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11일 월요일

용서가 어려운 이유. 영화 "용서는 없다"를 보고.

 

 이상하게 우리나라에서 용서라는 단어를 먼저 꺼내는 사람은 주객이 전도된 경우가 많다. 용서를 빌어야 할 인간들이 과거의 일이라며 자신들의 과오를 하찮게 여기거나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그냥 용서하고 넘어가자고 말한다. 어떤 인간들은 비겁하게 한마디 더 덧붙인다. 미래를 위해서 과거를 덥자고.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치부에 대해서 드러내놓고 사과할 용기조차 없는 비겁한 인간들이다. 어떻게든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려고 하거나 때론 감추려하고 어떤 경우에는 이념적 색깔을 뒤집어 씌워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러는 사이에 피해자들은 여전히 그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분노를 가슴에 억누르고 살면서도 언제든 용서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거대한 보상금도 아니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복수도 아니고, 단지 가해자들의 진심에서 나온 사죄의 한마디 뿐인데도 사죄하는 인간들은 없고 용서를 구하는 인간들도 없다. 오히려 권력과 부를 장악해서 자신들은 떵떵거리면서 호의호식하고 있다. 과거의 고통이 현재의 고통으로 이어지고, 과거의 부정과 폭력은 현재의 부와 권력으로 이어지는 세상이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상황이 이런데도 어떤 인간들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분노에 대해서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함부로 말한다.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지 않는 상황에서 과연 누가 용서를 한단 말인가? 사죄를 구하지 않은 침묵하는 피해자들이 나서서 가해자에게 사죄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을 용서해가 아니라, 상처를 다시 들쑤시기 싫어서 아픔에 대한 기억들을 스스로 지워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런 상황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용서를 받았다는 식으로 해석해 버린다. 침묵하는 다수의 피해자들은 한마디로 용서해서가 아니라 상처를 잊으려 하기 때문인데도.

 

 영화 "용서는 없다."는 이런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서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 피해자의 복수를 다루고 있다. 복수를 실행하는 이성호(류승범)와 또 다른 복수의 화신이 되어 버리는 부검의 강민호(설경구)의 치열한 대결은 영화 전반을 이끌어 간다. 연기 잘하는 배우로 평가 받는 설경구와 류승범이 각각 역할을 맞아서 팽팽한 긴장감을 영화 내내 유지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용서에 대해나 심각한 탐구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방식으로 피해자의 아픔을 가해자가 직접 느끼도록 만들어 버린다.

 

 이런 식의 복수는 커다란 아픔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봤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법이 있고, 다양한 상황변수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쉽게 실현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 분노의 마음이나 복수의 꿈은 결국에 피해자의 상처를 더 곪게 만든다. 그런데 그들은 잘 알고 있다. 분노와 복수의 마음이 얼마나 자신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가는지를. 그래서 가해자를 용서하거나 잊는 것이 자신의 심신 건강에 더 좋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어떤 책에 재미있는 우화가 하나 있었다. 말을 함부로 하고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에게 아버지는 나무 울타리에 수십 개의 못을 박도록 시켰다. 아이가 못을 다 박았다고 하자, 그 아버지는 아이에게 다시 그 못을 뽑으라고 시켰다. 그래서 아이는 그 못을 다 뽑고, 다시 아버지에게 다 뽑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못 자국이 숭숭 있는 나무 울타리를 가리키며 아들에게 말했다. "울타리에 선명한 못 자국이 보이니? 이 울타리가 예전처럼 말끔해지기는 힘들 것 같구나. 네가 화가 나서 내뱉는 말들은 이 못 자국처럼 흔적을 남긴단다. 네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나서 아무리 미안해한들 그 흔적을 지울 수 없듯이 말로 새긴 상처도 때로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을 명심해라."라고 했다.

 

 이렇듯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다른 어떤 이의 가슴에 남긴 상처도 지울 수 없는 것이 되는데, 하물며 다른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상처의 자국은 어떻겠는가? 경험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상처의 깊이에 대해서 너무 쉽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듯, 이성호는 강민호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새겨버린다. 영화는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놓은 상태에서 전개된다. 그래서 영화는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의 팽팽함을 주지 않는다.

 

 대신, 강민호가 딸을 구하려는 부성애에 기대어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다 보니 딸을 찾기 위한 강민호의 몸부림과 이성호를 무죄로 만들기 위해서 증거를 조작하는 강민호의 행동을 통해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고, 영화를 잘 끌어나간다. 그래서 이 영화의 반전은 범인의 정체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어떻게 이성호가 강민호에게 죽을 만큼 괴로운 상처를 새기는지가 영화의 커다란 반전으로 작용한다. 어떻게 보면 잔인하고, 정말 충격적인 반전이다. 그런데 그러한 반전이 전해주는 큰 충격이 왜 영화의 제목이 "용서는 없다"라는 것인지를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

 

 "죽는 것 보다 용서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성호의 대사는 용서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암시하는 대사다. 뿐만 아니라, 이 대사는 강민호가 이성호의 입장이 되었을 때의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에 대한 복선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결말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반전의 잔인함 만큼 영화의 엔딩 또한 무겁고 어둡다. 이러한 엔딩을 통해서 용서한다는 행위자체가 피해자들에게 또한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문득, 어떤 책에서 읽었던 용서에 대한 이런 문구가 생각난다. "용서를 할 때는 이미 용서한 잘못뿐만 아니라, 용서 자체도 잊혀져야 한다.". 당신은 이 같은 용서를 해 본적이 있는가? 그런대 생각해 보니 이성호는 누군가에게 사죄를 받아 본적이 없다. 결국 용서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는 인간들의 어리석은 속마음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 말부터 먼저 하는 것이 우선인 것 같다. 영화 속의 이성호와 같은 아픔을 이해하고, 당신은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어본 적이 있는가? 생각해보면 용서가 어려운 것은 진심으로 사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만큼 우리는 사죄에 인색하게 사는지도 모른다.

 

2010년 1월 9일 토요일

은빛연어의 미투데이 - 2010년 1월 9일

이 글은 은빛연어님의 2010년 1월 9일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이게 너희가 사는 세상이야. 책 "생태요괴전"을 읽고..

 

 얼마 전에 자주 가는 사이트에 이런 질문이 올라왔다. "지금의 청년실업의 문제가 고졸만의 문제인가?".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는 지금의 20대들의 심각한 현실과 고민들이 가득 묻어남과 동시에 현실에 대한 한탄과 절망감이 같이 묻어나는 질문이었다. 그 사이트의 이용자들이 주로 10대와 20대들이다 보니 대부분의 답변은 열심히 공부해서 취업하라는 소리 뿐이다. 그 질문을 올린 사람이 열심히 안 해서 지금의 문제에 직면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과연 지금의 20대들이 지금의 기득권층이 되어버린 세대에 비해서 열심히 안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독한 취업경쟁으로 인해서 대학생활의 낭만이라는 말은 추억이 된지 오래고, 스팩 쌓기가 대학생활의 큰 목표가 되어 버린 지금의 20대들에게 말이다. 자신의 대학생활은 생각해보지 않고, 지금의 20대가 게으르고 패기도 없고 나태하다는 식의 막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지금의 기성세대이다.

 

 지금의 기성세대는 지독한 물신주의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어떻게든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비도덕적인 방법이라도 상관하지 않으며 어떻게든 그들이 숭배하고 있는 것들을 차지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경쟁이라는 놈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게 된다.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에게는 패배자라는 딱지와 함께 제기할 기회조차 없는 가혹한 사회를 만들어 버렸다. 아무리 안철수 교수가 실리콘 벨리는 실패의 요람이고, 우리 사회에서도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 설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외치고 다닌다고 해도 그런 가혹한 사회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과도한 탐욕으로 현실을 제대로 바로 볼 수 있는 이성적 판단이 이미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생명의 가치라는 것은 언제나 돈의 가치로 평가해버린다. 용산사태의 본질은 개발의 광풍에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생존권을 찾으려는 몸부림이다. 용산의 사람들이 치열할 수 밖에 없었고, 결연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신주의의 숭배자들은 간단히 그들의 생명에 대한 가치와 정당한 요구를 묵살해 버린다. 돈 때문이라는 한 마디로. 생각 같아서는 면전에다 대고 당신이라면 그 딴 돈 때문에 목숨 걸 수 있겠냐고 묻고 싶으나, 분명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런 물신주의자들은 자신이 그럴 수 있으니까 남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 과연 얼마나 자신이 원하는 물질적인 부와 권력을 얻었을까? 통계적으로 본다면 5% 정도는 될까? 이제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어 버린 "종부세"쯤은 낼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그들이 추구한 부를 얻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나머지 95%의 사람들은 뭐가 될까? 그들은 그렇게 치열하게 물신을 숭배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경쟁 속에서 아등바등 거리는 처량한 신세다. 이 사람들의 특징이라면 자신의 이득보다는 저 상위 5%의 사람들을 위해서 움직이는 좀비들이랄까? 정부의 정책이나 제도에 대해서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배제하고 5%의 사람들을 위해서 움직인다. 뇌는 없고 단지 본능에 충실한 좀비들. 그들은 자신의 본능이라는 것이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지 모른다. 그들은 "노동자가 노예냐"는 나의 질문에 "노예"라고 당당히 말씀하시는 나의 아버지 같은 그런 사람들이다. 자신이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의 가치나 의미를 전혀 모르는.

 

 그럼 지금의 기성세대에 비해서 20대나 10대가 달라질까? 별차이는 없어 보인다. 우석훈 교수는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지금의 기성세대와는 다른 20대들을 많이 만나봐서 그런지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라는 책을 썼지만, 나는 쉽게 그런 사람들을 발견할 수가 없다. 전부 패배의식에 쩔어서 어떻게든 좋은 학벌만을 추종하고, 더 높은 연봉을 향해서 맹목적인 경쟁 중인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현식 인식 또한 기성세대와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이 글의 처음에 언급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나는 기성세대의 책임론을 거론했다. Mb와 딴나라당 그리고 기성세대를 쓰레기라고 규정하고, 지금의 20대는 사회에 처음으로 진출하기 때문에 사회적 자본을 비롯한 정치적 힘이 없어서 더 착취당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나는 20대들에게 깨어있음을 강조했고, 연대를 통해서 정치력을 키우라고 주문했다. 기본적으로 많이 공감하는 우석훈 박사와 박노자 교수의 글들의 틀 안에서 제대로 된 현실을 보라는 뜻에서 과격하게 썼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공감하는 사람도 있었고, 문체를 문제 삼는 사람도 있었고,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문체나 어투를 문제 삼는 사람은 내 전반적인 글의 내용에 동의를 표했다. 물고 늘어지는 내가 귀찮아서 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반박이라고 하는 수준이 말꼬리 잡기나 하면서 자신도 정치를 꿈꾼다고 말하는 꼬라지는 정말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주주자본주의가 중심이 된 기업은 기술개발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다는 글에 뜬 금 없이 현대의 과학기술의 발전이 과거에 비해서 더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다는 답변을 보면서, 나는 글의 문맥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수준으로 정치를 꿈꾸는 용감함에 그저 박수를 보낼 뿐이다. 그가 이 박수의 의미를 알아 챌지는 모르겠다.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도 미숙한 존재인데, 나보다 미숙한 존재가 있다고 한들 내가 뭐라고 할 것인가. 단지 나의 조롱과도 같은 박수의 의미는 화가 나서, 나 같은 놈을 밟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라는 것을.

 

 나는 나 같은 인간 밟아 벌리고 잘난 척 할 수 있는 10대나 20대들을 좋아한다. 지킬 것이 많은 인간들과 달리 내가 지켜야 할 것은 없기 때문에. 나 같은 인간 밟아 버리고 제대로 세상을 비판하고 바꾸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행복하겠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받아온 교육과 부모들이 보여주는 모습으로 인해서 그대로 그들은 부모들의 물신주의를 답습하기 때문이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과 닮은 자녀를 보면서 깜짝 놀라서 자신을 반성해야 되는데 기성세대와 좀비들은 오히려 좋아한다.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것을 자녀들은 이뤄주기 바라는 욕망을 오히려 자식들에게 투영까지 한다. 그래서 10대나 20대들은 기성세대와 다를 수가 없어 보인다.

 

 그럼 이대로 살아야 할까? 그럼 현실은 더 각박해지고 절망적이지 않은가? 이제라도 어떻게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변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물신주의를 뛰어 넘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거나 만들 수 있는 생각과 힘이 생길까? 이미 온갖 고정관념과 편견 그리고 이데올로기로 찌들어 있는 기성세대가 변한다는 것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일 것이고, 아직 지식과 정보를 쉽게 습득하고,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없는 10대와 20대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쉽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깨어나야 하지 않을까? 제대로 현실을 인식하고 무엇인 잘못된 것인지를 바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우석훈 박사의 "생태요괴전"은 그런 현실을 다양한 요괴들의 은유나 메타포를 활용해서 쉽고 재미있게 펼쳐 보인다.

 

 10대들의 겨냥해서 쓰여진 책이라서 그런지 어려운 이야기들은 전혀 없다. 아니 20대 이상도 꼭 읽어야 할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오히려 이 사람이 경제학자인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영화에 대한 박식함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현상과 문학작품이나 철학저작물에 대해서 박식함을 뽐내면서 자신이 10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펼쳐 보이는 것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올 뿐이다. 다만 요괴들과 현실을 같은 선상에 놓음으로써 지금의 현실을 너무 우울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물론 나는 이런 우울한 분위기 좋아한다. 그게 바로 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만,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현실과 다른 사실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하는 행위가 부인이나 외면인 것처럼 이 책이 조금은 외면 받을까 하는 기우에서 그런 생각이 든다.

 

생태요괴전 - 10점
우석훈 지음/개마고원

2010년 1월 8일 금요일

재미있는 풍자와 오락성을 갖춘 영화 하지만 아쉬운. 영화 "전우치"를 보고.

 

 '범죄의 재구성'이나 '타짜'를 보면서 좋아하게 된 최동훈 감독. 그가 한국형 히어로 영화인 "전우치"를 만든다고 했을 때부터 상당히 큰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제작에 들어간다는 기사를 접하고부터 개봉일을 하루하루 손 꼽아가면서 기다리다, 10월에 개봉하기로 했다고 12월에야 개봉한다고 했을 때, 한 편으로는 기다림이 길어진다는 큰 실망감과 다른 한 편으로는 제작 기간이 늘어난 만큼 완성도는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분명 이 영화는 오락영화로서의 충분한 완성도와 재미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는 많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최동훈 감독이 이전 작품에서 보여준 연출력인데 반해서, 이 영화에서는 최동훈 감독의 개성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영화 "전우치"는 최동훈의 "전우치"가 아니라 최동훈이 만든 "전우치"가 되어 버렸다.

 

 이 영화에는 최동훈 감독의 개성은 많이 존재하지 않지만, 영화 캐릭터들의 설정이나 묘사는 참 매력적이다. 아무리 오락 영화라도 사회비판적 풍자와 묘사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캐릭터를 중심으로 해서 영화를 감상한다면 또 다른 매력이 존재한다. 이야기는 전우치를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특히 주변부의 인물들에 집중해서 봐야 한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과거나 현재의 정치인들을 제대로 풍자한다. 과거의 풍자가 더 멋진 것은 절대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왕을 멋지게 조롱하는 전우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현대의 풍자는 그 매력이 덜한대, 전우치의 대사를 통해서 과거나 현재나 위정자들은 변하지 않았다 식으로 간단히 처리 해버린 것이 조금은 아쉽다. 망나니에 천박지축인 전우치가 고위 공직자들을 조롱함으로써 정치인들의 수준이 그런 전우치 보다 못하다는 것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것 또한 임금 면전에서 조롱하던 모습에 비해서 강도가 많이 약하다.

 

 망나니 전우치 대 부패 정치인의 대비는 사적 영역의 부패와 공적 영역의 부패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의 국민성은 사적 영역의 부패를 더 커다랗게 문제를 삼는다. 연애인들의 스캔들이나 부정은 크게 문제 삼으면서도, 정치인들의 부패나 문제에 대해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식으로 관용한다. 그것은 이미 얼마나 많은 부패를 저질러야 정치인의 자리에 오를 수가 있다는 것은 머리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적 영역에서의 부패에 관용적인 것은 이것은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 또는 잘못을 바꾸려 노력이 권력 앞에서는 어김없이 무너지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상의 지속적인 학습에 따른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는 묻는다. 어느 것이 더 부패한 것이고 더 큰 문제인지를. 망나니 전우치인가 아니면 부패한 정치인인가라고.

 

 그러나 영화는 커다란 부패한 정치인을 조롱해서 보여 주는 카타르시스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 부패한 정치인의 묘사가 미약하다. 영화가 설정하고 있는 전우치의 라이벌이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흘러가는 풍자의 수준에서 머무르기 때문이다. 화담이라는 존재가 정치인이라는 존재보다 더 큰 힘과 위력을 가지고 있고, 더 악랄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치인에 대한 풍자가 묻혀버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관객들은 화담이라는 악에 더 큰 감정이입을 하게되고, 정치인의 풍자에 대해서는 큰 감정이입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이렇게 되면 더 주목해야 될 것은 전우치와 화담과의 대결이다. 김윤석이 연기한 화담이라는 캐릭터가 타짜의 "아귀"같은 악랄함은 덜하는 것이 조금은 아쉽게 다가오지만, 화담이 선한 도사에서 악한 악귀로 변화하는 과정의 개연성을 부여하고 있어서 극단적으로 악한 캐릭터로의 변화보다는 오히려 지금 영화에 설정된 화담의 캐릭터가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전우치와 화담의 대결에서 큰 긴장감이 없다. 절대 악인 악귀와 덜 악하고 덜 착한 전우치와의 대결이라서 그런 그런지 극단적인 감정의 대립이 없다. 담담하게 영화를 바라보게 만든다.

 

 절대악 대 악과 선이 공존하는 어정쩡한 존재. 그것의 대립은 우리의 정치판이다. 전우치 대 정치인은 인물이라는 틀을 내에서만 머물렀다면, 화담과 전우치의 대립은 인물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사회의 커다란 틀을 속에서 풍자적 모습을 보여준다. "악보다는 차악을"이란 이 말은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닌가? 정치판에서 이 말을 많이 쓴다. 정치적 혐오로 국민들의 무관심이 극에 달해서 자신의 주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국민들에게 외치는 구호인 것이다. 정치판의 추잡함이 만들어낸 정치혐오로 야당이나 여당이나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만연한 인식을 깨뜨리기 위한 하나의 자구책이기는 하지만 결코 전우치와 같은 차악의 존재성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모두가 같은 종류로 평가 받는다. 결국 우리의 정치판이 개선되기는 커녕 맹목적인 추종만 남아서 이전투구만을 반복하는 형국이다.

 

 차악으로 악을 벌한다라는 전우치적 교훈은 어쩌면 너무나 씁쓸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자식들이 어릴 때는 착하게 살아라고 충고하던 부모들도 자식들이 하나 둘 씩 나이를 먹어갈 때 쯤에는 자신들의 속물주의 근성과 사상을 그대로 투영시켜서 착하면 세상을 살 수 없다라고 가르치는 현실을 말이다. 선으로 악을 벌하기에는 우리사회에서 선이라는 존재는 없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인식에도 그런 인식은 천연기념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나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조금이라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이 되기를 바라는 이들은 차악으로라도 악을 벌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대 차악 마저도 구분하지 못하고 경멸하는 사회의 풍조는 더욱 절망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렇게 악과 차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존재가 영화 속 캐릭터로 표현되고 있다. 바로 3명의 신선들이다. 신선이라면 위엄있고, 절대 선이어야 하지만, 영화의 신선들은 무능하고 멍청하기까지 하다. 선악에 대한 구분을 명확히 하지 못하는 우둔한 존재들이다. 이 선인들의 문제가 무엇이냐면 자기 자신들이 아주 높은 위치에 있어서 세상을 통찰하는 아주 똑똑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의식 속에서 상황 판단력을 상실한다. 화담과 전우치에 의존하게 되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자신이 주권을 가진 국민으로 정치인들 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들과 똑같다. 정치인들의 부패에 대해서 욕을 하고 비판을 하면서도 정작 선거만 되면 자신의 주권을 맹목적으로 특정 정당만 지지하는 무식함과 말이다.

 

 특히 3명의 선인의 현대적 모습을 신부, 무당(or 점술가) 그리고 승려로 설정함으로써 이런 풍자는 정점을 찍는다. 각기 우리사회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종교적이거나 신앙적 가치들인데, 그것을 이런 식으로 풍자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이성적이지 못하고, 어딘가에 의존적인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신선으로 야훼와 같은 초월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야훼를 믿으라고 말하는 아이러니 같은 대사와 상황이다. 이런 아이러니 즉 모순 같은 상황에 우리가 살고 있고, 그런 모순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전우치"에서 제일 중요한 존재로 등장하는 것이 어쩌면 "서인경"이라는 캐럭터다. 영화 속에서는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서 존재 자체가 너무 미미해 보일 정도 이지만. 서인경은 소심하고 개성도 없고,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무색무취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 없이 착하기도 하지만 때론 커피에 침을 뱉어서 자신이 맞고 있는 배우에게 가져다 주기도 할 정도로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화담에 주술에 의해서 악인이 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서인경"이라는 존재는 가장 어중간한 형태로 개성이 없는 존재다. 이러한 존재에서 감독은 우리 일반 대중들의 모습을 찾으려는 것 같다. 즉, 인간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고 그냥 백지 같은 존재이지만, 어떤 것에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서 악한이 되기도 하고 선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평범한 인식을 내비치는 것 같아서 실망스런 느낌이 든다.

 

 이렇듯 이 영화는 오락적 재미와 풍자가 더해지면서 잘 만들어진 "웰메이드 영화"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그냥 즐겁게 영화를 봤다는 정도에서 그쳐버린다. 최동훈 감독의 강한 개성은 쉽게 찾을 수가 없고, "서인경"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무지한 대중들을 비판하기 보다는 이해한다는 수준에서 자신의 생각을 끝내 버린 것이다. 좀 더 대중과 정치를 조롱하고 풍자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더 큰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