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23일 화요일

지금 제대로 성을 내야 할 때. 책 "성난 서울"을 읽고....

 

 작금의 현실에 성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누군가는 눈에 보이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냥 속으로만 삼키기에 수를 짐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성날 정도로 세상이 미쳐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바로 인식하려는 사람이 많이 없어 보인다. 그저 숫자를 가지고 성난 사람은 소수일 찬성하지 않는 침묵하는 다수가 있다는 소리나 짓거리는 것이 나라의 몇몇 지식인이요, 집권당이요, 정권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보여준 분노하고 슬퍼하는 많은 민심 앞에서 싸가지 없는 인간들은 그것이 단지 추종자들의 마지막 발악이요, 반대자들의 반대를 위한 반대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이념적 선동질을 일삼하는 쓰레기 언론과 지식인들 그리고 딴나라당은 성난 사람들을 다독여 주기보다는 자신들의 추종자들을 선동해서 갈등과 대립을 부추긴다. 그렇게 해놓고 다른 곳에서는 지금은 화합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반대자들을 공권력을 동원해서 싸그리 짓밟으면서 말이다. 성난 국민들을 향해 강권과 무시로 일관해, 성난 사람들이 제풀에 지치기만을 바라는 같다. 냄비근성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아니던가? 쉽게 끓고 쉽게 식어 버리는….. 시간이라는 마법에 의해서 성난 국민들은 제풀에 이유마저도 스스로 망각할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저들 쓰레기 정치권과 권력에 보여줬던 것이 아니던가?

 

 그것이 우리의 한계인지 모르겠다. 성난 상태를 바로 표현을 하지만, 그것을 세력화하지 못하는 한계. 스스로에게 무엇이 이익인지도 모르고, 가진 자들을 위해서 투표권을 행사하고 부동산과 돈에 투표를 하는 한계. 그런 행위를 하는 순간에는 마치 자기도 언젠가는 이건희나 정몽구 같이 부자가 있다고 믿거나, 못해도 십억짜리 아파트와 자산을 보유할 있다고 믿는가 보다. 현실은 냉혹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사회체제 안에서는 운이 좋아서 돈을 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그들에게 착취를 당하는 구조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이여.

 

 세계화란 명목으로 경제의 자유, 돈을 있는 자유가 가져온 것은 우리의 삶을 옥죄는 양극화라는 현상뿐이다. 어느 순간엔가 우리는 양극화라는 , 그로 인해서 자신이 점점 가난해지는 것에 대해서 체념한 하다. 한번은 맹목적인 증오로 정치적 심판을 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삶과 현실에 대한 단순한 분풀이로 끝나버렸다. 분풀이가 우리를 깊은 수렁으로 늪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사실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이제야 조금씩 깨달은 같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강한 신앙처럼 심어져 버린 신자유주의와 맹목적인 경쟁은 지금도 우리가 무엇에 화를 내고 분노하고 저항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게 만든다.

 

 오히려 우리가 분노의 대상, 성을 상대를 잘못 찾았다.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서 싸우는 노조나 힘없는 비정규직을 향해서 돌팔매질을 가한다. 귀족노조라느니 식으로 매도하기도 하고, 비정규직의 무능을 나무란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자신보다 잘나가는 것을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는 옹졸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고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무시무시할 정도로의 폭력을 가한다. 우리가 분노해야 대상과 우리가 저항해야 것들은 사회의 잘못된 시스템과 그런 시스템을 강화시켜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들인데.

 

 분노해야 대상과 화내야 대상을 잘못 찾은 우리는 결국에 탓을 언제부터인가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 마치 누구나 노력만 하면 성공 있다는 착각 속에서 말이다. 무릎 도사에 나온 안철수 교수가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성공은 운이라고. 단지 자신에게 오는 운을 잡아서 성공한 것이라고. 물론 운을 잡기 위해서 자신의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된다고는 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적성과 능력을 고려해서 실력을 닦는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적성과 능력을 과장해서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다. 그래서 자신이 노력만 하면 성공할 있다고 착각한다. 자신이 되지 못하면 자녀들은 그렇게 만들 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과외에 많은 돈을 소비하고, 학벌사회의 정점에 자녀들이 들어가기를 갈망한다. 결국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사회의 시스템이나 제도가 아니라 자기자신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성공한 인간들은 성공한대로 그런 사고방식 안에서 계급을 만들어서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멸시한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순응하는 사회 그것이 지금의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힘없는 약자들이 아무리 자신의 요구를 말하고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해도 짓밟아 버린다. 그것이 마치 당연하다는 식으로.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는 지금의 20대들에게 가해지는 멸시와 폭력적인 시선들은 바로 그런 것이다. 기성세대가 잘못 만들어 놓은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20대들의 문제라고 치부해버리고, 20대를 착취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20대의 대다수가 비정규직으로 몰리는 것에 대해서 기성세대들은 미안함은 찾을 수도 없고, 오히려 20대를 탓하고 20대는 스스로를 탓하기 바쁘다.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지금의 사회 시스템은 견고해질 뿐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 성을 내고, 분노를 표출하고 저항하지 못하는 현실은 그저 뫼비우스의 고리일 .

 

 이제 자기 탓을 그만하고 우리가 직면한 현실과 상황에 대해서 알아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자신의 눈으로 현실을 인식하기 힘들면 타인의 시선으로 우리는 현실을 객관화시켜 인식해야 한다. 일본인 르포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아마미아 카린의 눈에 비친 서울을 통해서, 타자인 그녀의 시선을 통해서 우리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있는 기회가 "성난 서울"이다. 책의 내용은 비록 제목 처럼 성나 보이지는 않지만, 바뀐 세대가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에 저항하고 분노와 저항을 표출하고 있는 새로운 것들을 수가 있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를 생각할 기회가 만한 책이다. 아마미아 카린의 말을 기억하며 읽어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애국' 없다. 조국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더욱 전가시키는 국가는 사랑 받을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가 해야 일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보일 것이다.

 

성난 서울 - 8점
아마미야 카린, 우석훈 지음, 송태욱 옮김/꾸리에

2009년 6월 21일 일요일

언론과 미디어에 산업이란 논리가 왜 위험한가. 책 "미디어 모노폴리"를 읽고...

 

 지금 국회는 미디어법을 두고 대결 중이다. 초부터 시작된 대립에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는 상황이다. 딴나라당은 임시국회를 열어서라도 법을 통과 시키려하고, 민주당을 비롯한 4당은 미디어법을 악법이라고 정의하고 힘으로라도 미디어법을 저지하겠다고 공헌하고 있다.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 어느 쪽의 편을 들기 전에 중요한 것은 미디어와 언론에 대한 정의가 우선되어야 되지 않을까? 양측의 극렬한 대립의 이면에는 가장 근본적인 미디어와 언론의 정의와 속성에서부터 크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딴나라당은 우선 미디어와 언론이라는 것을 단지 산업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언론과 미디어의 어떤 속성 때문에 미디어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보다는 일자리 창출법이라는 이름으로 여론몰이 중이다. 4당은 미디어와 언론만이 가지는 특수성, 권력을 감시하는 역할이라는 미디어와 언론 본연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언론과 미디어가 대기업 상업자본이나 악날한 정치성향을 가진 족벌신문이 다른 미디어에 진출하는 것은 언론과 여론의 왜곡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 2mb정권과 딴나라당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떡검을 내세워 광우병을 보도한 pd수첩을 강하게 압박하며, 마치 그것이 잘못된 언론의 역할인 처럼 이야기하지만, 노무현 정부시절과 2mb정권에서 광우병과 미국산 소에 대해서 보도했던 조중동의 태도형태를 비교해보라. 어떤 언론이 잘못된 언론의 행태인 것인가를 바로 인식할 있음에도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에 대해서만 언론의 문제를 지적하는 정권과 떡검의 졸열함은 결국에 그들이 언론을 어떻게 보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좋게 말해서 언론과 미디어를 산업으로 보는 것이지, 2mb정권과 딴나라당은 비판적 언론의 기능을 완전히 부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말에 복종하는 언론을 원하는 것이다. KBS YTN 낙하산을 투하하는 이유도( 정권의 낙하산에 대해서 그렇게 비판하던 인물들이 지금의 2mb정권과 딴나라당이다.) 언론을 장악하기 위한 치졸한 술수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반면, 조중동을 비롯한 많은 재벌들이 미디어와 언론을 노리는 이유는 가지다. 조중동은 미디어의 출현으로 점점 약화되어가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만회하고,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기 위해서다. 다른 이유는 그들이 여론을 장악함과 동시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로 여론을 왜곡하기 위해서다.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여론이나 좋지 않은 정보를 차단함으로써 자신들의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번째 이유다.

 

 비록 정치권의 이해관계와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다르기는 하지만, 각자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공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지속적으로 언론과 미디어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교묘한 음모는 국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만들 정도로 치밀하게 진행되어 왔다. 자유와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자유와 경쟁이라는 말이 신앙과도 같아서 국민들은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이면에 숨겨진 치졸한 음모는 전혀 보지 못한다. 지금 미국의 경제위기의 씨앗이 레이건 시대부터 시작된 자유와 경쟁의 극대화인 처럼. 언론의 가장 기본기능은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의 파멸의 시작은 미디어와 언론의 소유와 운영에 관한 자유와 경쟁의 극대화이다. 이번 미디어법의 통과는 파멸의 전주곡이다.

 

 딴나라당과 조중동 그리고 재벌들이 아주 합리적인 증거나 모델처럼 미국을 예로 들면서 이번 미디어법을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언론과 미디어에 과한 파멸의 증거 또한 미국에 있다. "미디어 모노폴리" 미국의 미디어의 이면을 철저하게 파헤치고 있다. 5개의 기업이 장악한 미국의 미디어 시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어떻게 여론이 왜곡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인지 우리는 미국에 대한 환상, 미국이라는 경제대국의 나라가 마치 대단한 기회의 땅이고, 누구나 성공할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언론에 보여진 것은 미국의 추악한 면이 숨겨진 것이라는 것이다. 겉은 화려하만 속은 완전히 썩은 상태인데, 겉을 화려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미국의 미디어와 정치권이다. 미국의 금융회사에서 일하던 일본인은 어느 순간 미국의 그런 추악한 이면을 알게 되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그런 미국의 이면을 취재하고 "빈곤대국 미국"이라는 책으로 만들어 냈다.

 

 신문의 광고면에 기업의 광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사 자체에 기업과 상품에 대한 광고성 기사를 실음으로써, 신문 본연의 기능을 버린 행태들을 보여준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중동을 비롯한 경제지의 경우, 이런 노골적인 기사 행태를 자주 수가 있다. 미국에서는 부동산 관련 기사에 그런 경향이 많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도 부동산관련 기사의 상당수가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을 느낄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업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가 나오면 광고라는 수단으로 압박을 한다. 미국에서도 이런 노골적인 언론통제의 형태가 지속되어 왔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바로 보면,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에 삼성의 광고가 없는데, 이것은 김용철씨의 양심고백으로 시작된 삼성의 비리에 대해서 철저한 비판 기사를 개제한 것에 대한 치졸한 복수의 행태였다. 그렇게 우리가 직면하고 우리가 접하는 언론과 신문 속에 언제나 정확한 진실이나 사실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패닉 이후" 저자는 언론과 신문을 믿지 말라고 한다. 거기에 "블랙스완" 저자는 아예보지 말라고까지 한다.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결정할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넘쳐나는 정보와 쉽게 접근할 있는 정보로 인해서 그런 혼란은 점점 증가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나마 올바른 언론과 미디어가 권력과 기업의 힘으로부터 자유롭도록 만들어야 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객관적이고 진실한 정보를 접할 있는 기회를 늘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자체가 모두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서 돈만 되면, 모든 것이 진리인양 찬양하는 행태를 하고 있으며, 미디어와 언론을 족벌언론과 재벌 그리고 딴나라당이라는 정치권에 헌사하려 하고 있다. 이번 미디어법은 그런 한국의 미디어와 언론의 종말을 구하는 강력한 파멸의 씨앗이고, 우리는 그저 정치권의 싸움에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침묵을 깨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책을 보고 미디어법의 이면에 숨겨진 추악한 현실들을 봤으면 한다.

 

미디어 모노폴리 - 10점
벤 H. 바그디키언 지음, 정연구.송정은 옮김/프로메테우스

컨셉을 살리지 못한 책. 책 "경제학자 CEO, 현장에서 경영을 말하다."를 읽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세계와 학문적 세계는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양한 기법을 동원해서 현실을 연구하지만, 현실 속의 수많은 요소와 인식하기 어려운 복잡함으로 인해서 현상을 반복재연 가능한 학문적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학문에서는 다양한 조건으로 현실을 제한한 다음, 현실에서 일어난 현상을 설명한다. 학문에서는 현실의 상황을 이상적인 상태로 바꾼 다음에 학문적 연구를 통해서 현실을 설명한다. 현실과 학문과의 괴리는 때문에 발생한다. 그로 인해 기업들은 매년 신입사원의 재교육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그리고 대학교육에 대한 불만을 많이 표현한다. 많은 사람들이 학자들을 센님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이상적인 학문의 세계에서는 뛰어날지 모르나 현실세계에 자신의 전문지식과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책이 흥미를 끄는 것은 학자 출신이 현상에서 경험한 것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학문과 현실(현장) 동시에 체험한 풍부한 경험으로 그런 차이에 대한 이해를 넓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책은 그런 기대를 완전히 배반한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경영자로써 현장에 경험한 것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수준이다. 책의 제목과는 다르게 학자로써 경험은 단지 과거의 추억일 책의 내용에는 전혀 그런 내용을 찾을 수가 없다. 제목에 낚였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경영자로써의 경험의 나열은 시종일관 딱딱하고 단편적이다. 풍부한 경험을 자세하게 스토리 텔링 형식으로 풀었더라면 가치 있는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GE 코리아의 회장이었던 이채욱씨가 썼던 "백만불짜리 열정"이라는 책이 유익하고 기억에 오래 남는다. 자서전인 "백만불짜리 열정" 경영서인 책은 비록 처음부터 컨셉이나 대상 독자가 완전히 다른 책이지만.

 

  제목에 나타난 저자의 이력을 컨셉으로 잡고, 충실히 컨셉을 실천했다면 좋은 책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공부했던 학문이 자신이 경험했던 현장에서는 어떤 것이 같고 어떤 것이 다르다는 식으로 책을 구성했었더라면 대상 독자의 폭도 상당히 넓었을 것이고 지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책은 ceo 아니라면 쉽게 공감하기 힘든 내용들이다. 물론 미래의 ceo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참고할 만한 이야기들이기는 하지만, 경험의 단편적인 나열에 그친 책의 한계에 쉽게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책이 어려운 편도 아닌데, 몰입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읽고 이후에도 머리 속에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결국 책의 한계는 너무 명확하다. 저자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했거나 공유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에게는 유익한 , 그게 한계다.

 

경제학자 CEO, 현장에서 경영을 말하다 - 6점
정순원 지음/원앤원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