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21일 월요일

인생의 프로가 되는 것이란......"변화 마인드맵"을 읽고.....

 
앞으로 10년, 나의 몸값을 결정짓는 변화 마인드맵 - 8점
프랑크 나우만 지음, 장혜경 옮김/갈매나무


 
성공의 기준은 각자 다르지만,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성공을 하기 위해서 저마다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 결과는 자신이 꿈꿨던 것일 확률은 높지가 않다. 오히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맛보는 것이 성공이다. 성공한 이들을 롤 모델 삼아서 그들의 성공법을 흡수하며 자신의 꿈을 가꿔나간다.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음에도 우리는 자기가 성공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꿈 조차 없다면 삶을 열정적으로 이뤄가는 목적조차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미 성공한 사람들이 이룬 성공의 비결에 관한 책이나 정보는 많이 있다. 예를 주식 투자의 대가 워렌 버핏의 성공비결에 관한 책들은 넘쳐난다. "가치투자"로 대표되는 그의 투자방식을 많은 사람들이 따라 하지만, 그가 이룬 성공 만큼 이룬 사람은 거의 없다. 대표적인 창조적 CEO 스티브 잡스와 애플사를 분석한 책은 많아도 잡스와 애플사 만큼의 창의적인 제품을 만들거나 성과를 낸 기업은 거의 없다. 똑똑한 사람들이 연구하고 분석한 성공의 비결이라는 것을 이미 성공한 사람들처럼 다시 재연하는 것은 그 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이미 발생한 결과나 현상을 나중에 분석하여 학문적 체계를 구축하는 학문인 것처럼, 성공학도 발생한 결과를 보고 다양한 성공요인들을 분석해서 만들어낸 분야다. 많은 시간을 조사하고 연구를 한다고 해도 성공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 자질과 주변환경 같은 쉽게 알 수 없거나 따라 하기 힘든 다양한 요소들은 다 포함할 수가 없다. 결국에는 성공학은 성공을 위한 참고사항일 뿐이지, 그것이 지름길이 될 수가 없다. 우리는 자기만의 성공의 길을 찾아야만 성공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또 다른 성공 공식을 믿는다. 노력하면 반드시 그 만큼의 대가를 얻는다고…… 하지만 세상은 결코 노력한 만큼의 대가만을 얻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인 차이에 따라서 노력의 대가 또한 차이가 발생한다. 어떤 경우는 대가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원하는 성공을 이루지 못했을지라도 우리는 그런 믿음을 거두지 않는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이 책의 저자는 "바로 그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막다른 골목의 벽을 향해 미친 듯 돌진하는 것을……"라고 한다.


 성공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도, 눈 앞에 실패가 보여도, 지금 당장 실패를 해도 "우리는 노력하면 반드시 그 만큼의 대사를 얻는다"는 믿음을 쉽게 철회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 믿음에 대한 신화적인 맹목적 추종일 수도 있지만, 저자는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 단 하나 때문이다"라고 한다. 실패를 두려워함은 물론이고 그런 실패를 부끄러워하는 인간의 본성이 우리의 성공을 가로 막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인식과 본성에 대한 인식을 우선 바꿔야 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꿈꾼다. 내가 보기엔 성공은 그저 지속적인 실패와 자제를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 실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1%의 성공과 흔히 사람들이 실패라고 부르는 것의 결과 99%일 뿐이다."라는 혼다 소이치로의 말은 "노력=결과"를 맹신하고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우리들에게 현실을 깨닫게 해준다.


 자신과 현실을 정확하게 통찰하면 우리는 성공을 향해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실패를 경험해도 용기를 내어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으며, 현실에 안주하거나 쉽게 좌절하지 않게 된다. 에디슨이 발명을 하면서 수 천번의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것을 실패라고 하지 않았다. 에디슨이 "수 천 번의 잘못된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 것 처럼 우리는 잘못된 방법을 알아가면서 자신만의 성공법을 하나하나 만들어 갈 수 있게 된다.


 유연함이란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거나 변화를 미리 예측해서 앞서가는 능력이다. 이런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트렌드를 예측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미래의 위험에 대해서 대비하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부에만 눈이 멀어서 서브 프라임 사태를 초래한 썩어빠진 욕망 앞에서 유연함이란 쉽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우르르 때를 지어 트렌드를 쫓아가면서 만들어내는 위험과 거품은 유연함을 압도해버린다. 뉴타운 개발 공약과 기대심리가 만들어내는 썩어빠진 욕망은 또 어떤 거대한 거품을 만들어낼까? 전 세계의 부동산가격이 빠지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한국만 오르고 있는 상황은 참 아이러니다. 몇 년 후에 우리나라도 서브 프라임이나 일본의 부동산 붕괴 같은 거품이 터질 날이 오지 않을까?


 욕망에 묻혀버린 유연함을 갖추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 비교해서 실패한 이유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인데, 욕망을 억지로 누르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거기에 대해서 자자는 프로라는 것을 제시한다. 저자는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에 대해서 "아마추어는 우선적으로 자신의 수를 계획하고 상대가 자신이 만든 덫에 걸려들기를 바랐다. 하지만 프로들은 상대, 즉 경쟁자의 가능한 수를 먼저 고민한 후 그 다음으로 상대의 전략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자신의 수를 결정하였다."라고 했다. MBC의 무릎 팍 도사에 이만기가 출연했을 때 강호동의 씨름선수시절의 경험과 저자의 이야기는 한치도 다르지 않다. 강호동이 또 다시 존경스러워진다.


 결국에는 우리는 인생의 프로가 되어야지 원하는 성공을 향해서 변화할 수 있고 용기를 내어서 다가 갈 수 있는 것이다.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수를 생각하면서 위기에 대응하고 트렌드에 주도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성공을 잡을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취의 법칙"이나 "시크릿"에서는 끌어당김 법칙이라는 말로 욕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즉 욕망이 인생에 열정을 심어준다. 열정 다음에 필요한 것 그것은 우리가 인생에 프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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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7일 목요일

혼탁한 세상을 향한 통쾌한 독설 "신해철의 쾌변독설"

 
신해철의 쾌변독설 - 10점
신해철.지승호 지음/부엔리브로(자음과모음)


 
신해철. 그가 무한궤도를 나와서 솔로 1집 앨범을 냈을 때, 그때가 초등학생이었는지 중학생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하얀 피부에 곱상한 외모를 보고 기생오라비 같이 생겼다고 싫어했었다. 그 당시는 음악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그의 음악보다는 외모로 그를 평가하게 되었었다. 그러다가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의 솔로 2집 "Myself"를 통해서다. 타이틀 곡은 '째즈 카페' 였지만, 나를 사로잡은 그의 음악은 '나에게 쓰는 편지'였다. 지금도 물질만능주의 사회이지만 신해철은 그 곡을 통해서 물질만능주의 세계에서 흔들리는 자아를 성찰하려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가사와 노래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앨범을 구입하고 앨범 전체를 듣고 그의 마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앨범에 수록된 모든 노래의 가사를 외웠었고, 지금도 즐겨 부르는 노래는 그 앨범의 노래들이다.


 음악보다 그를 더 좋아하게 된 것은 그의 솔직한 말투와 논리 정연한 생각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를 보고 독설가라고 어떤 이들은 괴팍한 성격의 딴따라에 아웃 사이더라고 말한다. 언론이 만들어낸 자극적인 기사의 헤드라인과 내용으로 왜곡되어 버린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그의 라디오 방송을 몇 일간만 들어본다면 생각은 바뀔 것이다. 그가 내뱉은 무수한 말들 중에 진정한 독설에 가까운 말들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표현의 과격함은 불합리하고 혼탁한 세상을 향한 그의 무기이자 몸부림일 뿐이다. 그는 괴팍하지도 대단한 독설가도 아니다. 그는 단지 잘못된 세상을 향해서 잘못을 지적하고 말할 뿐이다.


 그의 라디오를 매일 듣던 청취자는 아니지만, 방송을 들을 때마다 그의 생각들을 책으로 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디오 주파수를 통해서 그냥 공기 중으로 흘려버리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생각들이 많았다. 체벌에 반대하고, 간통에 반대하고, 대마초 합법화를 외치는 그의 말들과 생각이 기성세대라고 불리는 사람과 그들에게 세뇌 당한 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가치관에 대한 거대한 도전일 테지만, 그것은 그가 무수히 쏟아내는 생각과 말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번 "쾌변독설"이 신해철의 말을 지승호라는 작가를 펜을 통해서 탄생하기는 했지만, 이제껏 그가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어했고 말했던 것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신해철은 "우리나라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나쁜 근성 중에 하나가 자기 히어로를 중간에 내다 버린다"고 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멀리한 수 많은 아티스트들과 가수들이 스쳐 지나간다. 지금도 감히 마왕 신해철의 신도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는 없을 정도 이기에 가수 신해철에게는 미안하다. 하지만 변명을 하자면 난 "그땐 미쳤었지"라고 함부로 말한 가수가 없다.


 "어린 시절부터 자기의 오피니언을 가지지 못하도록 교육을 받고 있는 그 세대들이 어른이 되어서 일으키는 각종의 문제와 부작용들에 대해서 뭐라고 하겠어요?"라고 반문한다. 지금의 88만원 세대, 총선에서 자신의 권리를 그냥 내던져버린 81%의 20대들을 한번에 관통하는 질문을 던진다. 잘 사육되어버린 지금의 그들 기성세대의 더러움과 추잡함에 침묵하고 방관하며 순응한다. 그들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질문하나에 담겨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누군가가 정해놓은 길을 부모님과 기성세대에 떠밀리듯 걸어가고 있다. 이런 현실은 얼마나 슬픈가?  신해철은 "껍질의 파괴"에서 이런 현실을 비판했었다. 늘 그렇듯 현실은 개선되지 않고 더 악화만 되었다. 학생들의 인권보다 경쟁이 우선이고 학생의 창의력과 존엄성보다 성적이 우선이다. 나중에 커서도 삶의 목적은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이겨서 더 높은 승진과 돈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신해철은 "인간이 행복을 찾아 여행을 하면서 사는 삶이 아니라 공포 속에서 추격자에 의해서 쫓기는 삶을 사는 게 가장 불행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한다.


 우리 사회의 기독교의 힘이 막강해서 문화평론가도 시사프로그램도 함부로 기독교의 치부를 건드리지 못한다. 문화평론가 김갑수씨는 한 신문의 칼럼을 통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비판하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신해철도 그런 현실을 정확하게 지적하면서 한국 기독교의 근본적인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기독교들이 이단이고, 우리나라 무속 신앙이나 기복신앙과 결탁해서 사회 기득권층을 형성하려는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담합하면서 기독교의 모습을 이미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라는 이름을 갖다 쓰고 있죠"라고 한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방송에서 그렇게 혈액형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을 비판하는 신해철이, 자신은 전형적인 O형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청소년들의 상담을 해주면서 논리적으로 비판했던 그가 인터뷰에서 자신을 혈액형의 한 인물형으로 정의하는 것을 보면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완벽한 논리로 무장하고 파고들 틈이 없는 철저하고 냉혈적인 인간이 아니라 그도 불완전한 인간의 하나라는 동질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 밖에도 그의 음악과 주변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책이다. 내가 몰랐던 그의 모습도 조금씩 알게 됨은 물론이고, 그의 음악에 대한 다양한 평론가들의 평도 같이 엿볼 수가 있어서 좋았다. 동시대를 활동하던 서태지와 비교해서 신해철의 음악적 업적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그들의 평은 나에게 확신을 준다. 언젠가 신해철의 팬이 아닌 내 친구가 "신해철은 뭔가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드러내서 좋다."는 말을 했다. "쾌변독설"은 신해철의 많은 것을 세상에 드러낸 책이다. 그러면서 세상에 대해서도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하는 책이다. 이런 모습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책으로 세상을 향해서 독설을 퍼부었으면 좋겠다. 그런 그의 목소리가 암흑 같은 세상을 밝힐 조그만 촛불이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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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6일 수요일

영화보다 재미있는 성장 소설 "점퍼 1 - 순간이동"

 
점퍼 1 (보급판 문고본) - 8점
스티븐 굴드 지음, 이은정 옮김/까멜레옹(비룡소)


 
유치한 성적욕망을 자극하는 투명인간이라는 초능력도 좋지만, 어디든지 순간이동 할 수 있는 초능력이 더 매력적이다. 영화 '점퍼'를 보면서 나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순간이동이 가능한 '점퍼'이고 싶었다. 그보다 더 어릴 때는 만화 "드래곤 볼"의 주인공 손오공처럼 초샤이언인이 되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순간이동이라는 그의 능력이 더 부러웠었다. 자동차를 이용하거나 지하철을 이용하거나 또는 걸어서 이동하는데 소비하는 시간적 제약과 그곳이 어디든 장소적 제약을 받지 않는 순간이동이야 말로 교통지옥에서 힘들어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판타지가 되지 않을까? 모든 도시인들이 순간 이동하는 상상만해도 즐겁다.


 보통 때 같으면 영화의 원작을 잘 찾아보지 않는다. 영화적 완성도는 떨어지는 '점퍼'같은 영화의 원작은 더욱 더 그렇다. 그렇지만, 영화에 표현된 순간이동장면이 잘 묘사한 영상 때문인지 순간이동에 대한 나의 판타지 때문인지 몰라도 소설 '점퍼'를 읽게 되었다. SF라는 장르는 상상하는 것으로도 즐겁지만, 최첨단 컴퓨터 기술로 표현되는 영화의 영상도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을 표현한다. 영화를 먼저 봤기 때문에 소설이 지루하거나 상상하는 재미를 떨어뜨리지 않을까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걱정은 단지 기우였다. 영화보다 더 잘 짜여진 스토리였을 뿐만 아니라 영화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늦은 밤까지 책을 덮지 못하게 만들었다.


 '점퍼1-순간이동'은 SF형태를 한 성장 소설이다. 순간이동이라는 특별한 재능이 부각되기는 하지만,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서 가출한 소년이 내적 갈등을 거치면서 성숙해져 가는 과정이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주인공의 도덕적으로 해이해 보이는 장면도 있다. 자신의 재능으로 은행을 털기는 하지만, 주인공 데이비드가 처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갑자기 가출을 해서 자신의 신분을 담보할 만한 어떤 증명자료가 없는 상황으로 직업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그 상황에서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주인공은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의 일어나는 내적 갈등도 잘 묘사되어 있다.


 성장소설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로맨스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랄까?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다른 이의 입장에서 본격적으로 생각하는 시기가 아닐까? 소설에서도 데이비드가 한 단계 더 성숙하게 되는 과정도 사랑을 통해서고 상처를 잘 치료한 것도 사랑을 통해서다. 고등학교 동창생의 성적 유혹에 당황해서 순간이동하고, 여자친구와의 첫 섹스에스 경험이 없다며 우는 순진한 데이비드가 성인이 되는 순간도 사랑을 통해서다.


 그리고 또 다른 갈등의 시작은 어린 시절 가출했던 어머니와 만남을 통해서 부각된다. 단 한번의 만남이 영원한 이별이 되어버리면서 데이비드는 또 한층 성장하게 된다. 사건의 시작은 어머니가 비행기 납치 테러리스트에게 살해되면서다. 슬픔과 테러리스트에 대한 분노가 뒤석이면서 자신의 재능을 이용한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비행기 납치 소식이 전해지면 그곳으로 점프해서 테러리스트들을 하나 둘씩 제압한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테러리스트가 잡일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정부 관계자도 그의 능력에 대해서 눈치를 채고 추적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목표로 했던 테러리스트를 잡았을 때 데이비드는 또 다른 내적 갈등을 겪게 된다. 테러리스트를 향한 분노와 표출 방법이 그렇게 싫어하고 증오했던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다. 테러리스트를 죽여서 어머니의 복수를 완성하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잔혹하며 또한 의미 없는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결국에 데이비드는 자신의 굴례와도 같았던 복수심과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모두 떨쳐버리게 된다. 또한 자신의 재능을 유익하게 쓸 방법을 고민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영화와 소설을 비교했을 때 영화는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보여주기에 치중해서 화려한 영상이 관객을 압도한다. 나도 점퍼이고 싶다는 생각이들 정도로 매혹적인 영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이 다라는 점에서 영화는 뭔가 여운도 감동도 남겨주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은 주인공의 내적갈등과 성장과정이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건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쉽게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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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8일 화요일

선거라는 이름으로.......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고등학교 배정을 받을 때 충격을 받았었다.
같은 반 친구들은 대부분 근처에 있는 학교로 다 배정을 받았는데,
그 반에서 나 혼자 다른 학교에 배정을 받았다.
전교에서도 10여명인가 나랑 같은 학교에 배정을 받았다.
부모님들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나름 명문이라고 불리는 학교에 배정받아서 기뻐하셨지만,
친구들과 떨어져 나 혼자만 그곳에 간다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부모님이 그 학교를 좋아하셨던 이유인 소위 명문이라는 것,
역사가 오래된 만큼 동문회가 막강하다는 것이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아직까지는 모르겠다.

그보다 대학가서 고등학교 선배라는 이유만으로도
얼차려를 강요하는 행태를 보고 실망해서 대학교 1학년 이후에
발길을 끊었고 동문회 관련된 것은 멀리했다.
그런 사람들이 소수일 수도 있겠지만......
두 번째 실망했던 것은 선거와 관련되어서다.
대학 1학년 때 마침 선거가 있었는데,
출마하는 한 선배를 위해서 몇 수십통의 편지를 할당 받게 되면서다.
그 당시 선거법은 프린트물이나 복사물로 편지를 써서 보낼 수 없고,
오로지 손으로 쓴 편지만 허용했다.
내가 순진했던 것은 부탁이라는 것을 받으면
쉽게 거절을 하지 못하게 요령을 피우지도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편지를 손으로 써주고야 말았다.
지금 같아서는 그냥 거절하거나 면전에서 따졌겠지만.....
물론 내가 부탁받은 사람의 정책이나 됨됨이를 잘 알고
지지를 할만 하다고 생각되면 기꺼이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선배하나라도 더 당선되어야지
학교가 발전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국회의장까지 지내고 은퇴한 선배가
학교에 뭘 기여했는지는 모르겠다.
몇 년전에 모교에 운동장에 인조잔디가 깔렸다는데 그것이 학교 발전에 기여한건가?
소수의 운동부만 이용하고 일반 학생들은 제대로 이용하기 힘든
운동장이 과연 누굴위한 것인지.....
그것보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먼저 기여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좋지 않을까?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사에 중심에 있었던 학교라고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나라와 국가의 발전보다는 지금 학교와 동문만을 생각하는 행태는
자랑스러워 하는 역사에 부끄럽지는 않은지?

동문회와 거리를 멀리했어도 매년 선거철이 되면 동문회의 연락을 받게 된다.
내가 사는 지역구에 출마하는 동문의 지지를 부탁하는 전화다.
그런데 올해는 안오나 싶었다.
웬걸 주말에 두 통의 전화를 받았다. 모두 동문회에서.........
동생도 같은 동문이다 보니 토요일날 온 전화는 동생을 찾는 전화였다.
동생이 외출하고 없다고 했는데, 그냥 나 한테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 우리 지역구에 출마하는 xxx 후보가 동생 선배인지 알고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학연이런거 싫어하는 삐딱이인지라, 모르는데요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랬더니 xx고등학교 동문입니다.
동생분에게 지지 좀 해달라고 전해달라는 이야기로 전화 통화를 끝냈다.

일요일, 열심히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보면서 낄낄거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이번에도 동문회였다. 이번에는 나를 찾는 전화였고 같은 이야기였다.
이번에 그 지역구에 누가 출마를 했고, 선배이니까 지지를 부탁한다고......
그러면서 이번에는 하나 더 덧붙인다. 가족들에게도 이야기 해달라고.....

그들이야 좋은게 좋은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동문이라는 이름으로 소위 학연이라는 것으로
하나의 행태로 얽힌 것 자체가 남이 아니니까.......
나는 이런 행태가 정말 싫다.
정책과 정치적 성향 그리고 그 사람의 자질과 됨됨이로
표를 행사하는 것이 진정한 유권자의 의식이다.
이런 의식을 배반하는 전근대적인 행태의 죄악은
우리세대만이 겪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고 확대된다.
지금 썩어빠진 지역감정과 싹쓸이 현상이 일어나며,
소수정당이 들어설 틈이 없지 않은가?
나중에는 그 정치인과 정당을 향해서 저주스러운 말과
욕설을 마구 퍼붙는 자기모순적 행동을 하면서..
다시 선거가 시작되면 자동적인 행동패턴을 벗어나지 못하는
저질스러운 정치의식은 계속 발현한다.

지난 대선에서도 썩어빠진 모대학의 총동문회가 불법 선거운동을 하면서
선관위의 경고를 받았고 무시까지 했었다.
뭘 그렇게 권력에 줄을 대려고 아웅바둥인지 모르겠다.
학연, 지연이라는 썩어빠진 동아줄에 기대어서 무슨 큰 야욕을 보려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이런행태가 부끄럽지 않은가?
민족사학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들던 그 대학이
과연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올바른 행동을 했는가?
나
의 모교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국민을 생각했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학교와 동문이라고
자랑하며 후배들에게 전수하면서....
학연의 끊을 놓지 못하고,
동문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지지를 부탁하는 행태는 과연 올바른 행동일까?

ps>
우리는 계속 뫼비우스의 고리만 맴돈다.
더러운 세상을 욕하고, 비열한 세상에 한탄하고,
철옹성보다 단단한 기득권 세상에 좌절해도
스스로 나서서 바꾸려 하지 않는다.
결코 위에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조금이라고 알아채야 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것은 거짓이고 위선일 뿐이다.
나이가 들어 윗물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더러움과 부패함에 찌들었다는 것이다.
결코 그들은 젊은 세대를 위해서 희생하거나 세상을 바꾸려하지 않는다.
지금 안주하는 것 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하까.... 그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본성이다.
스스로 깨어난 자가 붓다가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세상을 바꿔나갔듯이,
우리는 스스로 깨어나 세상을 바꿔야 한다.
젊다는 것이 결코 투표를 표기하고 세상에 순응하는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
투표하자. 자신의 정당한 목소리를 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