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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0일 토요일

fun과 지루함 사이의 청춘들. 책 "연꽃도시"를 읽고.

 

 "한한"이란 중국 작가를 알게 것은 우연히 집어 들고 읽은 "삼중문"이라는 소설 때문이다. 신문이나 다른 정보 루트를 통해서 작가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중국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에 이것 저것 고르다 표지 날개 쪽에 나와있는 저자의 이력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서 읽었다. 중국에서 뜨고 있는 신세대 작가라나. 소설 한편으로 중국에서 대단한 부를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 아이콘으로써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고 하니. 우리나라 작가로 비교해 보자면 "귀여니"정도 될까? 작가 모두 10 시절에 발표한 소설이 인기를 끌고 대중들의 환호를 받았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귀여니" "한한" 비교하면, 실제로는 먹을지도 모르겠다. 평론가들과 대중의 고른 지지를 받는 "한한" 10 소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귀여니" 비교했으니. "귀여니" 작품은 소녀적 감수성과 판타지만을 충족시켜준다면,  "한한" "삼중문" 같은 경우는 중국의 교육시스템을 비판함을 물론이고, 학창시절 감수성 예민한 10대들의 고민과 생활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거기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책의 곳곳에 펼쳐 보이는 중국 고전 문구와 재기 넘치는 해석은 "한한"이라는 작가가 평범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있다. "삼중문" 그의 데뷔작이라서 그런지 조금은 정제되지 못하고 투박한 문체들이 조금 눈에 띄는데, 속의 10 주인공의 방황과 고민들과 어우러져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삼중문" 작가의 10 시절 현실과 고민에 대해서 작품이라면, "연꽃도시" 20대의 현실과 고민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시나브로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흐름에 작가는 자기가 있는 시간 속의 현실을 작품을 그려내고 있는 같다.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만, 자기 자신이 속한 세대의 이야기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많이 고민하고 이야기 있는 것이 세대의 당사자들이니까. 그래서 작품에 중국의 20대들은 작품에 공감해 열광하고, "한한"이라는 인물을 하나의 아이콘을 만들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연꽃도시" 중국 20대들의 무기력함과 방황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풍겨지는 느낌이 참묘하다. 어딘 모르게 유쾌한 같으면서도 우울함이 동시에 풍긴다. 만약 책이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청춘들의 고뇌가 담겨있다면 어두운 책이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우울할지언정 무겁지 않게 자신 세대의 고민과 상황을 이야기한다. 풍요로운 세대답게 생존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인생의 행복에 대해서 고민하는 세대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행복이라는 말로 책에 나오는 청춘들을 이야기하기에는 부적합한 같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fun이요, 그들이 견디지 못하는 것은 지루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속에 일어나는 행위들은 인생의 커다란 목표가 아니라 fun위한 것들일 뿐이다.

 

  책은 조지 오웰이 "1984" 통해서 미래 사회가 감시와 통제의 "빅브라더"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구 민주사회가 춤추며 꿈길 속을 헤매다 스스로 망각 속으로 빠져들어 나란히 속박당하게 되리라고 확신했던 헉슬리가 생각한 사회를 보여준다. 정신이 황폐화되면서 즐거움에만 매몰된 인류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Fun에만 매몰하는 소설 속의 20대들은 바로 그런 존재들의 모습인 것이다. 정신의 황폐화, 즐거움의 추구. 모든 것은 결국에 지독한 물신주의와 탐욕이 결합해 만들어낸 정신의 황폐화 결과이자 과정인 것이다. 결과들이 이제 20대를 중심으로 아래로 동시에 확산되고 있으며, 한한은 그런 사회의 모습과 인간상을 "연꽃도시"라는 가상의 도시를 통해서 정말 매력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너무나 지금의 현실을 통찰한 한한의 소설은 우울함과 재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것 또한 fun 추구하는 20대의 성향을 반영한 작가의 뛰어난 계산된 결과로 보인다. 그렇다면 책은 우울함과 재미에 빠져 희망은 없는가? 개인적으로 책은 그렇게 희망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소설에 마지막까지 주요인물들은 그렇게 변화를 일으키거나 성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전반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그들이 쉽게 성찰하거나 변할 요소가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한은 인간의 생존본능이 어떤 것인가를 마지막에 보여준다. 목적이 없어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도 살기 위해서 행동에 나서는 그런 인간의 모습을. 어쩌면 그게 인간에게 가장 희망적인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연꽃도시 - 8점
한한 지음, 박명애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2010년 1월 9일 토요일

이게 너희가 사는 세상이야. 책 "생태요괴전"을 읽고..

 

 얼마 전에 자주 가는 사이트에 이런 질문이 올라왔다. "지금의 청년실업의 문제가 고졸만의 문제인가?".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는 지금의 20대들의 심각한 현실과 고민들이 가득 묻어남과 동시에 현실에 대한 한탄과 절망감이 같이 묻어나는 질문이었다. 사이트의 이용자들이 주로 10대와 20대들이다 보니 대부분의 답변은 열심히 공부해서 취업하라는 소리 뿐이다. 질문을 올린 사람이 열심히 해서 지금의 문제에 직면했는지 정확히 수는 없지만, 과연 지금의 20대들이 지금의 기득권층이 되어버린 세대에 비해서 열심히 안하고 있다고 말할 있을까? 지독한 취업경쟁으로 인해서 대학생활의 낭만이라는 말은 추억이 된지 오래고, 스팩 쌓기가 대학생활의 목표가 되어 버린 지금의 20대들에게 말이다. 자신의 대학생활은 생각해보지 않고, 지금의 20대가 게으르고 패기도 없고 나태하다는 식의 막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지금의 기성세대이다.

 

 지금의 기성세대는 지독한 물신주의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어떻게든 많은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비도덕적인 방법이라도 상관하지 않으며 어떻게든 그들이 숭배하고 있는 것들을 차지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경쟁이라는 놈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게 된다.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에게는 패배자라는 딱지와 함께 제기할 기회조차 없는 가혹한 사회를 만들어 버렸다. 아무리 안철수 교수가 실리콘 벨리는 실패의 요람이고, 우리 사회에서도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 설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외치고 다닌다고 해도 그런 가혹한 사회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과도한 탐욕으로 현실을 제대로 바로 있는 이성적 판단이 이미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생명의 가치라는 것은 언제나 돈의 가치로 평가해버린다. 용산사태의 본질은 개발의 광풍에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생존권을 찾으려는 몸부림이다. 용산의 사람들이 치열할 밖에 없었고, 결연할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신주의의 숭배자들은 간단히 그들의 생명에 대한 가치와 정당한 요구를 묵살해 버린다. 때문이라는 마디로. 생각 같아서는 면전에다 대고 당신이라면 때문에 목숨 있겠냐고 묻고 싶으나, 분명 그럴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런 물신주의자들은 자신이 그럴 있으니까 남도 그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 과연 얼마나 자신이 원하는 물질적인 부와 권력을 얻었을까? 통계적으로 본다면 5% 정도는 될까? 이제는 있으나 마나 것이 되어 버린 "종부세"쯤은 있는 정도는 되어야 그들이 추구한 부를 얻었다고 있지 않을까? 그럼 나머지 95% 사람들은 뭐가 될까? 그들은 그렇게 치열하게 물신을 숭배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경쟁 속에서 아등바등 거리는 처량한 신세다. 사람들의 특징이라면 자신의 이득보다는 상위 5% 사람들을 위해서 움직이는 좀비들이랄까? 정부의 정책이나 제도에 대해서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배제하고 5% 사람들을 위해서 움직인다. 뇌는 없고 단지 본능에 충실한 좀비들. 그들은 자신의 본능이라는 것이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지 모른다. 그들은 "노동자가 노예냐" 나의 질문에 "노예"라고 당당히 말씀하시는 나의 아버지 같은 그런 사람들이다. 자신이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의 가치나 의미를 전혀 모르는.

 

 그럼 지금의 기성세대에 비해서 20대나 10대가 달라질까? 별차이는 없어 보인다. 우석훈 교수는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지금의 기성세대와는 다른 20대들을 많이 만나봐서 그런지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라는 책을 썼지만, 나는 쉽게 그런 사람들을 발견할 수가 없다. 전부 패배의식에 쩔어서 어떻게든 좋은 학벌만을 추종하고, 높은 연봉을 향해서 맹목적인 경쟁 중인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현식 인식 또한 기성세대와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글의 처음에 언급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나는 기성세대의 책임론을 거론했다. Mb 딴나라당 그리고 기성세대를 쓰레기라고 규정하고, 지금의 20대는 사회에 처음으로 진출하기 때문에 사회적 자본을 비롯한 정치적 힘이 없어서 착취당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나는 20대들에게 깨어있음을 강조했고, 연대를 통해서 정치력을 키우라고 주문했다. 기본적으로 많이 공감하는 우석훈 박사와 박노자 교수의 글들의 안에서 제대로 현실을 보라는 뜻에서 과격하게 썼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공감하는 사람도 있었고, 문체를 문제 삼는 사람도 있었고,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문체나 어투를 문제 삼는 사람은 전반적인 글의 내용에 동의를 표했다. 물고 늘어지는 내가 귀찮아서 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반박이라고 하는 수준이 말꼬리 잡기나 하면서 자신도 정치를 꿈꾼다고 말하는 꼬라지는 정말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주주자본주의가 중심이 기업은 기술개발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 발전하지 못한다는 글에 없이 현대의 과학기술의 발전이 과거에 비해서 더했으면 했지 덜하지는 않다는 답변을 보면서, 나는 글의 문맥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수준으로 정치를 꿈꾸는 용감함에 그저 박수를 보낼 뿐이다. 그가 박수의 의미를 알아 챌지는 모르겠다.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도 미숙한 존재인데, 나보다 미숙한 존재가 있다고 한들 내가 뭐라고 것인가. 단지 나의 조롱과도 같은 박수의 의미는 화가 나서, 같은 놈을 밟아 버릴 있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라는 것을.

 

 나는 같은 인간 밟아 벌리고 잘난 있는 10대나 20대들을 좋아한다. 지킬 것이 많은 인간들과 달리 내가 지켜야 것은 없기 때문에. 같은 인간 밟아 버리고 제대로 세상을 비판하고 바꾸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행복하겠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받아온 교육과 부모들이 보여주는 모습으로 인해서 그대로 그들은 부모들의 물신주의를 답습하기 때문이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과 닮은 자녀를 보면서 깜짝 놀라서 자신을 반성해야 되는데 기성세대와 좀비들은 오히려 좋아한다.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것을 자녀들은 이뤄주기 바라는 욕망을 오히려 자식들에게 투영까지 한다. 그래서 10대나 20대들은 기성세대와 다를 수가 없어 보인다.

 

 그럼 이대로 살아야 할까? 그럼 현실은 각박해지고 절망적이지 않은가? 이제라도 어떻게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변할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물신주의를 뛰어 넘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거나 만들 있는 생각과 힘이 생길까? 이미 온갖 고정관념과 편견 그리고 이데올로기로 찌들어 있는 기성세대가 변한다는 것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일 것이고, 아직 지식과 정보를 쉽게 습득하고,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없는 10대와 20대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쉽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깨어나야 하지 않을까? 제대로 현실을 인식하고 무엇인 잘못된 것인지를 바로 인식할 있게 만들어야 한다. 우석훈 박사의 "생태요괴전" 그런 현실을 다양한 요괴들의 은유나 메타포를 활용해서 쉽고 재미있게 펼쳐 보인다.

 

 10대들의 겨냥해서 쓰여진 책이라서 그런지 어려운 이야기들은 전혀 없다. 아니 20 이상도 읽어야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정도다. 오히려 사람이 경제학자인가라는 의문이 정도로 영화에 대한 박식함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현상과 문학작품이나 철학저작물에 대해서 박식함을 뽐내면서 자신이 10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펼쳐 보이는 것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올 뿐이다. 다만 요괴들과 현실을 같은 선상에 놓음으로써 지금의 현실을 너무 우울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물론 나는 이런 우울한 분위기 좋아한다. 그게 바로 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만,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현실과 다른 사실을 접했을 가장 먼저 하는 행위가 부인이나 외면인 것처럼 책이 조금은 외면 받을까 하는 기우에서 그런 생각이 든다.

 

생태요괴전 - 10점
우석훈 지음/개마고원

2010년 1월 4일 월요일

배워야 할 치열한 고전 읽기와 그 기록들. 책 "청춘의 독서"를 읽고.

 

 독서를 하다 보면 느끼는 것은 독서라는 행위 자체가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책을 집어 들고, 책을 편친 다음, 페이지씩 넘겨가면서 찬찬히 눈으로 글의 흐름을 쫓아서 읽고, 머리를 이용해 받아들인 내용을 상상하거나 이해하는 모든 과정은 누가 해줄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밖에 없는 행위이다. 이렇게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책의 저자와 나라는 존재만이 지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독서라는 행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이 밖에 없다.

 

 그런데 정답을 딱딱 찍는 교육을 받아와서 그런지 몰라도, 그런 지극히 개인적인 지적 활동을 하다 보면 내가 지금 이해하고 받아들인 내용이 과연 정확한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생긴다. 독자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설이라는 분야는 나름의 느낌이나 감상이 중요하다고 쳐도, 분야의 책들에 대해서는 독서를 하는 내내 그리고 독서를 끝내고 나서도 의문을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독서행위와 다른 사람이 독서행위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이 다른 이들의 독서 기록들이다.

 

 요즘은 블로그나 인터넷 서점이 발달해서 쉽게 다른 이의 독서 기록들을 엿볼 있다. 나도 리뷰를 블로그를 통해서 열심히 남기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블로그나 인터넷 서점의 리뷰나 서평은 보지 않는다. 보통 기록들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들이라는 인상이 너무 강하다 보니, 독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나타내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런 것은 아니고, 인터넷 상에서 리뷰나 서평으로 유명한 파워 블로거들이 있기는 있다. 개인적으로 그런 분들의 리뷰들은 언젠가 책이라는 종이 매체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중에 책으로 보는 것을 선호한다. 그렇게 읽는 편이 깊이 읽을 수도 있고, 나의 독서 행위와 자세히 비교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나쁜 리뷰나 서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책의 내용 요약 + 마지막에 간단한 느낌으로 끝나는 것들이다. 이런 리뷰들은 저자와의 지적 교감을 이루지 못하고, 저자의 높은 지적 능력을 맹목적으로 추종한 단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독서는 수동적 독서라고 생각하는데, 지혜보다는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독서가 이런 성향을 많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깊이 있는 고전을 선택해 제대로 정독하기 보다는 쉬운 책들만 선택해 꾸준히 읽다 보니 지식은 많이 쌓았으나 깊이 있는 지혜를 얻지 못하고, 지적 발전 단계를 높이지 못하고 말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자신의 저서 "지식의 단련법"에서 정신집중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난해한 고전들을 읽으라고 권한다. "최후의 순간까지 끈질기게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아주 단순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렇게 읽어야만 정신집중력 향상은 물론 지적 능력까지도 향상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젊었을 이런 책을 읽어두라고 강조한다. 나이가 들어 이런 책들을 읽으면 효율성도 떨어지고 시간만 허비하게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충고가 아니더라도 전부터 개인적으로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다치바나 다카시의 단순한 방법론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고전들은 켠에 자리를 차지하고 먼지만 쌓이고 있는 반면, 새로운 신간들은 계속해서 늘어만 간다. 아무튼, 그런 리뷰를 쓰는 사람들이나 나의 수준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리뷰나 서평을 읽어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시간에 비록 고전보다는 못하지만, 최근에 나온 신간들을 읽는 것이 차라리 나를 위해서 좋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서평이나 리뷰 관련 책으로 꼽는 것은 국내에는 "마교사전"이란 소설의 저자로 알려진 한샤오궁의 "열렬한 책읽기". 중국의 유명한 지식인답게 편의 책을 읽고 리뷰가 예사롭지 않다. 독서를 독서의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문자를 중심으로 읽는(아직 나도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반면, 독서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문자 이면에 감춰진 의미까지 찾아내면서 읽는 , 한샤오궁의 리뷰들을 보다 보면 그런 독서 능력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러다 보니,  "열렬한 책읽기" 리뷰가 아니라 하나의 저작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깊이 있는 내용을 보여준다. 보통 웬만한 리뷰는 책이 가지는 가치나, 책이 포함하고 있는 저자의 능력을 뛰어넘지 하는데, 한샤오궁은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의 경지를 보여준다. 현재 내가 추구하는 리뷰나 독서의 이상향이다.

 

 한샤오궁 같은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될까라고 고민을 많이 한다. 책을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나의 독서능력을 검증하고 생각하고, 리뷰를 쓰면서도 계속해서 나의 쓰는 방법들을 고민한다. 그런데 쉽게 늘지 않는다. 우선 아무래도 고전을 거의 읽지 않음으로써 발전하지 못하고 지체되어 있는 정신집중력과 지적 능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고전 읽기는 나에게 여전히 버거운 과제다. 그래서 다른 방편으로 다독이라는 목표를 정했다. 직접적인 도전보다는 우회방법을 통해서 고전읽기 능력을 키우자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1년에 100 읽기" 목표로 노력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효과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2010년을 맞이해 다시 고전을 읽자는 목표를 잡고, 동안 목표로 했던 "1년에 100" 읽기를 포기하려고 계획하고 있지만, 실천될지 두고 볼일이다.

 

 그런데, 문득 무작정 고전을 읽는다고, 정신집중력과 지적 능력향상에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이 든다. 읽는다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읽는 방법론도 관심을 가져야 된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한샤오궁 만큼은 아니지만, 읽는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리뷰를 남긴 작가가 생각난다. 소설가 장정일. 지금의 자신을 키운 것은 독서라고 만큼, 뛰어난 독서가인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독서 기록들을 "독서일기"라는 책으로 꾸준히 만들고 있다. 개인적으로 아직 읽어봐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대신 그의 다른 독서 일기인 "공부"라는 책을 보면 그의 독서 방법론을 엿볼 있었다. 책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저자와 지적 교류를 하는지 느껴진다.

 

 그리고 명의 저자가 자신의 독서 기록들을 통해서 치열한 독서방법론을 보여준다.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장정일의 "공부"만큼 치열함은 보이지 않지만, 자신이 엄선한 고전과 리뷰들을 통해서 "고전을 이렇게 읽어야 하는 이야"라는 모범적 모델을 제시하는 같다. 그래서 읽으면서 내가 과거에 읽었던 책들의 느낌과 생각들을 올리려 노력하면서 읽게 된다. 그런데, 제대로 기억이 나는 것이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 푸시킨의 "대위의 ", 최인훈의 "광장" 그리고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까지 책에 수록된 14권의 고전 속에서 내가 읽은 책들은 4, 그나마 가장 최근에 읽은 것이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다 보니 이것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으면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된다. 14 모두가 읽자고 다짐했으나 손이 가지 않아서 혹은 어려워서 읽지 않았던 책들일 뿐만 아니라, 읽었던 책마저도 내용에 대한 기억도 느낌에 대한 기억도 없어서. 생각해 보면 장정일이나 유시민 처럼 치열한 독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책은 2010년의 목표 고전 읽기에 대한 목표를 잡을 있는 기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내의 독서 방법론에 반성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저마다 독서 방법론이 다르기 때문에 장정일이나 유시민의 독서 방법론이 정답일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치열한 독서 방법론은 충분히 본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단계를 거치다 보면 높은 독서의 경지에 오르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청춘의 독서 - 10점
유시민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