제시하는 학생은 이나 될까?


 한국이라는 곳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사람 대다수는 자기는 닐슨 보어나, 명의 교수와 같은 관점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제 말문을 열고 세상에 호기심으로 충만해서 "?" "저건 뭐야?", "이건 뭐야?"라는 아이에게 "크면 알아" "원래 그래" 같은 무성의한 대답이나 아니면 정확한 답만을 가르치며, 아이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말살해왔고 말살 당해왔기에 우리 내부에 저런 관점과 태도를 가진 사람은 별종이나 이단아일 뿐이다.


 "객관"이라는 것이 언제나 세상의 정답이고 "주관"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학생이 해야 것은 공부고, 공부라는 것은 객관적인 것을 찾아 찍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사유와 세상에 대한 고민은 어려서는 어리다는 핑계로, 어른이 되어서는 사회라는 전쟁터에서 삶이 고단하다는 핑계로 하지 않으며, 사회와 조직이 권위에 굴복하고 맹목적으로 복종하기 바쁘다. "? 어떻게?"라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어떤 것이 이익인가?"라는 고민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한다. 이런 사고 방식 앞에서 학생 다운 것이 무엇이고 경쟁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교육이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단지 경쟁의 논리만 앞세우며 모든 것을 결론지어 버린다.


 세계화와 글로벌화 시대의 경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전사라고 생각하고 초등학교 심지어 유치원 때부터의 경쟁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판을 친다. 지금의 세계적 경향은 "위키노믹스"라는 신조어를 바탕으로 협업과 참여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다. 많은 석학들의 책에서 미래의 새로운 경향과 가능성으로 리눅스의 탄생과 발전과정에서 자발적인 협업과 참여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런 경향은 최근에 보잉 787 드림라이너의 제작 과정에서도 응용되었다고 한다. 보잉에서 전부 설계하고 제작한 것이 아니라 설계 단계부터 다른 부품업체들이 참여해서 모듈형태로 부품을 설계하고 제작함으로써 비행기의 개발과정을 단축시킴을 물론이고 성능 또한 획기적으로 개선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적으로 조금씩 일고 있는 공정무역의 물결과 사회적 책임 메세나 활동에 적극적인 기업들의 수익이 높은 경향은 이미 세상은 경쟁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써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한다는 것을 있다.


 이런 세계적 경향을 떠나서 서로를 배려하고 도와야 하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하는 전인교육이 필요한 시기에 쓰레기 부모들은 출세와 돈을 위해서 경쟁을 강요한다. 경쟁을 하기 위해 "나는 누구인지", "나의 꿈은 무엇인지", "세상은 어떻는지" 같은 고민과 사색이 필요한데, 이런 과정은 부모와 사회가 결론을 내려버리고, 그냥 경쟁하라고 강요해버린다. 사육에 길들어버려 자신이 사육 당한 방법을 자신의 자식들에게 그대로 옮겨준다. 자신이 하는 짓이 사육인지 교육인지 전혀 구분하지 못한 .


  웃기는 것은 경쟁을 위한 장이자 경쟁을 준비시켜야 쓰레기 대학교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만 고민할 뿐이다. 어떻게 교육시키느냐 보다 어떻게 뽑아야 할지가 우선이고 어떤 학과과정이냐 보다 어떤 건물과 시설이 필요하냐에 고민한다. 학자적 양심의 문제인 논문에 대한 표절은 "관행"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옹하하거나 덮어두기 바쁘다. 학자로써의 의무와 교수로써의 의무보다 정치권에 줄대기에 바쁜 교수를 보면서, 학생을 뽑는 것이 대학의 경쟁력이라고 말하는 것이 우습기만 하다.


  책을 보면서 글로벌 경쟁 운운하고 서열화 얘기하는 쓰레기들은 깨닫기를 바란다. 거기에 "생각의 탄생" "바보 만들기"라는 책을 더해서 진정한 교육은 어떻게 되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를 바란다. 또한 책을 보면서 안의 쓰레기 같은 암목적인 서열화와 줄세우기 경향을 보면서 많이 반성했다. 내가 얼마나 사육 되었는지 다시 알게 되었다. 다른 편에서는 책을 쓰레기라고 치부할 사람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당신이 얼마나 사회와 세상에 사육되었는지를 나타내는 증거라는 것을, 영화 "치킨런"에서 바깥세상을 알지도 못하면서 두려워하고 현재에 안주하려는 닭과 같은 인물이 아닐까 고민해야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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