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12일 일요일

책 "A4 솔루션"을 읽고......

 


 대학입시가 끝나면 언론의 주목을 받은 수석합격자나 수능 최고점수자들의 수기가 책으로 출간되곤 한다. 요즘에는 글로벌 시대라서 그런지, 아니면 서양에 대한 사대주의 또는 콤플렉스 때문인지 몰라도 해외 명문대에 합격한 이들의 수기들이 책으로 출간 된다. 그 수기들의 마지막은 99%가 자신들의 공부법에 대한 장황하면서도 자세한 설명들이 실려 있다. 요즘은 그런 아이들을 키운 맹모들의 수기들이 책으로 출간되기도 하는데, 책의 전반적인 내용이 어떻게 자녀를 교육시키는지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다. 하지만, 그 책을 읽는다고 해도 그 사람들처럼 되지는 않고, 그런 자식을 키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치 공장에서 붕어빵 찍어내듯 어떤 공정만 거치면 아이들도 획일적인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그런 것들을 소비한다.

 

 실제로 그 책을 읽고 그 책의 주인공과 같은 성과를 이룬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한 명, 한 명 아이의 재능, 능력 등이 같을 수도 없고, 가정환경이나 교육환경이 같을 수도 없고, 부모의 능력이나 성향도 같을 수도 없다. 우리는 그것을 망각하기에 자신이 또는 부모가 그 책의 속의 사람만큼 노력하고 뒷받침만 받는다면 그들 처럼 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있는 것이다. 각자의 재능이나 적성은 완전히 무시하고 학벌과 학력이라는 허상을 쫓기에 바쁘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을 하나의 존엄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속물 또는 만들어 낼 수 있는 공산품으로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아이들의 생각보다는 우리 어른들의 생각과 주장을 강요할 뿐인 것이다.

 

 시중에 넘쳐나는 자기 계발서들도 그런 책들과 비슷하다. 그런 책들은 읽을 때는 나도 저자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심어준다. 그래서 우리는 나도 그들 처럼 될 수 있는 환상으로 그런 책들을 소비한다. 비슷한 내용들의 반복인 책들을 우리는 계속 소비하면서도 그들처럼 성공한 사람을 주변에서 만나기는 힘든 것일까? 그 이유는 책들에 쓰여진 방법들을 제대로 실천하고 자신의 기술이나 습관으로 완전히 소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우리는 그 책의 내용들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왜 우리는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과 의욕은 있으면서도 노력하지 않는 것일까? 선천적으로 게으른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공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재능과 적성을 무시한 채, 남들의 경험과 성과를 자신에게 맞추려 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쉽게 흥미를 잃고 실증을 내면서 처음에 다짐했던 의지는 점점 약해지는 것이 아닐까.

 

 대부분의 자기 계발서들이 저자들의 경험과 성공담을 기본으로 한다. 그 경험을 논리적으로 또는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다른 책들의 이론이나 성공담을 끌어 오면서 그것을 합리화 하거나 논리를 강화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것이 올바르다 틀리다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지극히 저자 중심의 내용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정확한 사실이다. 그래서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이 저자와 같은 적성과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닌데 그것을 바로 적용하고 습관화 시킨다는 것은 힘든 일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소위 고전으로 평가 받는 몇몇의 저작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이런 책들은 고전의 확장된 형태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책의 저자들이 고전의 내용을 발판 삼아서 자신의 경험과 노력을 확장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책들의 핵심 내용은 언제나 동어 반복적이다.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면서 저자가 자신 나름의 방법에 대한 설명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자기 계발서는 참고서일 뿐, 맹목적으로 믿고 실천해야 하는 바이블이 될 수가 없다. 즉 자신을 잘 파악한 다음에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을 때 참고하는 자료일 뿐이다.

 

 입시지옥에 시달려온 한국 사회에서는 참고서라는 것이 교과서보다 더 유용하게 취급 받는 기현상이 있는데, 그로 인해 참고서를 반복 복제 소비만 할 뿐, 자신만의 것과 방식으로 확장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책은 참고서일 뿐이다. 동어반복이나 내용의 복제와 반복에 그치지 말고, 자신의 만의 것으로 만들도록 노력해야 이런 책들이 빛나는 것이다.

 

 이 책 "A4솔루션"도 비슷한 책들의 동어반복적인 내용들이 많다. 다른 책들과 조금은 차별화 되는 내용이라면 A4용지를 활용한 생각을 정리하는 노하우랄까? 벤자민 프랭클린이 만들었다는 "프랭클린 다이어리"처럼, 기록을 통해서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목적이나 방향,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과 같이, A4 용지에 그런 내용들을 하나 하나 기록하면서 머리 속에서만 맴돌던 생각들을 현실화 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다짐은 물론이고,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필요한 해결방안이나 실천방향을 확립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다양한 저자의 경험과 노하우가 있는 책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생각은 많으나 구체적으로 현실화 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되지 않을까.


A4 솔루션 - 6점
미키 다케노부 지음, 이동희 옮김/전나무숲


2009년 4월 7일 화요일

"메피스토 펠레스" 뉴라이트. 책 "뉴라이트 비판"을 읽고....

 


 
이 사람들의 뇌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그들이 생각하는 상식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뉴라이트"는 말 그대로 기존의 보수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와 병폐를 극복하고 새로운 보수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뉴라이트"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옛 것 그것도 독재와 제국주의로의 회귀다. 민주적 절차나 다양성보다는 정치적 결정이 먼저 앞서고, 그 다음에는 검찰과 경찰이라는 공권력을 동원한다. 나는 결코 법질서를 위반하는 사람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돈과 권력 앞에는 약하고, 힘없는 서민들에게는 강한 공권력에는 화가 치민다. 뉴또라이들이 만들어낸 사회의 공권력과 정의란 그런 것이다.

 

 노무현 정권 당시만 해도 청렴성이니 도덕성이니 하는 것이 중요한 잣대였고, 그 강력한 잣대를 만든 것이 뉴또라이들을 핵심지지기반으로 하는 딴나라당이 아니였던가? 그런데 권력이 바뀌었다고, 그 때 내세웠던 청렴성이나 도덕성의 잣대가 자기들 맘대로 바꿔버리는 집단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뿐인가?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돈이나 권력이라면 청렴성이니 도덕성이니 필요 없다는 생각이 만연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정권에 따라서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서 논조를 바꿔버리고 사실을 왜곡해버리는 신문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자신의 논조와 관점에 일관성을 가지고 사실을 보도하는 언론에 대해서는 좌파 빨갱이 언론으로 매도해버린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어떤 언론이 더 신뢰가 가는 언론인지 알 수 있을 텐데, 유치하게 구시대적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사실을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폴 크루그먼의 책 "미래를 말하다."를 어떤 사람은 미국의 오바마가 가야할 정책 방향을 제시한 책이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책을 우리나라 꼴보수들 즉 뉴또라이와 딴나라당이 해온 과거와 현재의 짓거리를 미국을 통해 볼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꼴보수들이 어떻게 미국의 사회보장제도를 공격해 왔는지, 색깔논쟁으로 어떻게 진보세력을 공격해왔는지, 부정선거를 해서 어떻게 선거에서 이겨왔는지까지. 그 책의 하나부터 열까지 한국의 꼴보수들 뉴또라이와 딴나라당의 행태와 흡사함에 놀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폴 크루그먼이 제시하는 정책방향보다도 더 인상 깊었다. 미국의 매카시즘이 과거의 역사(오바마의 정책을 두고 공산주의 정책이나 좌파정책이니 하는 색깔 논쟁을 벌이는 꼴통들이 조금씩 보이기는 하지만)라면 한국의 매카시즘은 진행형이다. 입만 열면 좌빨을 내뱄는 딴나라당과 뉴또라이 그리고 그 추종자들로 인해서. 그래서 더 인상이 깊게 남는 책이다.

 

 그럼 왜 그들은 그런 짓거리를 하고도 당당하며, 많은 국민들은 그들에게 동조를 하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뉴또라이들의 논리만큼 단순 명쾌한 것이 없다. 반면 그 반대편은 소위 진보진영의 논리는 복잡하거나 이해과정에 많은 노력을 요한다. 이 책에 지적하고 있는 그들의 근본 배경 사상은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경쟁이라는 필연적이며 약육강식의 사회는 당연하다는 것이다. 얼마나 단순한 논리인가. 경쟁을 종교처럼 떠 받드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그것은 종교적 신념이요 믿음인 것이다. 그런 굳건한 믿음과 신념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김임규란 작자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서 "최초로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 왔다는 것이 인간으로 할 수 없는 큰 일을 한 것이라고 단언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히데요시를 통하여 이루어 졌다."라고 말한다. 종교를 믿는 신학 교수라는 작자가 종교의 가르침에 반하는 행위(살인, 강간, 전쟁과 같은 것)에 대해서 침묵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지성인이자 종교인이라는 인간 조차도 이런 광신적 행태를 보이는데, 일반인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들에게 사회라는 것은 적자생존의 전쟁터요 밀림이다. 그들에게 사회의 구성원들은 경쟁의 상대일 뿐이고, 정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책 "사회지능"에 재미있는 실험사례들이 실려있다. 그 중 인간과 가장 비슷한 영장류에 속하는 붉은털원숭이 실험을 보자. "붉은털원숭이 여섯 마리가 끈을 당겨 먹이가 나올 때마다 일곱 번째 원숭이에게 전기 충격을 주는 실험을 했다. 고통스러워하는 동료를 본 원숭이 중 네 마리는 먹이가 극히 적지만 전기 충격이 없는 다른 끈을 향해 갔다. 다섯 번째 원숭이는 5일, 여섯 번째 원숭이는 12일 동안 아예 끈을 만지지도 않았다. 동료에게 전기 충격을 주느니 차라리 굶은 것을 선택한 것이다."라고 한다. 거기에는 원숭이 뿐만 아니라 쥐를 가지고 한 다른 실험에서 비슷한 이타적인 행위를 보여준다. 그런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라는 우리는 그렇게 이기적이기만 할까?

 

 우리는 "파우스트"다. 유혹에 약하고 탐욕에 나약해서 내부의 이기심에 쉽게 마음을 빼았기는 파우스트다. 반면에 뉴또라이들은 "메피스토 펠레스"다. 우리 인간의 내부의 탐욕과 이기심을 자극해서 우리를 적자생존의 세상으로 전쟁터로 몰아넣고 있는 악마다. 악마들의 유혹이 달콤하기에 나약한 우리들은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굴복하고 만다. 그로 인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우리가 그렇고 원하는 돈과 출세 권력이 아니라 자중지란으로 인한 후회와 상처 뿐일 것이다. 악마의 유혹에 그냥 우리를 내 맞길 것인가 아니면 냉철한 이성으로 우리 안의 이타심을 찾을 것인가? 이 책은 악마의 유혹과 실체에 대해서 냉철하게 접근한 책이다.


뉴라이트 비판 - 8점
김기협 지음/돌베개

2009년 4월 5일 일요일

브랜드 컨셉에 대한 이야기.. 책 "Unitas brand vol 8."을 읽고

 

 우리는 스스로를 똑똑한 소비자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우리들만의 착각일 뿐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소비할 때 합리적인 기준과 가격을 가지고 소비하는 것 같지만, 타인의 시선으로 그 과정을 바라봤을 때는 우리의 선택이 결코 합리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를 돌아 볼 필요도 없이, 주변의 친구나 가족이 소비하는 형태를 유심히 관찰해보면 그런 광경은 흔한 모습이다. 그들에게서 구매 이유를 듣다 보면, 그것은 자신의 소비에 대한 변명 또는 자기합리화 일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온갖 이유를 가져다 붙여도 우리가 하는 행위는 우리의 내적 욕망을 소비라는 외형적인 형태로 해소할 뿐이다.

 

 과거에는 1차원적 욕망, 의식주로 대표되는 생존을 위한 소비였다면, 현재는 다른 차원의 소비로 행해진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적 욕망이나, 개인이 가지고 있는 판타지를 만족시켜주는 방향으로 변해왔다. 그에 따라서 우리가 소비하는 상품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기능을 넘어서 소비자에게 어필할 또 다른 것을 찾기 시작했다. 브랜드란 이름으로 기능을 넘어서 비슷한 상품과는 완전히 차별화되는 자신만의 색깔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브랜드는 결국에 소비자들의 내적 욕망을 자극하고 충족시켜주는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면서 소비자들은 합리적인 소비보다는 점점 더 내적 욕망에 따른 소비를 선택한다. 브랜드가 내뿜는 마력에 따라서 말이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브랜드라는 것은 배트맨에 나오는 투페이스 같은 존재다. 브랜드를 소비함으로써 얻는 만족이나 행복감이 선한 얼굴이라면, 객관적인 기능이나 원가 이상의 가격을 지불하게 함은 물론이고 소비자의 능력이상의 것을 소비하게 만드는 사악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런 두 얼굴 때문에 우리는 비합리적인 소비를 하면서도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기 위해서 선한 얼굴만을 강조한다. 그래서 구입 초기는 행복으로 충만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 날라오는 카드명세서와 부족한 통장잔고, 그리고 먼지에 뒤덮여 방구석에 자리잡은 상품을 보면서 후회로 충만하게 된다. 내적 행복은 짧고, 후회와 후유증은 길게 다가 온다.

 

 소비자에게 두 얼굴을 가진 브랜드이지만, 마케터의 입장에서 브랜드를 바라보면 전혀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호수 위의 백조는 우아하게 헤엄치지만, 물 속에서는 발이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할까? 대신 소비자에게 보여지는 것이 물 속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발의 모습이랄까? 브랜드가 소비를 위해서 욕망과 이성사이에서 이리저리 갈등하게 만드는 혼란스러움이라면, 마케터에게 브랜드는 소비자의 판타지를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잘 만들어진 우아함을 가진 물 위의 백조모습이다. 단지 하나의 목표,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브랜드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 브랜드를 만드는 과정이나 만들어진 브랜드에 대한 케이스 분석 속 세상은 신세계 발견하는 듯한 신선함과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이번 유니타스 브랜드 vol 8.호는 그런 신세계의 탄생에 가장 기초이자 기본 바탕이 되는 concept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내가 정확하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유하자면, concept이란 씨앗이고 conceptualization은 그 씨앗을 가지고 식물을 키우는 과정이랄까? 어떤 열매가 나올지에 씨앗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얼마나 풍성할지는 마케터들이 과정에서 하는 역할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니타스 브랜드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브랜드는 무생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것이었다. 브랜드의 이야기를 만들고, 현재의 브랜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라는 것 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브랜드도 진화하게 된다. 진화하면서도 그 진화의 방향을 잃지 않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것이 concept이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런 Concept이라는 개념이 너무 포괄적이라서 그런지  애매모하게 설명해서 조금은 아쉽기는 하지만, concept이라는 개념 정의의 불명확함을 관련 종사자의 인터뷰를 통해서 다양하게 보여줌으로써 독자 스스로 그 개념을 적립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듯하다. 나는 아직 명확하게 개념을 못 잡았지만, 하나의 concept이 어떻게 설정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어떤 모습의 백조가 탄생되어지는 과정에 대한 사례들을 보면, 소비자로써 브랜드를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을 벗어나 브랜드가 완성되는 창의적인 세상에 대한 즐거움과  놀라움이 재미를 더해준다.


Unitas Brand Vol.8 - 8점
바젤커뮤니케이션 편집부 엮음/(주)바젤커뮤니케이션

2009년 3월 20일 금요일

임진왜란의 다른 해석이 아닌 역사의 소설적 재탄생. 소설 "숙적"을 읽고......

 


 스포츠에서는 마케팅이나 관중들의 흥미 유발을 위해서 선수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라이벌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탄생한 라이벌이 좋은 방향으로 작용해서 선의 경쟁을 펼친다면 서로의 기량이 같이 상승함은 물론이고, 관중들 또한 라이벌이 만들어내는 경쟁과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열광한다. 반면 선의 경쟁이 아닌, 질투와 시기가 바탕이 된 라이벌간의 경쟁은 그 결말은 영화나 소설에서 보여지듯 좋지 않은 결말을 만들어 낸다. 보통 스포츠와 같은 분야는 선의의 라이벌 구조가 많지만, 권력과 돈 같이 커다란 이권이 개입된다면 그 라이벌 구조는 쉽게 왜곡되어 버린다. 인간의 본성 중에 하나인 탐욕, 그리고 지나친 승부욕으로 서로를 경쟁을 위한 파트너가 아니라 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소설 '숙적'은 그런 관점으로 임진왜란 당시 1군과 2군의 장수였던 고니시와 가토의 관계에 보여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같이 총애를 받으며 성장했으면서도 서로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을 쌓아가는지, 그리고 그 결말을 통해서 얻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역사적 사실을 보더라도 두 장수는 교묘하게 서로의 대치점을 형성하고 있다. 전형작인 사무라이 기질의 장수인 가토와 장사치 출신으로 무사로써의 능력은 전혀 없지만, 외교와 행정에 뛰어난 고니시.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문관과 무관의 반목이 있었던 것처럼, 그들의 반목은 서로의 전문분야와 능력에 대한 폄하의식이 그 밑바탕을 이룬다. 그들이 가진 종교에서도 대치점을 이루는데 고니시는 기독교 교인이고, 가토는 불교 교인이다. 거기에 가정환경까지 더해서 본다면, 무역으로 단단한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부유하게 자랐던 고니시에 비해, 가토는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났다. 고니시는 돈으로 탐욕을 채운 후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가문에서 전략적으로 키워진 인물이라면 가토는 자수성가했다고 말할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사실만으로 라이벌로써의 조건은 충분하지만, 이들의 라이벌 의식을 자극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그는 전쟁의 전술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부하를 다루는 법에도 능수능란 했던지, 고니시와 가토를 각각의 재능에 맞게 활용하면서도 둘 사이의 경쟁을 붙여 라이벌 의식을 심어준다. 보통 전쟁 시에는 무관들이 승진이 빠른 법이지만, 도요토미는 고니시를 승진시킬 때에는 가토와 같은 무장들과 차별을 두지 않았다. 특히 가토와 고니시를 제후로써 봉할 때는 서로 이웃하고 있는 영지를 나눠 줌으로써 경쟁의식을 극대화 시킨다. 이 책의 초반부는 고니시와 가토의 이야기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능수능란한 전략에 놀라움을 느낄 수 있다.

 

 둘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이야기의 구조가 완성되고 나면 임진왜란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재미있는 것은 임진왜란에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서 일본의 시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시작되면 고니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개되는데, 우리에게 용맹하고 잔인한 1군의 사령관 고니시에 대한 인식을 바꿔버린다. 가토와 고니시의 라이벌이야기도 재미있게 전개되지만, 특히 흥미로운 것은 임진왜란과 관련된 일본측의 시선이다. 비록 소설이라고 하지만, 저자는 사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사료나 취재과정을 언급하면서 어느 정도 역사에 바탕을 둔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는 고니시가 임진왜란을 피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고니시는 기독교신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에 기독교인들을 앞세움으로써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고니시는 순교자에 가깝게 그려진다.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고 기독교 사상을 지키려고  끝까지 노력한. 하지만  책 "예수를 배반한 기독교"를 보면 고니시가 기독교 사상에 충실한 신자만은 아니였다. 그 당시 전쟁에 참가한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민경배씨는 "이 십자가의 표지 아래서 이들이 남달리 인간적이요, 덜 잔인한 살상을 했다는 기록은 하나도 찾아볼 길이 없다. 우리 겨레 역사의 한에 사무쳐 뼈에 스며 있는 악랄한 일본 군인의 만행에 대해서 이들은 예외가 될 만한 행동 하나 남겨 놓지 못하고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고니시가 도요토미를 거짓 외교문서와 사절단으로 속이면서 본격적으로 임진왜란은 촉발되는데, 이 책에서 고니시가 한양과 평양으로 빠르게 진격한 것이 선조를 만나서 화의협정을 맺기 위해서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고니시는 그의 허위보고가 발각될 것이 두려워 더욱 반란집압(임진왜란)에 열성을 보이는 것 처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다른 기독교인 장수 구로다는 5500개의 코를 벤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한 것을 보면 고니시가 기독교적 가치를 실천했거나 하려 했다는 것은 과장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숙적"이 소설이지만 실제의 역사적 평가와 많이 빗나가는 점이 발견된다.

 

 임진왜란의 후반부에 오면 고니시는 일본군의 동향을 조선군에게 일부러 알려줘서, 일본군을 패배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측 기록에도 이런 고니시의 행동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유에 대한 이 책과 역사의 평가는 조금씩 다른 차이를 보인다. 이 책에서는 고니시가 기독교 사상에 바탕을 둔 전쟁의 무의함과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가들의 평가는 "전쟁이 장기화 그리고 전신의 교착상태는 기리시단 군대의 군기 해이, 신앙적 타락을 초래했다."고 한다. 즉 고니시의 도요토미에 대한 반감으로 인한 배신에 더 많은 방점을 두고 있다.

 

 노벨상 후보까지 오를 정도로 뛰어난 작가인 엔도 슈사쿠가 왜 이렇게 역사와 다르게 고니시를 묘사했을까? 두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고니시에 대한 일본측 역사적 평가와 우리 나라의 역사적 평가가 다르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것이 쓰여진 사람의 주관이 많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역사라는 것을 함부로 단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에 공개된 정조의 어찰을 가지고도 정조의 독살설과 정조와 심환지의 관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것을 보면 역사의 해석에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는 보여준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엔도 슈사쿠는 일본 측 사료의 해석에 충실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엔도 슈사쿠라는 작가에 대해서 자세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엔도 슈사쿠의 종교가 기독교이고 그의 소설은 그런 종교를 바탕으로 많이 쓰여졌다는 점이다. 즉 그도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역사적 사실에 자신이 추구하는 관점이나 주제의식을 첨가하기 위해서 고니시라는 인물에 소설적 창작력을 입힌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고니시의 생각과 가토의 생각을 비교해보면 좀 더 명확하게 엔도 슈사쿠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가토는 자신의 숙적이 죽었음에도 희열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모든 것이 허무하고 덧없음 깨닫게 된다. 이런 감정은 도요토미가 만들어 놓은 굴레 속 라이벌 구도에서 갇혀 자신의 생각과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꼭두각시 때문에 살았기 때문이다. 반면, 고니시는 죽음의 순간, 도요토미가 만들어 놓은 굴레를 벗어나 자신이 원하던 삶을 선택했기 때문에 후회도 들지 않고 희열과 의의를 느낀다고 한다.

 

 즉, 엔도 슈사쿠는 가토와 고니시를 통해서 사회가 만들어 놓은 성공의 틀들(권력, 돈) 같은 것에 얽매여 사는 삶보다, 좀 더 가치 있는 이상과 신념(여기서는 기독교적 가치)를 바탕으로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삶을 사는 사람은 비록 결말이 좋지 않더라도 후회는 없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희열과 의의를 느꼈다고 표현할 정도로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소설 속의 임진왜란의 내용이 역사와 달라서, 어떻게 보면 역사의 왜곡이나 잘못된 역사의 해석으로 비판 받을 수도 있지만, 소설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집중해야 할 작품이다. 그렇게 책을 읽는다면 두 명의 운명적 라이벌의 삶을 좀 더 쉽게 비교하면서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숙적 1 - 8점
엔도 슈사쿠 지음, 조양욱 옮김/포북(for 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