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11일 수요일

흉악범의 사형 집행보다 우선 되어야 할 것.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고인들의 유가족이라면 이해하겠지만, 3자들이 너무 감정이입이 되어 이성을 잃고 그저 분노만을 표출하기 바쁘다. 범죄인의 얼굴 공개가 실익이 전혀 없음에도 자신들의 호기심만을 충족 시키고 분노를 해소할 대상을 차기 위해서 얼굴공개에 찬성하더니, 이제는 10여년 동안 집행되지 않음으로써 국제적으로 잠정적 사형 폐지국이라는 지위를 얻은 대한민국의 인권 수준을 후퇴시키기 위한 감정 표출에 열중한다. 딴나라 당이야 원래부터 포플리즘의 대명사인 정당이고,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권을 쉽사리 짓밟은 뇌수준의 집단이라 그렇다 쳐도,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우리들의 수준을 딴나라당의 수준에까지 맞춰야 하는가?

 

 진정으로 분노해야 것은 도심 가운데서 6명이란 고귀한 목숨을 앗아간 사태에 대해서 공권력이 전혀 책임지지 않은 것이고, 문제를 색깔 논쟁을 일삼는 쓰레기 같은 딴나라당의 국개의원들과 공권력이 아닌가? 과잉 집행된 공권력에 의한 불상사에 대한 분노는 뒤로 , 평생 세상 빛을 없는 사형수들을 향해서 분노를 쏟아서야 되겠는가? 분노하지 않아도, 앞에서 단죄될 인간과, 분노해도 법을 이리저리 피해갈 인간들 중에 어느 인간에 분노하고 문제를 바로 잡아야 하는가?

 

  뿐이랴, 성추행 사건이 발생한 민노총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어떠한가? 언론 때문에 문제가 커졌다고 생각하는 저열한 인식을 가진, 썩을 때로 썩어 버린 민노총 지도부의 수준에 대해서야 충분히 비난하고 비판 받아야 함은 당연하지만, 국민의 일꾼이라는 인간들은 성추행을 하던 탈세를 하던, 그런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분노하기는 커녕 털어서 먼지 나는 사람 있냐며 능력이 중요하다고 발광하는 쓰레기들을 보라. 민노총과 그들의 차이기 무엇이길래 한쪽은 엄청난 비난 속에서 반성과 개혁을 외치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저 자신을 길을 걸어갈 뿐이다.

 

 My way 가는 인간들의 수준이란. 겉으로는 선진화니 선진국 타령을 하면서 속으로는 자신들의 잇속 챙기기 뿐인데도 말이다. 미국의 보건장관으로 지명됐던 대슐은 949.69달러의 탈세만으로 사퇴를 했는데, 2mb 용량을 가진 양반이나 그가 지명한 탈세꾼들은 그저 몰랐다. 세금 내겠다가 끝이다. 잘못에 대한 반성이나 사과는 전혀 없고, 이제라도 돈을 내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저열한 수준의 인식 밖에 없다. 도둑질하다 잡혀놓고 돈내면 되는거 아니냐고 큰소리치는 도둑놈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면서 2mb "많은 사람들이 미국 정치를 보라는데, 말하는 사람이 미국 수준으로 갔으면 좋겠다."라는 막말을 날리신다. 자신의 수준은 퍽이나 높아서 정도인가?

 

 진정으로 분노해야 대상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못하면서, 차가운 이성으로 접근해야 문제에 대해서는 이성을 상실한 분노를 표출하는 저열함이란. 권력과 앞에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보다 힘없고 빽없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당당하게 큰소리 치는 노예근성에 찌든 자신을 제대로 보라. 결국에 그런 노예근성들 때문에 유치하고 수준 낮은 정치꾼들이 리더라는 자리를 꾀차고 당당하게 큰소리치게 만든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정책이나 법들은 제대로 만들어지지도 못하고 통과되지도 못한다. 그로 인해 벼랑 끝으로 몰린 사람들은 자살을 택하거나, 용산 사태와 같은 극단적인 방법의 투쟁을 택할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커다란 사건 사고가 터진 다음에 진정한 반성에 나온 올바른 사후 대책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오늘 뉴스에 나온 재개발관련 대책 또한 미봉책에 그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딴나라당과 2mb 무리배 집단이 용산사태가 발생했을 , 앵무새처럼 말하던 재발방지 대책이라는 것이 가리고 아웅하는 수준일 뿐이다. 그래서 이번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광분적인 분노와 분풀이로 사형을 시킨다고 한들, 2 유영철, 2 강호순이 나온단 말인가? 일시적 분풀이로 끝나는 사형이라는 것을 가지고 연쇄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에 대한 대책이 없음을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혹자는 사형을 시키면 범죄예방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엔에서 실시한 1998년과 2000 조사에서 "사형제도가 종신형과 같이 위협도가 떨어진다고 간주되는 다른 형벌에 비해 보다 살인 억제력을 가진다는 가설을 수용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자세이다."(Roger Hood, The Death Penalty: A Worldwide Perspective, Oxford University Press, third edition, 2002)라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에 그것은 근거가 빈약한 주장일 뿐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같은 보고서에는 "통계수치들이 일관되게 말해주는 것은, 사형제도에 대한 의존도를 줄인다 하더라도 급작스럽고 심각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라며, 사형제를 폐지한다고 해도 범죄율에는 변화가 없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그런데, 진정으로 우리가 집중해야 문제는 사형을 시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흉악범죄를 어떻게 하면 예방하고 줄일 있냐는 것이다. 사회가 삭막하고 각박해지는 만큼 이런 범죄의 발생 가능성은 언제나 상존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회현실과 문제를 올바로 인식하고 바꾸려는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범죄자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올바른 것이냐에 대한 생각부터 시작해야 되는 것이다.

 

 사형제가 존재하고 최근까지 집행을 일본을 경우를 보라. 2008 7 도쿄 아키하바라 거리에서 일어난 무차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무차별 살인이 10 동안 67차례 발생했고 최근에 빈도가 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건의 원인을 비정규직, 학력지상주의, 빈부 격차, 낙오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 사회 부적응 같은 것으로 보고 있는데, 문제는 우니 나라에도 이런 문제가 상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녁 운동을 하던 여학생이 괴한 무차별적인 흉기난동에 자리에서 죽고, 동사무소에 들어온 괴한이 무차별적으로 휘두른 흉기에 공무원이 사망한 사건들이 최근에 발생한 묻지마 살인 사건들이다.

 

 강호순의 단순히 살인을 즐기는 사이코패스일 뿐이라고 취급하고 본질적으로 저런 무차별 살인과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강호순 이전에 유형철 같은 희대의 연쇄 살인마들은 사회에 대한 불만을 살인으로 해소 했던 인물들이다. 결국에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지 않는다면, 사회 불만을 표출하는 무차별 살인은 물론이고 연쇄 살인, 그리고 강호순 같이 살인을 즐기는 사이코패스들의 출현을 방치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사이코패스인지를 테스트나 하고 앉아 있는 것이 우리들의 수준이고, 범죄 예방대책과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에 대한 성찰보다 사형집행을 시켜야 한다고 여론 몰이나 하고 있는 딴나당의 수준이 바로 우리들의 정치 수준이다. 그런 수준 낮은 행태에서 벗어나 진지한 문제의 고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젠 노예근성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의 문제가 무엇이고 무엇이 이런 흉악범죄를 만드는지에 대해서 개인의 환경과 그의 가정사가 아니라 사회전체의 구조적 모순점들을 고찰할 때이다. "상대를 이해하는 감정 없이 경쟁만 가르치는 사회, 이기는 자만이 추앙 받는 사회에서 사이코패스는 필연적"이라는 사이코패스 전문가 헤어 박사의 말을 곱씹으며 말이다.

2009년 2월 4일 수요일

강씨 얼굴공개 논란을 보면서

연쇄살인범 강씨의 얼굴공개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주변에 공개를 하냐고 내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는 단도 직입적으로 물었다.

 

"네가 얼굴은 알아서 뭐하게?"라고.

 

언론도 국민의 권리를 내세우면서 강씨의 얼굴을 공개하는데,

 

권리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고 알아서 뭐하겠다는 건지.

 

이런 물음에 돌아오는 답은 다음 범죄에 대한 예방이나 대비를 운운하는데, 그래서 나는 묻는다.

 

 "지금 밝혀진 범죄 사실만으로 사형이 구형될 것이고, 우리 나라가 사형집행을 하지 않는 상황이더라도 평생을 감옥에 있을 것이 뻔한 사람인데 다음 범죄는 무슨 수로?"라고.

 

거기에 한마디 덧붙인다. "나중에 네가 얼굴은 제대로 기억이나 할까?"라고.

 

정치인들의 온갖 범죄와 부정부패를 보고 지나면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과연 범죄자의 얼굴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할까?

 

그러면 되돌아오는 대답의 대부분은 "한번 얼굴이나 보고 싶었다."이다.

 

단지 호기심과 범죄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위한 명확한 목표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얼굴이 보고 싶은 것이 아닐까?

 

욕을 해도 욕할 대상의 면상이나 알고 욕해야 제대로 욕한 같은 기분이 들듯 말이다.

 

솔직해지자. 공익운운하고 알권리 운운하는 사람들아.

 

그냥 호기심과 분노 때문에 얼굴 한번 보고 싶었다고 말이다.

 

공익이나 범죄예방이나 같은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2009년 1월 29일 목요일

인생이란???

 

 인생에 대해서 한마디로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해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이 성인으로 사회에 첫발을 디디며 어리바리해 , 선배들이 신입생 환영회나 술자리에서 자신들의 인생경험이나 대학생활의 기본을 이야기하며 해주는 충고도 단지 1~2년을 앞서 생활했던 단지 그들의 경험일 뿐이다. 단지 그것들은 신입생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참고 사항일 뿐이지 신입생들의 인생이 되거나 경험이 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자신들의 무용담을 내뿜으며 자신의 인생을 자랑하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이 허풍이거나 과장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인생을 논한다는 것은 더욱 웃기는 일이다. 그러다가 이제 죽음을 앞으로 발짝씩 다가갈 비로소 자신의 삶을 조금씩 반추하며 인생의 의미를 알아가지만, '이것이 인생이다'라고 마디로 쉽게 정의 내리지 못한다. 어떻게 지나온 삶이 주는 인생의 의미를 한마디로 정의 있을까? 단지 때는 추억을 하나 하나 되씹으며 삶의 마지막을 하나씩 정리하는 순간일 뿐이다.

 

 게놈 프로젝트에 의해 밝혀진 인간의 DNA 염기서열 30 . 99.9% 같은 염기서열을 공유한 우리지만, 0.1% 차이로 ''라는 존재는 60 지구인 중에서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다. 만큼 각자의 인생 또한 유일무이하다. 일생을 살면서 서로 비슷한 인생의 순간을 잠시나마 공유하는 순간은 있을지 몰라도, 지구 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만큼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존재한다. 인생은 나만의 것이고, 너의 인생은 너만의 것이다. 만약 99.9% 같은 염기 서열 만큼, 사람들의 삶이 닮거나 비슷하다면 인생이라는 것은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이 될까? 단지 0.1% 차이가 만들어낸 인생의 다양함은 인간 사회라는 곳이 지루할 틈을 만들어준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인생을 누군가를 닮기 위해서 누군가를 뒤쫓기 위해서 아등바등 거린다.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이기를 포기한 . 부모님들이 강요하는 대로 사회가 강요하는 대로, 그들이 가라고 떠미는 인생이 최고의 인생인 처럼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인생은 그저 마음 켠에 묻어둘 뿐이다. 저승이 있고, 환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살아있는 순간보다 소중한 시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인생을 살기보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인생에 집착하면서 산다. 아무리 희박한 확률일지라도 벼락맞아서 죽는 사람이 있듯, 인생이 우리의 의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운명이 또는 운이라고 불리는 우리가 조정하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또한 우리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력을 주듯,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인생을 사는 또한 힘든 일인데도 우리는 인생을 아닌 타인에게 맡기며 살지 않았던가?

 

  다른 이들은 그저 인생을 다른 힘에 맡겨버린다.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 전부 나만의 것이지만, 누군가는 인생을 시간의 흐름에 의지하며 사는 것이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 나타나는 우연에 그저 몸을 맡기며, 자신의 인생을 운명이라고 말한다. 지나간 인생과 삶을 기억 속에 소유하지만,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서 스스로 개척하지 못한다. 그것이 인생이고 나의 운명이라는 말로. 하지만, 희박한 확률과 인생의 찰나의 순간 사건들을 가지고 전체의 인생을 운명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우리네 인생은 여전히 길다. 인생의 시간을 좋았던, 행복했던 추억만으로 우리네 인생을 채울 있다면 좋겠지만, 삶은 인생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실패라는 장애물이 어느 순간에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렇지만, 인생에 실패라는 아픔이 없다면 그런 추억들이 우리의 기억에 깊이 남아 있을 있을까? 실패라는 것을 장애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실패라는 것을 인생의 과정이자 추억으로 느낄 것이고, 그저 좌절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 마침표를 너무 쉽게 찍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인생에는 정답이 없음에도 우리는 언제나 정답을 요구하고 찾으려고 애쓴다.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인지, 탐욕이라는 괴물이 그렇게 우리를 만든 것인지, 아니면 우리 안에 자존심과 체면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돈도 많아야 하고 권력도 있어야 하는 천편일률적인 정답들. 저마다 다른 얼굴과 외모를 가진 우리들의 인생을 너무나 획일적으로 그리고 불행하게 만들어버린다. 정답이 없는 우리네 인생에 잘못 쓰여진 정답지를 과감하게 찢어버리고, 이젠 자신이 원하는 꿈과 열정으로 자신만의 정답지에 하나하나 채워 나가야 하지 않을까?

 

 위화의 "인생"이란 책을 읽고, 인생을 생각하며, 잘못 쓰여진 정답지를 찢지 못하는 못난 인간이 주저리 주저리…..


2009년 1월 7일 수요일

"평균으로의 회귀"법칙으로 본 한국사회

 학창시절 수학 교과서의 마지막에 나오는 '확률' 부분을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학기가 끝나가는 마지막에서야 나오는 부분이라 방학에 대한 설레임으로 가득 학생들의 머리 속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확률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도 대입 수능에서도 1~2문제 나올까 말까 정도의 확률과 몰라서 틀릴 확률과 알아도 맞추지 못할 확률까지 생각했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인지 3 , 수능 모의고사를 보고 서로서로 답을 맞춰 때면, 전교 1~2등을 다투던 우리 반장조차도 그냥 찍었다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할 정도였다. 반장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말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당시 우리 학급에서 확률에 대해서 명확한 개념을 이해하고 응용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금 읽고 있는 "리스크" 책에 나오는 확률이야기는 막연한 두려움과 함께 두통을 유발한다.

 

  책에서는 확률이라는 학문의 발전사가 찬찬히 설명되어 있다. 머리 아픈 부분도 있고, 재미있는 부분도 있지만, 지금보고 있는 '평균으로의 회귀'라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법칙을 발견한 사람은 콜턴이라는 인물인데, '진화론' 저자 찰스 다윈의 사촌이라고 한다. 그는 '우생학'으로 알려졌있데, '우생학'이라는 분야가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에 단초를 제공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우생학'이라는 이름에서 있듯이 콜턴은 수학분야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유전학을 연구했다. 그런 그가 '평균으로의 회귀'라는 법칙을 발견하게 것은 유전학 연구를 하던 도중에 부모와 자식들 사이의 신장 키에 대한 상관관계를 추적하면서다. 키가 작은 부모에게서 작은 자식만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키가 부모에게서 자식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그는 '평균으로의 회귀'라는  법칙을 이끌어낸 것이다.

 

 '평균으로의 회귀' 것은 무한히 커지고 작은 것은 무한히 작아지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조금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의 유명한 대사 "결국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테니깐" 비슷한 의미를 부여한다. 현실적으로 지금과 같은 경제위기의 상황에서 '평균으로의 회귀'라는 것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언젠가는 해뜰날이 있다는 희망을 제공한다. 반대로 경제 위기 전의 상황 서브 프라임 사태가 일어나기 전의 경제 활황에서는 '언젠가 경기침체가 오겠지'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책에서는 평균으로의 회귀가 헛된 지침이 수도 있는 3가지 이유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 평균으로의 회귀는 경우에 따라 과정이 너무 느려 도중에 어떤 충격으로 인해 붕괴될 위험이 있다는 . 둘째, 어쩌면 회귀가 너무 강력해 일단 평균에 도달하면 안정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반복적으로 평균 주변을 동요시켜 양쪽에 불규칙한 일탈을 만들 수도 있다는 . 마지막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평균 자체가 불안정해 어제까지만 해도 표준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오늘은 전혀 모르는 새로운 것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음과 , 좋고 나쁨 등이 되풀이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장 내일이라도 번영이 찾아오리라고 사정하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일이라고 한다.

 

  부분을 읽다가 문득 드는 생각은 2가지 이유가 우리가 겪고 있는 지금의 현실과 너무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번째와 번째는 이유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평균으로의 회귀가 잘못된 결과를 야기할 것이라는 것이다. 번째 이유부터 살펴보면 뉴또라이를 홍위병으로 2mb정부의 역사왜곡을 비롯해서 과거의 전면적인 부정을 보면 된다. 광복 이후 겨우 10년만을 극우들이 좌파라고 부르는 중도 우파들이 정권을 잡았을 뿐인데, 그것을 가지고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화려한 정치적 수식어(딴나라당의 홍준표의원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것은 단지 정치적 수사라고 말했다.) 만들어 내어 10년의 역사를 완전히 부정하면서 온갖 잡다한 권력을 동원해서 과거의 평균으로 강력한 회귀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정치, 사회, 그리고 경제까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은 민주주의를 20 뒤로 후퇴시켰고 말한다. 경향신문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60%이상의 국민들이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여전히 불씨가 존재하는 촛불을 본다면 권력과 편법을 동원한 평균으로의 강력한 회귀는 결국 강력한 역풍이 밖에 없다. 이런 역풍의 현상을 있는 것이 최근에 일어난 민주당의 국회점거 사태이다. 새로운 법에 대한 토론이나 합의 과정은 전혀 거치지 않고 12 31 국회통과라는 데드라인까지 정해놓고 1주일 전에 상정하는 파렴치한 행위는 다수당이라는 힘만을 믿고 그들이 생각하는 평균으로의 회귀를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파장은 극한 충돌을 일으켰고, 국민의 민의를 대표한다는 국회의 권위를 스스로 깎아 내렸다. 그로 인해서 사회 갈등은 증폭되었고, 결국에 많은 시민들은 12 31일에 다시 촛불을 들었다. 많은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후퇴를 한탄하면서.

 

  번째 이유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문구보다 잃어버린 민주주의 20년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된다. 박정희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박정희와 비교하면서 민주주의의 평균을 찾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평균이라는 것은 아주 낮은 수준의 점수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에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평균과 김대중, 노무현 시절의 평균은 엄청난 점수차이를 벌이고 있는 상황인데 지금은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평균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이야기 하고 있으며, 평균을 목표로 사회를 회귀시키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경제 정책에서 그대로 문제점을 드러낸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토목, 건축이라는 평균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겉으로는 녹색성장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붙이고 있지만, 녹색 성장의 세세한 내용 상당수가 토목, 건축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규제철폐나 부자감세 같은 시장주의라는 목표에 대해서 그대로 잘못된 인식을 드러나고 있다. 미국 경제의 붕괴 이유가 시장의 실패라고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야기를 해도 한국에서는 여전히 시장 만능을 외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거기에 추종하는 사람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분명 미국을 보면서 정확하게 인식했다면 시장에 대한 평균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있을 텐데도, 여전히 2mb 그의 무리배들은 시장에 대한 평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잘못된 평균으로의 회귀는 나중에 미국의 경제위기나 일본의 잃어버린 10 같은 상황을 불러올 것이 뻔한데도 말이다.

 

 "평균으로 회귀"라는 법칙으로 우리 사회를 본다면 우리는 강력한 추동력을 바탕으로 하는 평균점 회귀와 잘못된 평균으로 회귀라는 가지 상황에 그대로 직면해 있다. 결국에 지금 사회에 나타나는 좌우의 갈등이라는 것이 평균으로의 회귀하는 가운데서 강력하게 발생하는 이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평균은 단지 독립적인 사실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다른 사실이 첨가되면 관측된 사실과 거의 일치하는 하나의 완전한 정상구조가 잠재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라는 골턴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필요가 있다. 자세하게 말한다면 "평균으로의 회귀를 과거에서 기계적인 추정을 이끌어내는 그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보다 나을 없다. 현재 내린 가정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 지속적인 의문 없이는 절대로 평균으로의 회귀만 믿지 마라."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평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의논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