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12일 월요일

공부도둑이 들려주는 공부이야기 "공부 도둑"을 읽고....

공부도둑 - 10점
장회익 지음/생각의나무

 

 우리에게 공부의 의미는 무엇일까? 출세를 하기 위한 도구이자 길? 아니면 좀 더 높은 계층을 위한 필요조건? 공부를 왜 해야 하는 기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보다는 이와 같이 미래의 지위나 부를 위해서 공부하기를 강요당해왔다. 우리들의 부모나 지금의 우리는 공부의 의미보다는 공부가 가져다 주는 소수의 결과를 맹신하고 시험으로 줄 세우는 경쟁사회로 자신과 아이들을 채찍질 한다. 결국에는 공부의 진정한 의미나 재미를 느껴보지 못한 채 의무감이나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공부를 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한 공부 일지라도 깊이가 있는 것이면 좋겠지만, 공부하고 있는 학문의 참된 정수를 깨닫는 공부를 하는 사람은 얼마 없다. 이해와 깨달음이 있는 진정한 공부보다는 지식의 암기에만 열중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기억된 지식의 테두리 안에서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게만 되고 다양한 학문과의 응용뿐 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기존 지식의 틀을 벗어나면 당황하는 한계를 만들어낸다. 개인들은 천만원이 넘는 등록금을 대학에 쏟아 부으며 공부를 하지만, 대학의 학문과 기업이 요구하는 학문의 괴리가 커서 기업들이 신입사원들의 재교육에 많은 돈을 재투자하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공부에 쏟아 부으면서도 다른 한쪽에서 학력이 계속 저하된다고 아우성이다. 학생들을 더 공부시켜야 된다며 말하고 0교시를 부활하고 학원의 교습시간제한 마저 폐지하자고 외친다. 더 많은 공부를 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맹신한다. 지나친 학습부담에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세계최고인 나라에서 더 많은 청소년들이 자살하도록 강요한다. 왜 학력이 떨어지는 것일까에 대한 물음은 둘째 치더라도,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은 왜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하는 공부는 객관식 시험에서 점수를 얻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다. 우리를 줄 세우고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것 방법에 대한 공부에 몰입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스스로를 공부 도둑이라고 칭하는 저자는 지금의 공부가 득점전략에만 머무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득점 전략은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겨냥하는 데에 있다. 이것을 잘하지 못하면 득점 경쟁에서 낙오한다는 것이 이들의 논지이다. 이는 언뜻 옳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여기서 잃는 것은 학습의욕과 학업능력이다. 결국 종이 위에 적히는 득점 수치를 위해 교육의 본질인 의욕과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결국 우리의 지금 공부법은 학습의욕과 학업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학력저하까지 부른 것이다.


 처음부터 공부론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만, 이 책은 공부론에 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저자의 공부 역사책이다. 평생을 물리학 학자로서 살아온 저자가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그 기록을 통해서 자신만의 노하우나 경험, 그리고 공부에 대한 지혜를 펼쳐 보인다. 그 중에 득점전략으로서의 공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득점전략적 공부를 배제했던 자신의 경험으로 얻은 공부법을 "오히려 시험과 무관하게 공부했기에 내 나름의 능력을 기를 수 있었고, 이렇게 길러진 능력이 시험에서도 그 효과를 발휘한 것뿐이다. 그렇더라도 시험에 앞서 준비를 안 할 수는 없는데, 이때 작은 노력만으로 큰 효과를 보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면서 터득한, "혼자 힘으로 공부하는 법"을 통해서 단편적인 지식을 넘어서는 학문의 정수에 접근하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대학을 가서도 혼자서 공부하는 법을 알지 못해서 또 다시 학원을 전전하는 현대인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결국 지금의 많은 현대인들은 진정한 학문을 추구하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는 이유는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학문은 점수를 따기 위한 학문이 되어 버렸다. 결국 우리는 저자가 말하는 학문의 요체라고 불리는 자유보다는 기존의 완성된 이해의 틀 안에 우리의 사고를 속박하고 있다. 그래서 그 틀 안에서 성취와 보상을 추구만 할 뿐 자유로운 사고를 통해서 학문의 영토를 확장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해보다는 단편적인 정보나 지식의 암기에, 지혜보다는 지식만을 추구하게 된다. 글로벌 인재가 부족하게 되는 것도 다양한 학문의 바다를 자유롭게 넘나들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환경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의적인 인재보다는 수동적이며 기존의 학문이나 사고의 틀에 박힌 근대적인 인재들이 넘쳐나게 된 것이다.


 현대인들은 자연계의 다위니즘을 공부에까지 끌어왔다. 그래서 경쟁은 당연한 것이며,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고, 학원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 아이들이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고 이기기 위해서 하지만 공부라는 것이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게임이 아니라 학문을 알아가고 지혜를 배워가는 과정이다. 저자는 공부와 학문에 만연한 경쟁만능주의 세태에 대해서 "학문은 기여이고 협동이지 결코 경쟁이 아니다. 경쟁이라는 것은 함께 취할 수 없는 소수의 목표를 놓고 서로 취하겠다고 다툴 때 나타나는 것인데, 학문의 목표는 결코 한두 사람이 취하면 없어지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학문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학문이 기여이고 협동이라는 것을 모르고 경쟁에만 매달리기는 것이 아닐까?


 공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세상에 저자의 공부 역사 이야기는 많은 지혜를 내포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을 "공부도둑"이라고 불렀지만, 내가 보기에는 "공부도사"다 스스로 도를 닦아서 득도한. 저자가 들려주는 공부이야기는  경쟁으로 인해 목적과 방향을 잃은 현대인들에게 망망 대해에서 길을 안내할 북극성이 되어 준다. 그냥 저자의 역사로 읽어도 재미있고, 그 역사를 통해서 저자가 말하는 공부론에 대한 이야기도 유익하다. 단 마지막에 있는 온생명과 낱생명, 그리고 우주론에 관한 이야기는 지루하고 딱딱하기는 하다. 하지만 자신의 전공을 넘어서 철학, 생물학, 동양사상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관심과 깊이 있는 학문에 대한 성찰은 질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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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4일 일요일

20~30대 좀비들 보다 지금의 10대들이 좋은 이유

 

 나도 20~30대의 좀비다. 다른 좀비들과 다른 것은 그래도 나는 나의 권리이자 의무인 선거권을 포기한 적이 없다. 그것으로 나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지만, 나 또한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겨 살 수 밖에 없는 좀비다. 그래서 익명성이라는 인터넷 속에서만 찌질이 같은 글을 써 갈기지만 현실세상에서는 그냥 침묵한다. 하지만, 나보다 더한 좀비들은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마저 상실했으며, 돈이면 도덕과 사회 정의라는 것을 그냥 짓밟아 버린다. 그나마 난 비판정신은 살아 있으나 실천하지 못하는 반만 좀비라고 애써 위로해 본다.


 20~30대들의 좀비들이 자신들이 좀비가 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항변한다. 비정규직으로 이리저리 내몰리며 윗 세대들의 착취를 당하고, 백수에 실업자로 남아서 자신의 이상을 펼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대학 등록금은 1000만원을 돌파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공부할 기회마저 박탈당할 위기에 있다. 그 뿐인가? 학벌사회가 만들어 놓은 높은 장벽아래서 그저 좌절만 할뿐이다. 우리가 좀비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다 사회의 탓이다.


 암기식 교육을 강요하고 학교라는 사육장 속에서 사회의 비판의식마저 키우지 못한 좀비들이 사회를 탓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저 세상에 대해서 순응하는 것만 배워온 우리 좀비들이 반항이나 꿈꿀 수 있겠는가? 가장 민주적인 의식을 가진 386세대들 조차 쉽게 변심해버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그 밑의 20~30대 좀비들은 롤모델마저 찾을 수가 없다. 윗 세대에게 찍혀서 사회진출의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것보다 그냥 좀비로 사는 것은 다음을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안전할 뿐이다.


 지금의 우리 좀비들이 사회의 주도층으로 부상했을 때 만들어질 좀비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일관성의 법칙으로 자신들이 좀비로써 살아온 길들이 언제나 최적의 길이고 최선의 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밑의 세대와 자식들을 물어서 그들 조차 좀비들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좀비가 되어야지만 좀비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세상을 바꿀 방법조차 모르게 될 것이다.


 나도 좀비이지만, 이런 좀비들이 정말 싫다. 세상을 한탄하며 불쌍한 척하는 좀비들이 정말 싫다. 나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좀비가 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의식은 몸서리 칠만큼 싫다. 좀비가 좀비 일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자신들이 좀비라는 것을 스스로 알았으면 좋겠다.


 반면에 이번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로 붉어진 촛불집회를 보면서 우리 밑의 세대들은 좀비가 아님에 나는 그들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좀비가 아니였다. 2mb 탄핵 서명을 주도하는 네티즌은 10대이고 촛불집회에 교복을 입고 당당하게 참석해서 사회문제를 비판한다. 그들은 사회에 관심조차 없고 의식조차 하지 않은 좀비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좀비 처럼 살아가는 내가 부끄럽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열렬히 사랑하게 만든다. 그들은 2002년에 애국심이라는 이유만로 뭉친 20~30대의 좀비들과는 전혀 다르다. 사회의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좀비 처럼 변해가는 세상을 향해서 당당하게 그들의 소리를 외친다.


 비겁한 20~30대의 좀비들은 그들을 향해서 말할 것이다. 아니 세상을 좀비 세상으로 만들고 있는 기성세대들은 그들을 향해서 말할 것이다. 학생들은 공부나 하라고, 어린 것들이 뭘 알겠냐고 말이다. 비겁한 좀비들의 옹졸함과 편협함은 좀비정신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들 좀비가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만 해대는 졸렬함의 표현일 뿐이다. 나이라는 편협한 숫자로 자신들보다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편협함은 좀비 정신의 또 다른 발현으로 것은 좀비들만이 가지는 정신이다.


 지금의 10대들이 세상과 차단 당한 채, 좀비교과서가 만들어내는 편협한 세상을 공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공부이고 학습인가? 그것은 좀비들이 그들을 물어서 같은 좀비로 만드는 범죄일 뿐이다. 10대들도 당당하게 정치의식을 표현하고 자신의 주장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것이 올바른 공부고 학습이다. 자신들의 인생에 대해서 부모 좀비들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당당하게 주인이 되는 것이 올바른 학습이고 공부다. 앞으로도 좀비교육에 대해서 아니 좀비들의 공격에 대해서 당당하게 맞서는 10대들이 되기를 기대한다.

책이란 정치적인 것이다.

카페 댓글의 강제 삭제에 대해서 쪽지를 보냈다.

"제 댓글이 삭제된 것을 봤습니다.
하지만 삭제하시기 전에 그 삭제 이유를 작성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작성자로써는 아무 이유를 듣지 못한 채 삭제 당하는 것이 황당합니다.
카페를 운영하면서 나름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운영에도 원칙과 절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댓글이 무엇 때문에 적절하지 않으며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우선 작성자에게 설명하고 그것을 작성자에게 자진 삭제해 달라고 하는 것이 원칙이고 올바른 절차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짦은 문장이지만 댓글 또한 작성자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손에 이유도 듣지 못한채 삭제 당하는 것보다 이유를 듣고 작성자가 삭제하는 것이 덜 불쾌하고 덜 황당할 것입니다." 라고

 

그래서 온 쪽지가
"지금 장난합니까? 왜 북카페에다가 특정 정치적인 댓글을 씁니까? 북카페에다가 그래서 지웠습니다.. 젊은친구가 지금 장난합니까? 어느 카페에서 댓글에 정치적인 댓글을 달아요 그리고 이명박이가 자네 친구인가요? 이방 매니저가 지금 자네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 보입니까?
기분 나쁘면 전화해요.. xxx-xxxx-xxxx" 이것이다.

 

최대한 정중하게 쪽지를 보냈는데 날아온 쪽지가 이따구다.

그 댓글은 미국산 쇠고기 사태에 관한 것으로 이번 문제의 핵심은 시민들이 부에 대한 욕망으로 만들어낸 결과라고 했으며 정치적으로 비슷한 성향의 한나라당과 친박연대 자유선진당 합해서 개헌의석까지 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2mb와 부의 욕망에 물든 시민과 보수정당이 만들어낸 합작품으로 멋지지 않냐고 했다. 이것이 그렇게 정치적인가? 그건 그렇다 쳐도 삭제 이유에 대해서 알려달라고 한 것이 뭐가 잘못이라고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지에 대해서 대강은 이해하고 있었다. 목사라는 직함을 봐서 대강 장로 대통령 2mb의 추종자라고 예상은 했었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좋게 말하려고 전화를 걸었는데 똥 싼놈이 성낸다더니 저쪽에서 화를 낸다. 북카페는 정치적 카페가 아니란다. 아니란것 모르는 것도 아니고 책이라는 것도 사회와 소통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이기 때문에 난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하려 했는데 듣지를 않는다. 그러면서 이명박이 친구냐고 하는데 나는 노무현을 찍었어도 그가 잘못하면 비판했으며 그냥 노무현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나중에 자신은 한빠고 한나라당 추종자라고 한다. 그래서 지웠단다. 그러면서 부산 사람 다 그러냐고 한다. 책을 받고도 서평을 쓰지 않는다며. 그래서 내가 서평 안 쓴적이 있냐고 되물었다. 문제의 본질까지 호도한다. 그러면서 그냥 탈퇴하라고 큰소리를 친다. 참 어이없는 인간이다. 생각을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며서도 책을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니.... 이상은 크나 그릇은 부족한 인간이다. 그래서 탈퇴했다. 그곳에 있을 더 이상의 이유도 없다. 혼자 독재처럼 자기 마음대로 운영하는 그런 곳은 내 성향과도 맞지 않아서 계속 고민하던 차에 잘된 것이다.

 

 책이란 다양한 생각과 사상을 포용하는 공간이고 장이다. 내가 좌파성향의 책만 읽는 것도 아니고 우파성향의 책들을 많이 봤으며 그 과정에서 내 정치적 성향을 완성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파정책이 올바르다고 생각되면 우파정책을 지지하고 좌파정책이 옳다면 좌파정책을 지지한다. 결국은 책이란 그것을 정치적 생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시를 읽어도 우파성향의 시인이 있고 좌파성향의 시인이 있으며, 소설에도 다양한 정치적 생각들이 들어 있다. 그것을 한번에 자기 마음대로 정치적으로 재단하는 것도 웃기지만, 책 속에 들어있는 다양한 정치적 생각들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것만 인정하려는 것도 웃기는 것기는 것이다. 

저출산 문제를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 "여성학교"

여성 학교 - 8점
이리스 라디쉬 지음, 장혜경 옮김, 박선민 한국 자료 조사/나무생각

 

 부모이거나 부모가 될 많은 기성세대들은 두 개의 추악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올 인하는 것이다. 지금의 경제상황이나 미래의 노후는 상관이 없다. 단지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한다. 어떻게 보면 자녀에 대한 헌신으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것은 자녀들이 뭔가 이루어주기를 바라는 욕망일 뿐이다.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한과 출세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을 자녀라는 꼭두각시를 이용해서 대리 만족하려 한다. 결국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으로 자녀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다 너를 위한 것이다."라는 말로 자신과 자녀에게 최면을 가한다. 그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애써 감추려 한다.


 두 번째의 얼굴은 저출산에 대한 기성세대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지금의 우리환경이 아이들을 낳아 키우기에는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고 있다. 안양 초등학생 사건을 비롯해서 대구에서 일어난 초등학교 성폭행 사건 등은 우리사회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취약하며 잔인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 뿐 아니라 지나치다 못해 처절할 정도의 학습열은 아이들을 학교와 학원이라는 쳇바퀴 속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그러면서 그들은 말한다.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하지만 그들은 사회의 구조와 의식의 구조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현상으로 발발하고 있는 저출산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생물이 가지는 종족번식이라는 원천적인 인간 욕망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세태를 걱정한다면 그나마 양반이련만, 미래의 경제활동 인구의 저하와 후에 노인인구를 부양한 젊은 층의 부족을 더 걱정한다. 결국은 편안한 노후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이다. 결혼적령기의 젊은이들을 향한 그들의 목소리는 결국에는 자신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이기성의 발현일 뿐이다.


 두 가지 추악한 얼굴을 걷어내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인간사회는 퇴보할 수 밖에 없다. 한 개인이 가지는 존엄성은 사라지고 개인의 이익과 공동의 이익을 만을 추구하는 사회가 될 수 밖에 없다. 결국은 한 개인은 사회의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우선 개인들이 추구하는 지나친 물질적인 욕망에 대해서는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찰할 필요성이 있다. 행복이 무엇인지 인간답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저출산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문제 의식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문제를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 문제에 대해서 올바른 시선을 가지고 접근하지 있지 않다. 철저하게 남성적 시선으로 그 문제를 바라봄으로써 문제의 원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예측이라는 이름으로 출산율 저하가 초래할 문제를 하나 둘 나열하면서 대중들에게 위기 의식을 심어준다. 뿐만 아니라 단지 돈 몇 푼이나 찔러주는 얄팍한 정책으로 대중들을 기만할 뿐이다. 결국 이러한 정책들이 만들어낸 것은 출산파업을 하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만들어 낸다. 출산이라는 것이 여성만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남성들은 회피해 버린다.


 결국 저출산 문제를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과 얼굴을 바꾸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성의 시선이다. 왜 그들이 출산파업을 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시작해야지만, 자신들을 부양한 노동력의 부재라는 저급한 걱정이나 문제제기가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해결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다. "여성학교"는 여성인 저자의 시선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조금은 아쉬운 것이 저자의 개인적 경험이나 생각을 위주다 보니 추상적인 개념들이 많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들을 좀비 세대라고 칭한다. "신속하고 실용적인 학습 결과를 목표로 삼았던 우리의 학교 교육에서 감각적 직관과 직접 처험, 배운 내용의 보다 폭넓은 이해, 다른 지식 분야와 연계된 학습은 특히나 심한 홀대를 받았다."고 "전인교육의 낡은 이상은 시대에 뒤떨어진 원칙과 더불어 소위 신속하고 효율적이며 결과지향적이고 이윤지향적인 학습 훈련을 위해 문화사의 헛간으로 쫓겨나버렸다."므로써 "우리에게 부족했던 건 연관성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들의 연관성이, 우리가 처한 역사적 상황의 연관성이, 사회 관계망의 연관성이 부족했고, 심지어 생로병사의 연관성조차 부족했다. 요즘 흔한 화법보다 약간 더 우아한 표현을 사용해 본다면, 우리에게 활기가 부족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다."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혼인이라는 것이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가부장제에서 나온 고용관계였다고 설명한다. 결국은 이혼이 늘어나고 결혼을 하지 않으며 출산을 하지 않는 이유는 "혼인을 통한 고용관계는 타당한 이유에서 서서히 멸종하고 있는 중이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남과 여가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 저자는 비슷한 취지로 촌철살인의 문장을 날린다. "남자도 여자도 자신을 사랑거래의 고급상품으로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개인의 상품 극대화를 위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은 지금의 사랑에 대한 세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저자는 지금의 사회는 사랑의 윤리라 부를 수 있는 것이 부재하며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들은 사랑의 재앙이라고 한다.


 결국 지금의 사회는 변화하는 시대상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가부장적 가족제도는 사랑의 재앙을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가족 모델이라고 한다. 신 부성과 신 모성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조합을 이뤄서 이전과는 다른 모델이 필요한 것이다. 신 부성에 대해 젊은 남자들을 향해 말한다. "대부분의 젊은 아버지들은 지금까지도 아이들을 위해 속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그리고 모성에 대해서도 "모성애란 부성애와 똑같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계발해야 하는, 많은 착오와 방해를 감수해야 하는 특성이다. 아이는 금방 낳지만 엄마의 결속감이 생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라고 한다. 신 부성과 신 모성 그리고 신 가족제도는 저절로 완성되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같이 준비하고 계발해야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도 저출산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치열한 성과주의 사회는 여전히 가족을 방해한다. 직장이나 일터에서 학습된 생산성의 논리가 가족생황에 그대로 적용되어 가족이 가지는 원래 의미가 퇴색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업과 국가를 위한 생산성의 논리로 국가의 지원 속에서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만 가족에게는 그렇지 않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일 때문에 방해 받지 않는 가족의 시간 역시 발견되고, 나아가 보호되어야 한다."고 한다. 결국은 저출산의 문제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 그리고 사회가 동시에 짊어져야 할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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