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28일 화요일

삶은........ 책 "삶은 여행"을 읽고......


 

 

 시간. 조정 없는 흐름에 휩쓸려 이리저리. 언제부터인가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아니라, 다시 잡을 없는 시간의 흐름에 삶을 그냥 맡겨 버린다. 나의 삶이 나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하라는 데로, 누군가가 가라는 데로, 조정 당하는 듯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세상의 규칙에 순응하면서, 그것이 삶이라고 스스로를 자위한다. 세상에 유일한 존재인 ''라는 존재는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공산품 처럼, 획일적인 삶을 강요당한다. 존재는 유일하나 존재가 만들어가는 삶은 사회의 규칙과 관습의 속에서 다른 존재들을 닮아간다.

 

 속도. 이것들은 우리의 삶을 획일화 시킨다. 보다 빨리 빨리. 앨빈 토플러가 "부의 미래"에서 미래에 부를 획득하는 힘으로 속도를 지목했다는 것은 애써 무시하더라도, "빨리 빨리"라는 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의 삶을 지배해왔다. 한국에 외국인들이 가장 쉽게 빠르게 배우는 말이 "빨리 빨리" 아니던가. 그래서 빠른 속도 경쟁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와 삶에 대한 물음을 가지는 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아니 우리는 이런 물음에 답하는 , 생각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에 너무 당황스럽기 때문일지도…… 어렸을 "어른이 되면 알아."라고 들었던 어른들의 대답은 어른이 지금 존재와 삶에 대한 대답을 아직도 물음표로 채워져 있다.

 

 경쟁. 이성을 가진 인간들이 야생의 동물 세계를 그대로 답습한다. 동물과 다른 것은 이성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이 하는 행위는 이성이 아니라 동물들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의 표현이다. 동물들은 생존본능에 충실한 몸부림이지만, 인간은 생존이 아닌 부와 권력이라는 본능을 행한다. 속에서 삶은 치열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존재의 이유가 경쟁이 되어버린다. 순간 삶은 외로움 자체가 된다. 적자생존, 약육강식, 그것이 삶을 지배하고, 삶은 언제부터인가 전장이 된다.

 

 여행.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 조차 보지 못하고 거침없이 달려왔던 우리의 삶에 조그만 파장을 던지는 것은 지금의 삶에서 떨어져 나를 관찰하는 것이다. 여행이란 지금의 삶에서 작은 일탈이요, 여행이란 사회의 관습과 규칙을 벗어난 자유다. 나를 얽매던 고민과 현실의 고통 속에서 안식과 편안함을 안겨줄 통로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현실에서 빗겨나 나와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여행의 세계를 비교하게 만든다. 여행의 좋고 싫음을 떠나 나의 삶과 존재를 생각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

 

 . 어떤 누군가의 삶이 표준일 없고, 어떤 누군가의 삶이 진리 일수는 없다. 누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가든 삶은 내가 존재하는 언제나 진행형이다. 진행중인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그것이 나의 삶인지,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삶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낯선" 만들어 내는 두려움 때문에,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삶의 길을 걷는 것을 선호한다. 여행도 우리를 "낯선" 만들어 내는 두려움으로 이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낯선" 것에 대해서 도전하고 탐험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자신의 활동 영역을 벗어나는 조차 두려워한다.

 

 삶은 여행. 자신의 삶에 주인이 사람은 지금의 자체가 여행은 아닐까? 정해진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찾아서 도전하고 탐험하는 그들의 삶은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과정자체에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이고, 행복해할 것이다.  미지의 세계나 낯선 세계를 향한 여행 그것이 존재의 이유이자 삶이지 않을까?

 

 베를린. 경제적 시간적 여건으로 인해서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간접적인 여행이 있는 것은 누군가의 여행기다. 사진이나 영상이 만들어주는 낯설음 보다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서 재해석된 낯설음은 나름의 색다름을 전해준다. 아이돌 가수를 거쳐서 독특한 음악을 하는 진정한 뮤지션이 이상은. 나름의 강한 개성을 가진 이의 시선으로 비춰진 베를린은 나의 소망 여행지 목록에 하나 추가 되는 매력적인 곳이 된다.

삶은... 여행 - 10점
이상은 지음/북노마드

2008년 10월 22일 수요일

책 "너에게 돌아갈 집이 있다."를 읽고.......

 

 

 사람들이 말하는 "" 보통 2가지의 개념으로 많이 쓰인다. 하나는 , 바람을 막아주는 주거 건물로써의 ""이다. 하지만 요즘의 사람들에게 "" 거주의 목적이 아니라 "재산" 개념으로 접근한다. 살아가면서 최대의 목표가 집이 되어 버린 것도 주거의 개념에 재산으로써의 가치가 부여됨으로써 일어난 사회적 현상이다. 괴테는 "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누구나 집을 짓는다. 그러나 언젠가 그를 떠나고, 결국엔 다음 사람에게 집을 넘겨준다. 집을 넘겨 받은 사람은 위에 다시 집을 짓는다. 그리하여, 집을 완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말을 했다. 결국에 집이라는 것은 거주의 개념이 중요한 것이지, 다른 가치는 결국에 누군가에 의해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라는 것이 가지는 다른 의미는 "가족"이라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유일하게 안락함과 평화를 안겨줄 그곳.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나를 지탱해주고 의지가 되어줄 가족들이 있는 그곳.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는 것이 ""이다. 하지만, 일상에 바빠진 가족들에 의해서 집은 점점 해체되어 가고 있다. 과거의 가족이라는 것이 단단한 울타리고 사회를 이루는 최소의 집단이었지만, 지금은 개인의 자아 실현이 점점 소중해지고 있다. 집단보다는 개인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가족간의 유대는 형식적으로만 남거나 최후에 돌아갈 마지막 보류의 개념으로 자리 잡아간다.

 

 가족의 가치냐 개인의 가치냐를 두고 어느 것이 중요하고 어느 것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어떤 이는 사랑의 완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가족이라고 말할 것이고, 어떤 이는 사랑의 진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가족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랑의 완성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완성품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가족의 가치를 높게 생각할 것이고, 사랑의 진화로 보는 사람은 진화의 결과물보다는 원본의 가치인 개인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너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다." 가족의 가치냐 개인의 가치냐를 두고 일어나는 이야기다. 결혼을 하면서 모든 사회생활을 접고 육아에 신경 쓰던 주부가 자아를 찾기 위해서 다시 사회생활을 하면서 남편과의 갈등이 시작된다. 그녀의 남편은 여성을 임신 시켰다는 의무감 때문에 결혼을 하고,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일에 종사를 하면서 삶의 의욕을 상실한 사람이다. 부부는 개인의 가치를 중요시하지만, 의무라는 속박 속에서 개인의 가치를 묻어두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갈등의 원인이 되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가정이라는 틀마저 위협한다.

 

  다른 부부는 남편의 강압적으로 통제하는 가족이라는 구성 틀에서 갈등한다. 남편은 가족의 틀이라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하면서도, 가정의 밖에서는 가족이라는 틀을 깨는 듯한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 남편이 집착하는 것은 가족이라는 자체일 뿐이고, 가정이 가지는 다른 가치는 생각해보지도 알지도 못한다. 그런 가정을 실질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은 순종적인 그의 부인으로 가족간의 갈등의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 하지만 가족간의 신뢰나 사랑 없이 지어진 가족이라는 틀은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가족의 갈등과 사건은 어정쩡하게 마무리 되어 버린다. 번째 부부는 각자가 추구하는 개인의 가치를 우선시 하면서 가족이라는 틀을 새롭게 정의하면서 진화시켜 나간다. 서로가 만족하는 삶을 찾았지만, 서로의 사랑에 대한 확신은 보여주지 못한다. 연예시절의 사랑의 유효기간은 3년이라고 했던가? 연예시절의 열정적인 사랑의 모습은 없다. 결혼 그리고 새로운 가족의 구성이 사랑의 변화를 일으키듯. 그것이 지금의 그들의 사랑일 수도 있겠지만……..

 

  번째 부부는 그들 가족들 사이에서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간다. 사랑과 신뢰의 붕괴가 가져온 껍데기 가족. 결국에 가족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힘이나 의도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족을 끝까지 지키려는 남편의 모습이 그런 결핍에 대한 반성과 후회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가족 구성원들이 진정한 나의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가야 길이 너무나 멀어 보인다.

 

 사랑은 진화하고 변화화는 것이다. 돌아갈 , 돌아갈 가족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일방적인 사랑이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가치에 대한 서로의 배려와 존중 그리고 사랑과 신뢰로 되는 것이다. 어떻게 가족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마무리 하는 저자의 결말이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것이 많은 대중들이 인식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 아닐까? 가족간에 무슨 일이 있건, 무슨 잘못이 일어나건, 내가 돌아갈 가족은 언제나 곳에 있고, 나를 받아줄 것이라는…… 하지만, 가족 사이에도 서로간의 노력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배려와 존중, 사랑, 신뢰 모든 것들은 그냥 오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돌아갈 집이라는 곳도……..


너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다 - 8점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이선희 옮김/창해

2008년 10월 21일 화요일

용서의 권한.......


 부산고를 졸업한 위대한 이라는 야구 선수가 있었다. 좋게 이야기하면 젊은 날의 객기로 실수겠지만, 소위 말하는 뻑치기 범죄 경력으로 인해서 졸업을 앞두고 과연 프로구단의 지명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많은 야구팬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능력이나 가능성으로 본다면 충분히 1차지명감이라고는 하는데, 과거의 경력 때문에 제2의 노장진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2차지명이 시작되면서 상위 순번에서 그를 지명하는 구단은 없었다. 그러다가 2차 3순위에 sk구단이 그를 지명한다. 스카우터는 위대한 선수의 야구에 대한 열정을 최종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고 한다. 2007년 sk에 입단한 위대한 선수는 그 열정을 피워보지 못하고 야구를 그만두게 된다. 과거 경력을 문제삼으면서 팬들이 구단에 항의를 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팬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위대한 선수는 그렇게 야구계를 떠났다. 이제 막 20살의 나이에......... 그것이 안타까워서 내 블로그에 "위대한 선수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을 썼었지만, 요즘들어 다시 그가 생각난다.

 

  최진실의 자살이라는 사건이 이슈화 되면서 증권녀를 향한 "용서를 못하겠다."라는 댓글을 통해서, 그가 다시 생각났다기 보다는 그 당시 그를 비판하는 댓글에 "용서를 못하겠다."라는 댓글이 생각나면서 그가 다시 생각났다는 것이 올바른 말일 것이다. 

 

 위대한 선수를 향한 "용서를 못하겠다."라는 댓글을 보면서 피해자나 그의 가족들이 아니라 야구팬들이 용서라는 말을 올리는 것이 과연 바른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졌었다.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싫고 좋음은 있을 수 있어도 용서라는 말이 과연 어울리는 것일까? 분명히 위대한 선수는 법원에서 판사의 선고를 받고 죄값을 치뤘다.(물론 그 죄값이 가치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피해자의 가족들이 그를 용서했는지 안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용서 받아야 할 2곳 중에 하나는 분명히 댓가를 치르고 용서를 받았다. 그 외에 누구도 그에게서 용서받을 위치에 있지않으며 용서할 권한도 없다.

 

 증권녀에 대해서도 용서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최진실의 유족들 외에는 없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로 울분을 표출한다. 뿐만 아니라 용서를 빌지 않았다고 분노한다. 그들이 용서를 말할 수 있는 위치나 권한이 있는 사람들일까? 물론 그들이 팬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자신들은 그런 위치와 권한이 있다고 말 할 수 있겠지만, 너무나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다는 것도 과잉적인 것일 뿐만아니라, 그 많은 대중을 어떻게 만족시킬지도 의문이다.

 

 어느 책에선가 용서란 "자신이 용서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감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고 했다. 이를 보고 어떤 이는 신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냐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나에게 말했지만, 그 만큼 용서라는 것이 어렵고 숭고한 과정이다. 그런 용서의 권한을 가질 수 없는 제3자나 간접적인 인물들이 함부로 용서라는 말을 쉽게 올릴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용서의 권한이 자신에게 있는 것 처럼 스스로를 정당화 하면서도, 쉽게 용서를 하지 않는다.

2008년 10월 20일 월요일

집단주의와 흑백논리

 사회라는 하나의 우리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다보면, 이런 저런 갈등이 있고 충돌이 생긴다. 

저마다 살아온 환경, 받아온 교육,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다르기에 사람마다 가진 철학이나 가치관은 세상에 존재했었고, 존재하는 사람 만큼 다양하다. 

 그런 다양함은 타인에 대한 관용,배려,이해하려는 의지가 없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서 충돌과 갈등의 원인이 된다. 

 특히 인간들은 사물을 천연색으로 보기 보다는 흑백논리로 치중해서 바라본다. 적과 아군을 구분해서 어딘가에 속해야만 만족을 느끼고, 동질감을 느낀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한 사람을 하나의 객체로써 인식하기 보다는 적과 아군 두 가지 패턴으로 집단을 구분지어 버린다. 

 두 개의 집단 중에 어디 무리에 속하지 못하면 안될 것 같은 초조함을 생성하게 되고, 어떻게든 어느 집단의 구성원이 되고자 한다. 자신의 철학이나 가치관을 모두 포용하는 집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집단은 형성되고 그 집단에 속하지 못한 소수의 사람들은 사회에서 관심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두 집단의 충돌에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성적 소수자들이 그들이요. 빈민층이 그들이고, 우리사회의 또 다른 구성원이 된 외국인 노동자와 외국인 신부들이 그들이다. 

 그들 모두 우리 사회의 색깔 논쟁의 희생양이다. 두 집단은 언제나 소수자들을 두고 다툼을 한다. 그나마 한쪽은 소수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이지만, 한쪽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소수자들은 어느 편이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어느 집단에 속의 안락함이 아니라,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차별받지 않은 것이고 멸시 받지 않는 것이지만, 두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가치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것이라면 그들은 완전히 따돌림을 당한다. 

 집단주의와 흑백논리는 단 두가지만을 인정할 뿐 세번째, 네 번째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시해버린다. 마치 사람이라는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그래서 소수자들은 사회의 무관심과 냉대 멸시 속에서 놓여진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니라 차이에 대한 관용과 이해 그리고 다양성임에도 흑백논리와 집단주의 앞에서 좌절만 할 뿐이다. 

책 읽기.....


일주일에 3~4권 씩 해치우는 상위 1%의 독서인이 되지는 못하지만, 1년에 100권이라는 목표로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어렸을 때는 그런데로 책을 읽는 편이 었는데, 성인이 된 이후에는 1년에 6~10권 정도의 책을 읽다가 1년에 100권이라는 목표를 잡은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신분상승과 출세를 위한 목적이랄까?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자기개발서를 중심으로 읽기 시작했었다. 대표적인 자기개발서 저자인 공병호박사의 책을 시작으로 조금씩 그 방면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 책들을 속에 인용되거나 언급된 책들을 계속해서 읽으면서 남는 것은 허무함이랄까? 좋은 말들이 넘쳐나고 나도 할 수 있는 희망과 용기 그리고 방법을 들을 자세하게 가르쳐주는데, 책을 덮으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읽는 그 순간 뿐이다.

 

 그러면서 다른 분야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물질에 대한 또 다른 욕구랄까? 금전에 대한 욕구랄까? 그 분야는 경제학이었다. 경제학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세상이 돌아가는 논리에 대한 성찰과 분석은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나를 인도했다. 인간의 욕망과 욕구가 잘 반영되어 움직이는 경제학이라는 분야는 심리학도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어서, 물질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관련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돈에 대한 욕망이나 욕구보다는 인간 탐욕에 대한 깨달음과 무서움이랄까?

 

그 이후에 관심을 가지게 된 분야가 사회분야의 책이었다. 어디선가 박노자에 대한 이름이 많이 들여왔고, 박노자란 인물이 어떤 책을 냈는지 궁금증을 자극했다. 그래서 박노자를 통해서 사회분야의 책들 속으로 독서의 방향이 이동하게 되었다. 박노자의 책은 충격 그 자체였다. 공산주의 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그의 글들은 처음에는 나의 가치관을 강하게 건드렸다. 그의 글을 반박하고 싶어도 반박하기 쉽지 않은 철저한 논리와 냉철한 비판은 나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던져주었다. 첫 번째 그의 책은 그의 글을 반발하면서 읽게 만들었고 그 뒤에 그리고 그 뒤에 책들은 읽으면서 나는 그를 조금씩 이해함은 물론이고 그의 다음 글과 책들을 기다리게 되었다. 나의 정체성이랄까? 철학이랄까? 그것도 조금씩 변해갔다. 그가 보여주는 마이너 세상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고, 그 마이너 세상의 소수자들에 관심가지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내 책 선택의 폭은 점점 넓어졌다. 자기계발서에 대한 비중은 줄어들고, 소설을 읽는 비율이 조금씩 올라갔다. 동양철학 서적에 조금씩 관심이 가면서 그분야의 책을 조금씩 보기 시작했으며, 역사서적이나 여행서적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책 분야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점점 넓어져 가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이 생겼다. 책 읽기 독서에서 중요한 것은 인문학과 철학 그리고 고전문학이라는 것을....... 세상에 중요한 것은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와 지혜이고, 그러한 세상의 이치나 지혜는 그 곳에 있다는 것을...... 다른 책들은 그 안에 것들에 대한 재발견 재해석일 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익숙지 않은 것을 접하고 읽는 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들뢰즈의 저작 중에 하나를 손에 들고 읽다가 좌절하고, 몇몇 어려운 인문학 서적을 읽다가 좌절하고.... 그러면서 고전문학에 대한 두려움이 저절로 자라났다. 아직 내 능력으로는 그 분야를 포용하지 못함을 느꼈다. 그래서 여전히 그 분야의 책들에는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어렸을 때 쉽게 접하고 자주 접했더라면 아쉬움이 많이 다가온다. 비록 지금은 두려움으로 쉽게 다가가지는 못하지만, 많은 책 읽기를 통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순간이 오리라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다양한 책들을 읽으려 노력한다.

 

ps> 아~! 올해도 100권은 못 채울 듯 하다. 쉽고 가벼운 책들만 읽는다면 100권은 충분히 채우겠지만, 읽은 책 갯수나 채우는 독서는 지양해야 하기에...... 게을럿던 이번 여름과 몇 몇 달들이 후회로 다가온다.

2008년 10월 19일 일요일

콘크리트 미학을 사랑하는 이들을 향한 일침...."직선들의 대한민국"을 읽고.....

 


 
내가 사는 부산 동래구에는 온천천이라는 곳이 있다. 도심 자연적 휴식공간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에 부흥해 개발되었고, 개발되고 있는 곳이다. 얼마 전까지는 사람들이 주도 많이 다니던 길을 정비하고 수질을 개선하기 위한 개발이 많았다. 그래서 우선 하수도와 같이 연결되어 있어서, 하수도와 수로를 분리하는 작업으로 악취가 넘쳐나던 온천천에서 악취 발생 요인을 제거와 수질개선에 주력했다. 그리고 주변에 길을 정비하고 운동시설을 군데 군데 설치해서 누구나 쉽고 편하게 찾아올 있는 곳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런 노력으로 온천천은 온천천 주변의 많은 주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었고, 여름이면 더위에 지친 주민들이 편히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온천천의 고질적인 문제인 수질은 그렇게 개선되지 않았다. 비가 많이 날이면 공장의 폐수가 흘러서 척박한 환경과 사투하며 살아가던 물고기들의 떼죽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하류 주변의 물길의 흐름이 느려진 곳에서는 부영양화 현상도 종종 발견되곤 하였다. 온천천이 완벽한 친수공간이 되지는 못했다.

 

 수질 개선을 위한 특단의 조치로 행해진 것이 낙동강물을 온천천 상류로 끌어와서 흘려 보내는 것이었다. 2급수의 낙동강물을 끌어와서 온천천에 방류함으로써 수질을 개선하려고 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생각하는 만큼의 수질개선에는 실패했다. 환경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온천천에 복개되어 있는 도로를 뜯어내지 않으면 어떠한 방법을 써도 수질개선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10여년 전에 하천바닥과 하천 옆에 덕지덕지 발랐던 콘크리트는 부영화의 다른 주범이라는 것이다.

 

 도로를 뜯어내고 하천을 복원하려면 우회도로를 만들어야 하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 많기 때문에 차선으로 택한 것이 하천 바닥과 옆에 있는 콘크리트를 제거하고 친환경적으로 하천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온천천에서는 포크레인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하천을 복원하고 수영천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주변의 인도를 연결하려고 한다. 10여년이 넘는 삽질의 반복 속에 인간들이 깨닫은 것은 자연 그대로의 것에 대한 소중함이었다.

 

 서울과 2mb 상징이라는 청계천도 지금 온천천의 삽질을 반복하고 있다. 청계천의 개발당시 상류를 복원하지 않고 하천의 바닥은 콘크리트로 도배를 했다. 결과 1년에 200억에 가까운 시민의 아까운 세금이 매년 수도 요금으로 낭비하고 있고, 청계천의 부영양화를 불러왔다. 환경 CEO라고 칭송받던 2mb 만들어 결과는 결코 친환경적인 것이 아니라 친콘크리트적인 결과인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그를 환경 인물이라고 칭송하는가? 개발독재시대를 거쳐서 아파트 공화국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우리는 콘크리트의 미학에 너무 익숙해지면서 친환경과 친자연의 미학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직선의 아름다움이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생각했으면, 통일 아름다움을 최고의 미학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99% 콘크리트 미학에 1% 자연적 요소가 들어가면 그것이 자연의 미학이요 친환경적 미학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무엇이 친환경이고 무엇이 자인인지보다 익숙한 콘크리트의 미학 속에서 그것을 자연이라고 착각한다.

 

 우석훈 교수는 우리가 얼마나 직선의 미학이라고 불리는 콘크리트의 미학을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것이 2mb라는 인물과 딴나라당을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대표적인 직선의 미학과 콘크리트 미학의 중심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돈과 경제라는 황금이 만들어낸 단순하고 미학에 대한 편협한 시각은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마저 잃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여전히 직선의 아파트에 사랑하고, 거대한 토목공사를 자랑스러워하며, 초고층 건물을 그곳의 랜드마크라는 열광한다. 이런 현실에 대한 놀라운 접근과 통찰을 보여주는 우석훈교수를 통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학의 관점에 대해서 다시 되돌아 봐야 것이다.


직선들의 대한민국 - 8점
우석훈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Unitas brand vol.6-런칭의 기술" 을 읽고.......

 


 unitas brand 읽고 있는 나에게 무슨 책이냐고 친구가 물었다. 그래서 "브랜드 관련 잡지인데, 잡지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상당히 전문적인 지식을 전해주는 책이라고 해야 할까? 관심 읽어봐 우리가 모르는 세상을 보는 같아. 읽다 보면 대부분 가지 형태로 반응 텐데, 하나는 브랜드와 마케팅이라는 분야라는 곳에 관심이 생기고 빠져들 것이고, 비판적으로 본다면 주최하지 못하는 지름신의 강림을 이끄는 브랜드와 마케팅이라는 분야가 얼마나 사람을 유혹하는 곳인지를 알게 될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책을 보면서 전자 쪽에 매력을 느낀다. 브랜드와 마케팅이라는 것이 지름신의 강림을 유혹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신세계를 보는 듯하다. 몰랐던 것을 알아간다는 즐거움을 준다고 할까?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브랜드와 마케팅 전략이 만들어지는 치열한 과정과 속에 담긴 고민들을 보면서 마케터들이 단지 소비자에게 제품만을 팔려고 하기 보다는 이상의 가치를 내포하고 전달하려는 것을 보게 된다. 소비자들이 가지는 마음 속의 판타지를 만족시켜 줌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카타르시스를 전해주려는 것이다. 배우는 연기를 통해서, 가수는 음악을 통해서 관객이나 팬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처럼.

 

 이번 호에서는 전략의 수립이 아니라 전략의 실행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흔히 말하는 전문용어로 "런칭" 관해서. 10여년 신비한 광고 컨셉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TTL 레드망고 같은 익숙한 브랜드들의 런칭과정을 자세하게 풀어 보여준다. 읽으면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의 전략이나 전술을 이해하게 하지만, 내가 이들과 같은 창조적인 전략과 전술을 생각해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 그들을 존경할 밖에 없다. 이미 런칭되어 성공한 결과들이기에 과정을 분석하고 글로 독자들에게 쉽게 말할 있겠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일까?

 

 하지만 런칭이 되었다고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 전략을 세우고 전략대로 실행을 하면 모든 과정은 끝이 나고 성공이냐 실패냐의 결과는 인간이 조절할 없는 영역이기에 그저 결과만을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런칭 전략에는 이미 다른 대안적 계획들이 포함되어 있고 결과의 방향에 따라서 전략을 계속 실현해 나감으로써 브랜드는 변화하고 진화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받아든 최종적인 결과과 성공일 마케터들의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 시장환경의 변화와 소비자들의 변화에 따른 다른 변화가 꾸준히 되어야 된다고 한다. 브랜드를 리뉴얼 하거나 확장해야 된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의 브랜드가 살아있는 생명처럼 환경의 변화에 꾸준히 적응하도록 변화시켜야 된다는 것이다. 생물계의 적자생존을 외친 다위니즘이 브랜드와 마케팅이라는 분야까지 기본적인 원리로 작용하는 것이다. 손에 받아 결과를 가지고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가장 실패라는 것은 브랜드와 마케팅 분야 만이 아니라 인간의 인생 전반에 통하는 진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유니타스브랜드 Vol.6 런칭의 기술 - 1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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