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22일 금요일

선과 악, 그 경계를 묻다. 영화 "다크 나이트"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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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세상을 구분 짓는 행위를 통해서 동질감이나 일체감을 느끼지만, 반대로 이를 통해서 차별과 증오를 표출하기도 한다. 개인마다 폭넓고 다양한 생각의 차이를 무시한 , 각자가 가진 잣대로 상대방에게 묻는다. "너는 선이냐? 악이냐?" 편이면 너는 선이고 상대편이면 너는 악이다. 절대선과 절대악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다. 모든 것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내가 있는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낸 시대 정신에 따라서 언제나 변한다. 단지 나의 판단이 너와 나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사회구성원들이 오랜 시간의 합의 걸쳐 완성해 놓은 법과 윤리라는 것도 각자의 상황에 따른 판단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절대적이고 명확한 기준이 아니라 동지와 적이다. 머리 숫자가 만들어가는 힘만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해 버린다. 그것이 다수결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된 민주주의의 맹점이고 한계다.


 이런 한계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에게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역지사지의 정신이고 배려의 마음이다. 하지만 이기적인 유전자로 충만한 다수의 사람들은 나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하다. 이로 인해 만들어지는 사회는 점점 서로를 불신하게 된다. 법이라는 것은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기둥이기는 하지만, 위에 있는 것이 서로간의 신뢰다. 법은 사회의 모든 정의와 질서에 대해서 간섭하고 통제하지 못한다. 그래서 법이 보호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습법이라는 것이 관습법이 보호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뢰가 필요하다. 사회에서 신뢰의 상실은 법이 가지는 권위마저도 상실하게 만들어 버린다. 돈과 권력은 쉽게 결합하게 되고 온갖 편법을 통해서 법이 무력화 되는 것은 "식은 먹기" 때문이다.

 

 영화 "다크 나이트" 속의 고담시티는 모든 신뢰를 상실한 사회다. 범죄자들이 무서워서 또는 그들에게 매수 당해서 법의 권위는 완전히 상실한 사회다. 지방정부의 힘도 범죄 앞에서는 무기력하기만 하다. 고담의 시민들이 기다리는 것은 범죄보다 시민이 당당하게 살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줄, 어둠을 몰아내줄 구세주다. 그로 인해 폭력 앞에 굴복하거나 나약해져서 비겁해지는 각자의 본성은 반성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이 나약한 이들에게 또는 타인에게 2차적인 폭력을 가하는 추동력이 되어 버린다. 배트맨이란 존재는 악과 싸우기 위해서 어둠을 이용한다. 영화의 제목처럼 그는 "다크 나이트". 박쥐 가면 뒤에 숨어서 어둠과 맞서 어둠으로 대항하는. 그는 고담의 나약하고 비겁한 주민들이 마음속에 숨어 있는 다른 폭력과 악을 대신 표현하는 인물일 이다. 그래서 배트맨은 구세주가 되지 못한다. 어떤 때는 적으로 몰려버린다. 태생적 한계가 배트맨을 악과 선을 구분 짓는 선위에 있게 만들어 버렸다. 결국 사람들의 관점이 바뀔 때마다 상황이 바뀔 때마다 배트맨을 구별 짓는 행위는 언제나 변한다. 배트맨은 선과 악의 경계선 위에서 줄타기 곡예를 하고 있다.


 그에 반해서 조커와 하비 덴트라는 인물은 명확한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인물들로 보인다. 검사인 하비 덴트는 고담의 시민들에게 빛과 같은 구세주다. 배트맨 또한 그를 자신을 대신할 백기사로 인정하고 그를 돕는다. 그라는 존재가 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는 구심점이 있는 인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반면 조커는 중에 악이다. 같은 범죄자 무리에게도 서슴없이 공격을 가할 정도로 잔인하다. 그거 원하는 것은 돈도 권력도 아니라 그저 악에 대한 시험이다. 사람들이 가지는 악에 대한 기준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며, 하나의 동기가 있다면 절대 선하다고 평가 받는  인물마저도 악으로 돌변할 있음을 보여준다. 조커는 영리하게 서로에 대한 신뢰가 약한 인간들을 이용한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 존재하지 않기에 각자가 가진 약점들을 하나 둘씩 이용해서 그들에게 악을 행하게 만들어 버린다.


 조커의 영리함과 치밀함은 영화를 보는 내내 경탄을 자아낸다. 고인이 히스레저의 마지막 열정이 그대로 묻어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연기는 무섭고 불쾌하나 캐릭터는 소름 돋을 만큼 매력적이다. 주인공이 배트맨이 아니라 조커라고 생각해도 정도다. 니콜슨이 연기했던 조커가 만화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약간의 과장과 판타지 요소를 가진 허구적 인물이었다면, 히스레저의 조커는 현실에 실존할 있다는 존재가능성이 드러날 정도로 사실적 인물이다. 그래서 조커가 주장하는 악에 대한 시선이 무섭게 다가온다. 이런 공포는 점점 늘어나는 묻지마 범죄를 비롯한 면식범에 의한 잔인한 범죄가 증가하는 현실의 반영으로 보인다. 그래서 영화는 만화라는 원작을 바탕으로 판타지적 작품이 아니라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사실적 작품으로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것이 조커가 만들어낸 악의 공포를 극대화한다. 바로 지금 옆의 누군가도 어떤 개기를 통해서 악으로 변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제 신용위기와 높은 인플레이션이 촉발한 고통과 신뢰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사회현실과 맞물리면서 상승작용을 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황금만능주의가 만들어낸 탐욕과 배신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범죄자들 간의 신뢰 상실만을 보여주다가 점점 범위가 확대되어 간다. 법을 수호해야 검찰과 경찰에서부터 평범한 일반 시민들까지 조커에 의해서 실험 당한다. 조커의 마지막 실험은 2가지로 표출된다. 하나는 일반인들과 범죄자를 대립적인 구조로 만들어서 신뢰를 시험한다. 다른 하나는 절대선이라는 평가를 받는 하비 덴트에 대한 실험이다.


 결국에 하비 덴트의 변화로 조커의 실험은 성공한 처럼 보인다. 절대선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도 언제든지 악으로 변할 있다는 사실을 조커가 증명한 것이다. 하지만, 조커는 가장 쉽게 성공하리라 생각했던 번째 실험에서 실패하고 만다. 실험의 조건은 범죄자와 일반시민이라는 선악의 명백한 이분법으로 구분되어 있다. 하지만 의외로 평범한 사람들은 조커의 생각과는 다르게 움직인다. 그들은 갈등을 하게 되지만, 마음 깊이 있던 신뢰를 꺼낸다. 조커의 실험에 놀아나지 않고 사람 사이의 신뢰라는 것을 재확인하게 된다. 학창시절 윤리교과서에서 배웠던 성선설의 확인이랄까?


  영화는 이분법적 선악구별에 의문을 제기한다. 누구나 선과 악의 경계선에서 변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신뢰의 상실을 기반으로 아주 사소한 원인에서 기인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로 선에서 악으로 변화는 암울한 모습을 영화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관객들의 뇌리에 사회에 대한 절망감과 악의 강함을 심어준다. 하지만 영화의 결론은 사람들은 원래 선하다는 것은 조그만 신뢰만 있다면 선의 경계선을 지킬 있음을 보여준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분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선에 대한 신뢰라는 것이다.

2008년 8월 19일 화요일

어느 나라의 공산당 창당을 보면서......

 

  세계에 대표적인 반공주의 국가 중에 하나인 곳에서 공산당이 창당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만큼이나 내부적으로 좌우대립이 많았던 나라에서, 좌파 정권이 물러나고 우파정권이 출범한 나라에서. 반면에 한국에서는 여전히 우파의 탈을 매국노들이 빨간 콤플렉스를 자극하면서 갈등을 부추기는 상황과는 대조적이다. 한국에서 그랬다면 공산당 창당의 주역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을 것이다. 물론 나라도 한국과 비슷한 국가보안법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라에서는 법원의 판결로 법은 효력을 상실했다. 이것을 보면 나라의 구성원과 사회가 가지는 관용의 폭과 자신감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다. 여전히 국가보안법의 망령이 남아서 마녀사냥을 해대는 한국의 꼬라지는 정이 떨어진다. 장교로 군복무 중인 사람의 민노당 가입했던 전력과 대학시절 읽었던 책들을 문제 삼아 기소해 버린 사건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개인의 양심과 사상 생각에 대해서 작위적인 판단을 하는 전근대적인 쓰레기들의 귀환을 알리는 서막일 뿐이다.


 그런데 나라의 대통령의 벤치마킹 대상이 누구인지 안다면 놀라지 않을 밖에 없다. 나라의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벤치마킹 대상은 지금의 한국 대통령 2mb이다. 경선전략과 공약의 많은 부분을 벤치마킹 하면서 2mb처럼 집권에 성공을 이뤘다. 하지만 나라의 대통령의 행보는 2mb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보수정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대적 국가와의 관계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항공편을 개통하고 경제적 협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나라 국민들은 쉽게 적대국으로 여행을 있게 되었다. 기술과 자본을 가진 나라와 풍부한 노동력과 시장을 가진 적대국의 경제협력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유발할 것으로 보인다. 실용주의 노선을 내세웠던 2mb정권이 일방통행으로 열심히 삽질하며 대북관계를 악화시키기에 바쁜 상황에서 나라는 정말 실용주의 노선을 택했다. 이러한 결과는 철학이 없는 2mb 확실한 철학을 가진 마잉주의 차이일까?


 물론 대만의 우파와 한국의 우파는 다르다. 대만의 우파는 중국에 친화적인 반면 한국의 우파는 북한에 적대적이다. 이것은 한국만이 가진 특색으로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것은 너무 이념적 논쟁으로 빠질 수가 있다. 하지만, 실용주의를 표방하면서 출범한 정권이 보여준 것이 실용인지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정한 실용이었다면 남북긴장관계를 통해서 얻을 있는 것과 잃는 것을 계산하고 행동했어야 했지만, 그들의 지지기반인 반공세력의 굴레를 벗지 못했다. 물론 그들은 벗을 이유도 없었다. 반공세력이야 말로 그들의 핵심 세력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세뇌시켜 만들어 놓은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2mb 국내의 좌우 갈등을 통해서 편가르기를 강화함으로써 야당이나 좌파 세력에 대한 반감을 더욱 자극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에 2mb 얻고자 했던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의 회복이요 갈등과 분열의 극대화다. 원인은 언제나 좌파와 친북세력에게 돌려버리면 그만이다. 그를 추종하는 이재에 밝은 언론집단들이 그런 논리를 강력하게 뒷받침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우파들에게 공산당은 절대적인 공격의 대상이요. 두려움의 대상이다. 끝없이 몰락하고 있는 북한의 공산당이 과연 한국의 우파들에게 상대가 되는 것일까? 자만이 화를 부를 수도 있지만, 과잉반응은 쓸데 없는 국력낭비와 국론 분열만을 부를 뿐이다. 남남 갈등은 북한이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공사상을 강력한 통치이념으로 하는 한국의 매국우파들이 책동하는 것이다. 이런 과잉반응은 한국전쟁을 겪은 국민들의 트라우마를 계속 자극할 뿐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떤 이의 사상이나 생각 그리고 책동으로 무너질 있다라는 거짓된 공포를 무기로 국민들을 협박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한국은 지난 10년간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만들어 놓았던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했을 물론이고 IMF이전보다 더한 사상 검증 국가로 회귀했다. 국방부의 불온 서적 선정과 경찰들의 전근대적 인권에 대한 인식과 폭력진압, 정권의 시녀로 변해버린 검찰 모든 것이 back to the 80's .


 한국의 매국우파들에게 자유민주주의란 돈을 있는 자유다. 언론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돈을 있는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자유다. 한국의 매국우파들이 벌이는 추잡하고 더러운 부정부패와 착취 행위를 감시하는 가장 매의 눈이기 때문이다. 정격유착을 통한 이익의 극대화와 시장의 독점력을 강화해서 내수가격은 높게 수출가격은 낮게 책정할 있는 자유를 박탈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란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시장을 자신들의 보이는 손으로 지배하는 시장을 말하는 것이다. 눈에 띄게 시장을 장악하기에는 그들의 행위를 감시하는 눈이 너무나 많기에 그들은 매국우파들을 동원해서 경쟁을 강요한 천박한 시장주의라는 사상을 강력하게 주입하려 한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를 왜곡하고 교과서마저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어 만들어 낸다. 경찰과 매국언론 그리고 검찰을 동원해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세뇌 교육을 시작한다.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이자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KKK단이라는 인종차별주의 집단이 공공연하게 활동을 하고, 나치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공공연하게 활동하는 나라들을 보라. 링컨이 만들어 놓은 노예해방의 성과에 여전히 반대하는 집단이 존재하고 천박한 인종주의로 무장한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의 사상의 자유를, 세계를 전쟁의 공포로, 유대인들을 학살로 몰아세웠던 집단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의 사상의 자유를 보라. 이것이 자유민주주의가 아닌가? 법과 제도 그리고 정부가 그들의 사상을 검증하지도 처벌하지도 않는다. 단지 비이성적 집단들이 폭력적 행위나 위법적 행위를 행할 때만이 정부의 제제가 들어갈 뿐이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사상검증의 법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이상한 잣대로 불온 서적을 버젓이 선정하는 나라가 과연 자유민주주의 국가인가? 대만의 공산당 창당을 보면서 부러운 것은 공산당이라는 당이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사상을 검증하고 반공주의로 국민을 세뇌하던 정부가 역사의 안으로 사라졌다는 것이 부럽다.

내 마음의 깊이는? "쿠션"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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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의 존재 이유는 절대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기 위한 것이 아닐 것이다. 절대자라는 하나의 형상을 통해서 삭막한 현대 사회에서의 인간성 회복을 위한 바람이나 추구 때문일 것이다. 절대자라는 존재는 참된 인간상의 롤모델이자 추구할 목표이다. 절대자를 통해서 자신을 조금씩 반추하면서 자신의 내면의 인간다움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종교를 믿는 과정이자, 종교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꾸준히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중심을 차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사랑은 근본 바탕이요, 사랑의 실천은 종교의 존경과 성스러움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와 같이 종교는 많은 시간을 갈등과 반목 그리고 파괴를 가져다 주었다. 현재도 여전히 종교는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같은 종교적 기원을 가진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반목은 중세시대부터 지금까지도 지속 중이다.


 사랑의 가치를 가장 앞세우면서도 증오와 파괴를 부르는 이런 모순된 상황이 발생한 것일까? 가장 문제의 근원은 인간일 것이다. 종교를 통해서 자신의 인간성을 가다듬기 보다는 오히려 종교를 도구화해서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만족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저급한 인간성을 절대자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용서하고 정당화해 버림으로써 스스로가 인간이기를 포기해 버린다. 스스로가 책임져야 자신이라는 존재 안에 자신 대신에 절대자가 대신한다. 그래서 자신은 인간이기 보다는 절대자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열망한다. 그것이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이라는 거대한 무게를 훌훌 털어버리는 길이기에.


 종교에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밀어버리는 인간의 나약함은 자신의 가능성과 깊이를 없게 만든다. 그저 종교에 기복이나 빌면서 종교의 참된 의미마저 퇴색시킨다. 자신을 알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종교적 환상과 운에 자신의 인생을 맡겨 버린다. 외형 비교에만 열을 올리고 내면은 비교조차 하지 않는다. 자기의 마음을 자기가 조정하지 못하고 외부와 환경 그리고 절대자에게 맡겨버림으로써 내면은 존재 이유조차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스스로를 사회의 하나의 부속품으로 구속해버린다. 삶이 점점 고달퍼지고 힘들어지는 이유는 그런 구속이 우리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깊이를 재어봤는가? 남들과의 비교에 바빠서, 절대자의 맹신에 바빠서, 운에 자신의 인생을 맡겨버려서 그럴 여유조차 없지 않았던가? 인간관계를 위해서 상대방의 깊이를 재어보면서도 우리는 자신의 깊이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안치환의 노래 "소금인형" 가사를 보면 소금인형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바다를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뛰어 들었다. 인간이 어떻게 없는 위험하고 신비한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인 반면, 자신의 내면은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데도 주저하는 걸까? 자신을 열열히 사랑한 나르시스처럼 자신의 깊이는 세상을 포용할 정도로 깊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 걸까? 위험을 쉽게 감지할 있는 보이는 바다에 비해서 자신의 깊이는 보이지 않아서 인식조차 못하기 때문일까?


 "쿠션"이라는 책은 자신의 깊이에 대해서 생각할 있는 기회를 그로 인해서 자유를 얻는 방법을 전해준다.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바로"라는 인물을 통해서 비쳐지는 모습들이 언젠가 나의 모습일 수도 있고 평상시의 나의 모습일 수도 있기에 쉽게 공감하게 된다. 엄청난 유산을 남기고 돌아가실 할아버지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하지만 물질이나 보다 가치 있는 있는 교훈을 "response + ability = Liberty"라는 공식으로 보여준다. 물질에 종속되어버리고 사회와 환경에 종속되어버린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깊이 키우는 , 마음의 쿠션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있다는 것이다. "쿠션" 자신의 삶의 자유를 향한 조금 길잡이로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 있는 조그만 손거울이 같다.


쿠션 - 10점
조신영 지음/비전과리더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