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19일 화요일

내 마음의 깊이는? "쿠션"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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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의 존재 이유는 절대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기 위한 것이 아닐 것이다. 절대자라는 하나의 형상을 통해서 삭막한 현대 사회에서의 인간성 회복을 위한 바람이나 추구 때문일 것이다. 절대자라는 존재는 참된 인간상의 롤모델이자 추구할 목표이다. 절대자를 통해서 자신을 조금씩 반추하면서 자신의 내면의 인간다움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종교를 믿는 과정이자, 종교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꾸준히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중심을 차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사랑은 근본 바탕이요, 사랑의 실천은 종교의 존경과 성스러움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와 같이 종교는 많은 시간을 갈등과 반목 그리고 파괴를 가져다 주었다. 현재도 여전히 종교는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같은 종교적 기원을 가진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반목은 중세시대부터 지금까지도 지속 중이다.


 사랑의 가치를 가장 앞세우면서도 증오와 파괴를 부르는 이런 모순된 상황이 발생한 것일까? 가장 문제의 근원은 인간일 것이다. 종교를 통해서 자신의 인간성을 가다듬기 보다는 오히려 종교를 도구화해서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만족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저급한 인간성을 절대자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용서하고 정당화해 버림으로써 스스로가 인간이기를 포기해 버린다. 스스로가 책임져야 자신이라는 존재 안에 자신 대신에 절대자가 대신한다. 그래서 자신은 인간이기 보다는 절대자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열망한다. 그것이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이라는 거대한 무게를 훌훌 털어버리는 길이기에.


 종교에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밀어버리는 인간의 나약함은 자신의 가능성과 깊이를 없게 만든다. 그저 종교에 기복이나 빌면서 종교의 참된 의미마저 퇴색시킨다. 자신을 알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종교적 환상과 운에 자신의 인생을 맡겨 버린다. 외형 비교에만 열을 올리고 내면은 비교조차 하지 않는다. 자기의 마음을 자기가 조정하지 못하고 외부와 환경 그리고 절대자에게 맡겨버림으로써 내면은 존재 이유조차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스스로를 사회의 하나의 부속품으로 구속해버린다. 삶이 점점 고달퍼지고 힘들어지는 이유는 그런 구속이 우리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깊이를 재어봤는가? 남들과의 비교에 바빠서, 절대자의 맹신에 바빠서, 운에 자신의 인생을 맡겨버려서 그럴 여유조차 없지 않았던가? 인간관계를 위해서 상대방의 깊이를 재어보면서도 우리는 자신의 깊이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안치환의 노래 "소금인형" 가사를 보면 소금인형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바다를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뛰어 들었다. 인간이 어떻게 없는 위험하고 신비한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인 반면, 자신의 내면은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데도 주저하는 걸까? 자신을 열열히 사랑한 나르시스처럼 자신의 깊이는 세상을 포용할 정도로 깊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 걸까? 위험을 쉽게 감지할 있는 보이는 바다에 비해서 자신의 깊이는 보이지 않아서 인식조차 못하기 때문일까?


 "쿠션"이라는 책은 자신의 깊이에 대해서 생각할 있는 기회를 그로 인해서 자유를 얻는 방법을 전해준다.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바로"라는 인물을 통해서 비쳐지는 모습들이 언젠가 나의 모습일 수도 있고 평상시의 나의 모습일 수도 있기에 쉽게 공감하게 된다. 엄청난 유산을 남기고 돌아가실 할아버지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하지만 물질이나 보다 가치 있는 있는 교훈을 "response + ability = Liberty"라는 공식으로 보여준다. 물질에 종속되어버리고 사회와 환경에 종속되어버린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깊이 키우는 , 마음의 쿠션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있다는 것이다. "쿠션" 자신의 삶의 자유를 향한 조금 길잡이로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 있는 조그만 손거울이 같다.


쿠션 - 10점
조신영 지음/비전과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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