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일 화요일

인터넷 세상의 사회규범에 대한 고민. 책 "인터넷 세상과 평판의 미래"을 읽고


 

 한 때 인터넷에서 공공의 적이 되었던 개똥녀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다니던 대학까지 자퇴할 정도였으니……. 공공장소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과도한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었던 그녀는 지금쯤 그 악몽에서 벗어났을까?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쉽게 말하겠지만, 당사자가 받은 인민 재판식 마녀사냥의 상처를 잊고 과연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까? 인터넷 어딘가에는 여전히 그녀의 사진이 게시되어 그녀의 상처를 여전히 자극할지도 모르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여전히 살고 있을까? 한 순간의 실수가(실수가 아니라 고의라고 하더라도) 그녀가 받아야 할 고통이나 대가는 너무나 가혹하지는 않았는가? 내가 그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이 책이 그 사건의 사진과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학자가 쓴 책임에도 개똥녀 사건은 인터넷 공간을 통해서 보여지는 사회적 행동을 분석하는데 중요한 출발점을 제시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인터넷 세상의 권력이라고 해야 할까? 사진 한 장과 잘 쓰여진 글이 조합을 이룬다면, 법을 초월하는 행위가 광풍 불듯이 몰아쳐 버린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맹목적일 뿐만 아니라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개인의 신상공개는 물론이고, 이리 저리 글들은 펌질을 당해서 확산의 정도를 가름 조차 할 수 없다. 이로 인해 죄인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폭력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가해진다. 공동의 화제거리를 공유한다는 일체감인지, 아니면 약육강식의 현실에서 치이다가 모니터 뒤에 숨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치졸한 행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도덕성을 따지고, 예절을 따지며 살아온 국민인지 모르겠다. 선거 때만 되면 권력과 돈을 향해 투표하고 맹목적인 지역감정에 투표를 하던 사람들이 말이다. 유독 힘 약한 집단이나 사람에게는 더욱 가혹하게 모질게 가하면서도, 권력이나 돈 앞에는 그저 납작 엎드리는 아첨꾼과 전혀 차이가 없음에도 그들은 자신의 행위가 절대 선이나 도덕적인 행위로 믿으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아무리 강력한 태풍이라도 태풍의 눈은 고요하듯, 인터넷의 광풍 속에서도 태풍의 눈과 같이 고요하고 이성적인 공간이 있긴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태풍의 눈의 고요함보다 태풍의 광풍과 파괴력만을 기억하듯 인터넷 세상의 광풍 속에서 이성적인 공간은 미미하기만 하거나 침묵을 강요 당한다. 소수의 사람들은 광풍이 한 참이나 지난 이후에 비로서 이성을 찾은 사람들이 그 때를 뒤돌아보면서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기는 하지만, 잘못을 쉽게 인정하려 않는 인간의 속성 때문인지 부끄러움과 반성의 의미로 외면하는 것인지 몰라도 다수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진 사건이 되어 버린다. 결국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대가나 보상은 커녕, 스스로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되는 것이다.

 

 인터넷은 자유의 공간이다. 고단하고 힘겨운 현실 속의 삶을 떠나서, 또 다른 자아를 만들거나 창조할 수 있음을 물론이고 숨겨진 진짜 자아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 자유로움 만큼의 구속 또한 존재하는 것이 인터넷이다. 인터넷에 남겨 놓은 기록들은 자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쉽게 퍼져나간다. 그렇게 퍼져나간 기록들은 나중에 자신이 삭제할 수 없는 낙인이 되어 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 보고 이 책의 저자는 "인터넷은 지워지지 않을 개인의 과거 잘못을 기록함으로써 주홍글씨를 디지털 판으로 재현한다."이라고까지 말한다. 스스로 만들었던 기록이던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기록이던 간에, 다수의 네티즌들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된다면 그 관심이나 이목이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상관없이 낙인이 되어 버린다.

 

 특히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 문제가 더 커지는데, 익명의 누군가가 그것을 인터넷에 올렸을 경우 다수의 익명의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이것을 인터넷 상의 모욕주기란 용어로 표현한다. 조지 오웰이 미래에 '빅 브라더'라는 감시받고 통제된 사회를 예견했는데, 늘어나는 CCTV를 제외하더라도, 카메라가 달린 휴대폰이 대중화 되면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환경에 스스로를 몰아 넣은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다. 거기에 인터넷 이라는 공간의 그런 흔적의 저장소가 되고, 다시 다수의 사람들이 모인 재판소가 되어 버리기까지 한다. 당사자의 반론의 기회는 원천 봉쇄를 당하고, 고발자나 첫 게시자의 일방적인 주장만으로 판결이 나버린다. 그것이 정당하고 정확한 판단인지도 문제가 되지만, 인터넷 모욕주기가 더욱 무서운 것은 죄값에 대한 명확한 가치도 제대로 산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수의 분노라는 이름으로 너무 과도하게 행해진다는 것이다. 술 마시고 추태를 부린 사람들,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들, 금연구역에서 흡연을 하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과연 개똥녀의 행위가 학교를 자퇴하고 사회적으로 매장 당할 정도 였는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다면, 인터넷 모욕주기라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파괴력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타인에 의해서 인터넷에서 모욕당하는 것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블로그나 미니 홈피를 통해서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하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 받는 상황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어떤 이는 자시의 블로그에 회사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 했다가 그것을 본 회사에서 해고 당했고, 여자 친구가 자신과의 성관계이야기를 적나라하게 포스팅하면서, 직장 뿐만 주변 사람들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이 그대로 노출되기도 한 사람도 있다. 스스로가 원해서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부분이 공개되는 것도 있고, 원하지 않았는데 공개되는 상황도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에 대해서 혼돈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블로그나 미니홈피의 글들이 프라이버시를 공유하고 싶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여졌는데 원하지 않게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이슈화 된 경우다.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심각한 인격적 모독이나 경제적 피해를 당했을 때 스스로가 인터넷 상에 공개한 것이 과연 프라이버시에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논란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다. 실제로 있었던 다양한 사례를 비롯해서 법과 판례들을 인용하면서 아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인터넷 세상의 윤리나 법 제도에 대해서 고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엘빈 토플러거의 "부의 미래"에서 시속 1마일로 변하는 것이 법과 법 관련 기관들이라고 한 것 처럼, 빠르게 변해가는 인터넷 세상에서 법이 완벽하게 따라가지 못한다. 트레이시 마이어스는 "사회규범은 법보다 행동 규제에 있어 더욱 효과적이다."라고 했다. 결국에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 함은 물론이고 법으로도 피해를 막거나 구제해주는데도 한계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네티즌 스스로가 사회규범에 대해서 명확한 개념과 관념을 갖춰야 함을 물론이고, 인터넷 세상 속에 또 다른 사회규범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함을 보여준다.

인터넷세상과 평판의 미래 - 8점
다니엘 솔로브 지음, 이승훈 옮김/비즈니스맵

2008년 12월 1일 월요일

책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를 읽고.....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듯, 역사라는 것도 좋은 것 이면에는 어두운 면이 있기 마련이다. 역사의 양면을 가지고 어떤 것에 가치를 매겨서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사람 저마다의 관점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결정된다. 어떤 사람에 대한 평가나 인상이 자신이 가진 관점에 따라 달라지듯, 역사에 대한 평가 또한 각자의 관점에 따라 평가되기 마련이다. 사람마다 어떤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다르듯 역사의 평가에 대한 호불호도 다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역사 교육에서 어느 일방의 평가만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 밖에 없다. 거창하게 그것이 역사를 통한 애국심 교육과 국가와 역사에 대한 자긍심 교육이라는 명목을 내세우지만, 자칫 잘못하면 맹목적인 파시즘을 야기할 수가 있다. 히틀러라는 인물이 게르만 족은 위대한 역사와 혈통을 가진 종족이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며, 전 독일 국민들을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었다. 그것은 파시즘의 징조였고, 결국에는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의 학살이라는 참혹한 혼돈으로 전 세계를 몰아 넣었다. 일본의 군국주의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또한 히틀러와 괘를 같이했던 것들이다.

 

 역사라는 것은 정확한 사실을 가지고 평가를 시작해야 한다. 양이든 음이든 과장하거나 숨기려 해서는 안되고, 정확하게 공개해서 저마다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평가할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역사 교육이란 어느 관점을 바탕으로 한 역사의 평가를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를 평가할 수 있는 방법과 관점을 기르는 것이야 한다. 그럼에도 지난 역사 교육은 권력을 가진 집단이 일방적으로 평가한 역사의 관점을 강제로 학생들에게 주입해왔다. 궁극적으로 그 집단이 원하는 것은 역사 관점의 주입을 통한 동조세력을 만들고 반대세력의 확장을 저지하는 것이었고, 결국에는 자신들의 권력을 지속적인 유지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학교라는 틀을 떠나서 다양한 시선과 관점을 가진 책이나 정보를 접하게 되면, 이제껏 배워왔던 역사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박노자교수가 쓴 "나를 배반한 역사" 라는 책은 그런 관점이 충분히 묻어날 뿐만 아니라, 다른 관점과 다른 역사적 사실을 접했을 때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했다.

 

 어느 한 쪽의 역사에 대한 일방적인 평가의 주입과 확대의 가장 파국은 "파시즘"이라면, 또 다른 문제는 역사를 신화로 바꿔버린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위대한 탐험가요 모험가이지만, 그가 처음 상륙했던 지역의 원주민들을 모두 몰살한 잔악한 정복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백인 우월주의를 앞세운 역사 교육은 그런 잔혹함을 완전히 배제해버렸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위대한 탐험가라는 신화로 존재하게 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존경받는 링컨 대통령은 노예를 해방시킨 사람이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경제학자인 장하준 교수는 "나쁜 사마리아인"이라는 책을 통해서 링컨은 보호주의 무역을 폈던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남북전쟁의 이면에는 자유무역과 보호주의가 충돌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농산물이 주요 수출품이었던 남부와 공업은 발전했으나 영국에 비해서 열악한 경제력 때문에 산업에 대한 보호가 필요했던 북부의 충돌이 만든 전쟁이라는 것이다. 링컨은 북부의 경제를 보호하려는 보호무역주의자였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링컨은 강경한 노예해방주의자가 아니 였다는 평가도 있다. 노예 해방을 위해서 남부와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전쟁보다는 평화와 대화를 중시했던 그의 철학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약한 노예해방정책은 자신의 지지기반인 노예 해방론자의 반발을 초래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최근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거국 내각을 구성하면서 언급되고 있는 책인 "Team of rivals"에는 이런 과정들이 잘 설명되어 있는데, 특히 링컨이 노예 해방선언을 한 시기와 목적에 대해서 전쟁의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과정을 전혀 모른 채 링컨이라는 인물을 하나의 신화로 인식한다.(저 책의 끝도 링컨을 신화로 만들면서 결론을 맺는 단점이 있다.)

 

 한국에서 신화가 되어 버린 역사를 본다면 박정희라는 인물을 들 수 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 개발의 영광은 박정희라는 한 인물의 영광이 되어버리고, 그의 독재 앞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착취당해야만 했던 노동자들의 땀과 피는 완전히 무시되어 버린다. 그 당시의 개발 독재가 지금의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것은 박정희 혼자만의 영광이고 업적이 아니라, 노동을 착취당하며 묵묵히 일해왔던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같이 누려할 영광과 업적인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개발 독재의 역사는 박정희라는 인물의 신화가 되어버렸고, 대선이나 총선이 되면 그의 신화는 우매한 국민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독재에 대한 향수마저 자극하면서 잘못된 폭력이나 공권력에 대해서 침묵을 떠나서 환호까지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잘못된 교육이 만들어낸 기현상은 결국에는 더 큰 갈등만 유발할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의 나열, 그리고 역사를 해석하는 방법과 관점을 기르는 교육을 통해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거기에 하워드 진은 역사 교육적 관점에 더해서 하나를 더 가르쳐야 된다고 한다. 그것은 그 동안 무시 되어 왔던 계급과 계급갈등 문제를 정직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계급과 계급갈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헌법은 많이 평등하다는 것을 강조해서 이런 계급 갈등을 가리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노동운동에 대한 천박한 인식이나 파업권에 대한 천박한 인식 그리고 선거나 투표에서 특권계층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투표현상을 보면 이런 교육의 절실함이 느껴진다. 이런 교육이 오히려 갈등을 불러 일으킬 수 있겠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알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갈등보다는 화해의 길이 모색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 - 8점
하워드 진.도날도 마세도 지음, 김종승 옮김/궁리

2008년 11월 29일 토요일

"특목고 교사의 학생 폭행사건" 기사의 리플을 보고......


 네이트 온 메신저 하단에 뉴스기사 제목이 하나씩 올라온다. 가끔 클릭해서 그 기사를 보게 되는데, "특목고 교사가 명문대 합격 제자 폭행"이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교사가 학생을 폭행해왔던 것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니라, 그렇게 관심을 끄는 기사는 아니였지만, "특목고, 명문대 합격 제자"라는 선정적인 기사 제목에 혹해서 클릭하게 된다. 교사의 제자 폭행이라는 사건에 특목고나 명문대 합격 제자라는 것은 아주 쓰잘데기 없는 사실의 나열이지만, 한국과 같은 학벌사회, 학벌에 경배하는 개한민국적 상황에 얼마나 적합한 기사의 제목인가? 문제의 본질보다 학벌을 강조하고 그 폭행이 일어난 곳이 소위 말하는 개한민국의 최상위 개층들의 집합소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그 기사를 보면서 씁쓸하기만 하다.

 

 그런데, 그 기사보다 가관인 것이 눈에 들어온다. 리플 쓰는 사람들 중에 인간 말종이 많다는 것을 알기에 별로 읽고 싶은 생각을 잘 안하는 편인데, 소위 베스트 리플이라는 것들을 보면서 개한민국의 국민들은 점점 광견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에 참담함을 금할 수가 없다. 돈에 눈이 멀어서 자신들의 욕망을 투영한 부조리한 인간을 선거를 통해서 뽑을 때도 알아봤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개한민국은 광견들의 나라가 되어가는 듯 하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익명성 때문에 아무리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한다고해도 거기에 동조해서 베플에 추천하는 인간들조차 광견이니 말이다.

 

 리플을 보고 하도 열받아서 캡쳐를 해버렸다.  (기사와 리플 출처 링크 )



 이 리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사를 한번 볼 필요가 있다. 수업시간에 늦은 학생과 교사가 실랑이를 벌이다. 폭행사건이 발생했는데 학생은 뼈가 부러졌고 전치 12주의 상처를 입었다는 내용이다. 당사자인 교사와 학생의 인터뷰와 목격자인 학생의 인터뷰가 같이 실려있다. 피해학생과 목격 학생의 진술에 의하면 폭행을 당한 것이 명백하고, 가해자 선생의 진술에 의하면 학생에게 맞아서 돌발적으로 뺨을 때렸고 그로 인해 넘어져서 다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 학생이 선생의 뺨을 때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명확한 진술이나 증인언이 나오지 않는다. 단지 선생 일방의 주장일 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기정사실화 해버렸다. 뭐가 사실인지도 불명확한 상황에서 판단하고 편들기를 시작해서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맨위에 리플을 보면 사적복수와 폭력을 금지하는 대한민국의 법체계를 완전히 무시하는 광견적 사고를 보이고 있다. 한화 김승연회장이 폭력배를 동원해서 사적 폭력과 복수를 한 사건이 법의 처벌을 받은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인 것을 본다면, 개한민국 국민들의 의식수준은 김승연보다 더 찌질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만약에 학생이 잘못을 했다고 치더라도 선생이라는 자리에 맞는 처리방법과 절차가 있음에도 사적 폭력을 가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 우선되어지, 사적 폭력을 옹호하고 있다. 교사란 지식만을 습득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전반에 필요한 소양까지 갖춰야지만 되는 것인데, 교사의 부족한 소양과 폭력은 무시하면서 원래부터 부족한 청소년, 학생을 마치 교사보다 더 소양적인 인간인양 착각해서 매도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두번째 리플은 양비론을 펴는 듯 하지만, 결국에 부족하고 모자란 행동을 한 학생을 비난하고 있다. 학생이란 불완전한 존재고 그래서 자라고 배우고 있는 과정에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그런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기 보다는 학생이란 절대적 권위에 복종해야 되는 노예나 사육품으로 취급해서 선생의 권위에 도전한 것은 대단한 죄악이고, 그것을 학생의 시각에서 진술된 것이 문제라고 말하는데. 목격자가 학생인데 어른의 시각이 들러갈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고, 피해자가 학생인데 어른들의 시각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부터 그 광견에게 묻고 싶다. 결국은 학생이란 자신과 같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고 자신보다 하류에 있는 모자란 불량품으로 취급해서 그들 학생들의 관점이나 시각자체부터가 대단한 문제인것 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마치 멀쩡한 사람인것 처럼 마무리하는데, 학생을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이나 문제의 핵심은 과도한 폭력을 당한 학생이라는 것을 완전히 왜곡해서 해석해버리는 자신이 광견이라는 것은 왜 모르는지 모르겠다.

 

 세번째 리플, 정말 상대할 가치가 없다. 일제와 매국노들이 주입시켜 놓은 "조센징은 맞아야 말 잘듣는다."는 인식 수준 그 이하다. 사건의 과정에 대해서 한 일방의 진술을 가지고 함부로 일반화하는 것도 찌질하기 그지 없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전치 12주가 나올정도로 맞아야 할 상황이란 말인가? 과연 저 광견은 얼마나 도적적이고 제대로 된 인간인지 궁금하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댓글 3개가 베스트 댓글이라는 이름으로 맨 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게 개한민국의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분노하고 참담하기 그지 없다. 돈벌레와 돼지들이 많다는 것은 알았어도 합리적 사고마저 포기하는 광견과 좀비들의 생각이 인기있는 댓글이 되고 당연하다듯이 말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2008년 11월 19일 수요일

감성이 담긴 휴대폰 백서..... 책 "모바일 오디세이"를 읽고.


 개인적으로 전화라는 기계를 무척 싫어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어렸을 때는 수화기 저편에 들려오는 낯선 사람과의 대화는 정말 고역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이야 조금씩 변했지만,) 다른 가족들이 있으면 내가 아무리 전화기에 가까워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전화를 걸 때도 잘못 거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웬만해선 전화도 걸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친구들은 우리 집으로 전화를 해서, 나의 가족 중에 누군가를 거친 다음에야 나랑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집전화라는 것이 가족 공동체의 통신수단이었다면, 휴대전화는 지극히 개인적인 통신도구이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휴대전화에 대한 거부감은 집전화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작다. 그렇다고 통신기기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손에 휴대폰을 가지게 된 시기도 남들보다 늦은 편일 뿐만 아니라, 매일 날아오는 스팸 문자와 광고전화를 제외하면 내 휴대폰은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소위 캔디폰이다. 주인을 잘못 만나서 주기능인 통신수단은 뒤로 한 채 알람과 시계의 역할이 주기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휴대폰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충분히 휴대전화를 버려도 될 정도의 생활패턴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휴대폰을 언제나 손에 쥐고 다니는 이유는 뭘까? 사실 전화라는 것은 거는 사람 쪽에서 용건이 있기 때문에 통화가 되지 않으면 답답한 쪽은 전화를 건 사람인데도, 휴대전화를 두고 외출한 날이면 답답하고 허전한 이유는 뭘까? 습관처럼 들고 다니는 휴대전화가 어느 새인가 나의 일부가 되어 버린 이 상황은 나 조차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휴대전화를 버리는 순간 아마도 세상과 소통하는 마지막 수단마저 버린, 은둔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망상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 휴대전화의 기능 중, 내가 유일하게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가장 좋아하는 문자 기능, 그것은 휴대전화를 쉽게 버리지 못하게 만든다. 수줍어 하고 무뚝뚝해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문자는 어떤 때는 진지하게, 어떤 때는 장난 삼아, 하지만, 말보다는 쉽게 소통의 세계로 나가게 만든다. 한가지 단점이 있다면 그 무뚝뚝함이 상대를 가린다는 것 정도. 친한 친구들에게는 "잘 사냐?"라는 문자를 보내거나 받으면, 내 응답이나 친구들의 응답은 "그래" 또는 "잘산다."로 끝나버리는 냉정함이 넘쳐나고, 성별이 다른 사람에게는 장난스러운 문장으로 표현함을 물론이고 내용 또한 길다. 그 뿐이 아니라 문장의 마지막에는 "^^" 나 "^^;" 같은 이모티콘은 빠지지 않는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문자기능은 어느 순간엔가 음성통신을 넘어서 더 친숙한 소통의 수단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문자를 받으면 답장이 문자로 오느냐 음성통화로 오느냐에 따라서 신세대와 구세대를 구분하는 척도라고 하니 그 만큼 젊은 사람들에게 문자는 가장 기본적인 소통의 수단이 된 것이다. 이렇듯 집전화를 넘어서 휴대전화. 음성통화를 넘어서 문자 그리고 영상통화까지. 기술의 발달은 소통수단의 다변화까지 많은 변화를 야기했다. 소통 수단의 선호까지 세대별로 차이를 만들었음을 물론이고 수 수단의 차이가 소통의 단절까지도 야기하는 복잡한 형태의 세상이 된 것이다.

 

 그렇게 전화와 휴대폰으로 인해 변화한 세상과 변화할 세상에 대해서 정리한 이 책은 무미건조할 수 있는 기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속에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캔디폰을 들고서 만지작 거리는 나에게 이 책은 하나의 문화 또는 생활의 필수도구로 자리잡은 휴대전화는 단지 소통의 도구를 넘어서 감성의 도구로 자리잡고 있음 보여준다. 내 휴대전화의 이용패턴이 너무나 초라해질 정도로(원래 초라했지만). 그래서 책을 덮으면서 생각난 친구들에게 또 문자를 날려본다. "잘사냐?"

 

모바일 오디세이 (본책 + 다이어리) - 8점
정여울 지음/라이온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