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16일 금요일

억압받는 여성들의 이야기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고....

천 개의 찬란한 태양 - 10점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현대문학

 

 아담과 이브라는 하나의 조상에서 분화되어 지금 우리는 존재하고 있다. 하나의 기원을 가진 우리지만 사는 지역에 따라서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며 관습 또한 다르다. 이런 차이를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인간의 옹졸함에 우리는 수 많은 갈등 속에서 살고 있다.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온 갓 멸시와 차별을 가한다. 힘이 강한 남성은 힘이 약한 여성에게 수 많은 폭력을 가해도 그것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되기도 한다. 종교가 가르치는 자비, 사랑, 평화와 같은 것들은 그들이 믿는 신의 명령이라는 이름아래서 무참하게 짓밟힌다. 그들에게 신이란 이름은 자신들의 욕망과 야욕이라는 뱃속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많은 부를 가진 이들은 신에게 수 많은 재물을 가져다 바치며 자신에게 더 많은 부를 달라고 애원한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뿐 그들이 불법과 탈법으로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것을 당당하게 여긴다.


 하나의 인간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라는 계층이 가지 있는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지만,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대접받는다. 그렇지 못하면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다른 계층의 또 다른 인간일 뿐이다. 만약 그가 우리보다 더 높은 계층의 인간, 즉 돈이 더 많거나 지위가 더 높다면, 우리는 그를 우러러본다. 그와 같은 계층에 들어가기 위한 열망으로 그들이 지나왔던 또는 해왔던 일들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쫓아가려 한다.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 아니라 더 높은 계층이다. 행복은 높은 계층에 있다고 착각하면서……. 만약 그가 우리보다 낯은 계층의 인간이라면, 우리는 그를 얕보거나 멸시하며 차별을 가한다. 단지 낮은 계층에 있다는 것이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미천한 존재일 뿐이다. 세상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인간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이렇게 계층을 나눠서 타인을 대한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계층 안에서 위로 받고 안식을 취하며 더 높은 계층을 향한 욕망의 힘으로 차별적인 세상을 전진한다.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기에 우리가 쉽게 인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계층의 피라미드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 계층의 최하위에는 언제나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하나는 여성이고 하나는 어린이다. 그들은 언제나 전쟁이란 파괴적인 행위 속에서 가장 고통 받는 이들이고, 종교의 잘못된 교리가 만들어낸 차별세상에서 가장 고통 받는 이들이며,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세상에서 가장 고통 받는 이들이다. 이러한 차별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만들어 낸 것이다. 결국은 남성보다 힘이 약한 어린이와 여성들은 남성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으며, 사회가 아무리 선진화 되고 발전을 한다고 해도 이 문제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하물며 여전히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는 주요한 가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쟁이 여전히 진행중인 곳, 그리고 가부장제가 여전히 강한 힘을 발휘하는 곳에 사는 여성들의 삶은 얼마나 처참할까?


 아프카니스탄 여성들에게 바치는 할레드 호세이니의 책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계층의 최하층에 위치한 아이였다가 여성이 되는 마리암과 라일라를 통해서 계층의 가장 아래에 있는 이들의 비참한 삶을 보여준다. "내 딸아, 이제 이걸 알아야 한다. 잘 기억해둬라.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 바늘처럼, 남자는 언제나 여자를 향해 손가락질을 한단다. 언제나 말이다. 그걸 명심해라."라고 어머니가 딸에게 전해준 말로 종교와 가부장이 만들어낸 사회에서 억압받는 여성들의 한 맺힌 삶을 마리암과 라일라를 통해서 보여준다. 거기에 전쟁과 굶주림까지 더해지면서 계층의 아래에 사는 이들의 실상을 낱낱이 보여준다.


 출생에서부터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수 밖에 없던 마리암은 그녀의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 혈연과 혈통을 중시하는 가문의 천덕꾸러기다. 그래서 많은 나이 차이에 이미 사별을 경험한 라시드와 강제로 결혼을 하게 된다. 그 부분에서 저자는 복선을 하나 남겨둔다. "마리암이 27년 후에 어떤 서류에 서명을 할 때도 율법학자가 참석해 있을 것이다."라고. 하나는 27년이라는 기간 동안 마리암이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암울한 암시와 27년 후에는 그녀의 삶이 다르게 변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이 긍정적인 것인 부정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긍정적인 기대로 복선을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결혼 생활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그 과정에서 아프칸의 역사적 사건들이 다양하게 겹쳐지면서 마리암의 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다.


 라일라는 마리암과 달리 교육자인 아버지 밑에서 다양한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하지만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 것은 전쟁이다. 전쟁이 얼굴조차 기억하기 힘든 오빠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고, 결국에는 부모님마저 죽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부상을 입은 그녀는 마리암의 남편 라시드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너무 어린나이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녀는 혼자 힘으로 세상을 헤쳐갈 용기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라시드와 결혼을 하고 두 번째 부인이 된다. 그로 인해 마리암은 라일라를 향해 질투를 하게 되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는 마리암을 대신해서 라일라가 아이를 낳게 됨으로써 그 여자는 모성애라는 하나의 공통점으로 뭉치게 된다. 마리암과 라일라는 우정과 모성애로 똘똘 뭉치게 되고 라시드로 대표되는 억압과 폭력에 대항할 힘과 용기를 가지게 된다.


 라시드로부터 도망을 가기 위해서 차곡차곡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버스표까지 구입을 하게 되지만, 탈레반이 집권하며 만들어낸 감치체제와 더 강력해진 가부장사회는 두 여인을 좌절하게 만든다. 사실 그 쯤에서 두 여인의 고통이 끝나기를 바랬었는데, 또 다시 억압과 폭력으로 두 여인을 몰아넣는 저자 호세이니가 얄미웠다. 결국에는 두 여인이 라시드를 살해하기에 이르는 상황까지 만들어 버린다. 라일라의 어린 시절 연인인 티리크가 두 여인과 그들의 아이들에게 구세주가 되기는 하지만, 마리암은 라일라와 아이들이 무사히 도망칠 수 있도록, 자기희생적 모성애로 자수를 한다. 결국 저자가 소설의 초반에 깔았던 복선은 마리암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서명한 곳은 판결문이었다. 마리암은 사형을 당하게 되면서 한 많았던 인생을 마감한다. 전쟁과 가정폭력, 굶주림에 이르기까지 시대상황과 맞물린 끝없는 고통 속에서 마리암이 맛본 행복은 라일라와의 우정과 모성애다. 마리암의 고생에 비해서 초라하기만 한 행복의 순간을 보면서 마리암을 가혹한 고통 속에 몰아넣는 작가가 야속하기만 하다.


 반면 라일라는 아프카니스탄을 떠나서 안정된 생활을 하지만, 탈레반 정권이 몰락하면서 다시 귀국을 결심한다. 귀국과정에서 마리암이 살았던 곳에 들러서 마리암의 체취를 느끼고, 마리암의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편지도 읽게 된다. 그리고 카불의 고아원에서 그곳 아이들을 위한 선생님이 된다. 그 순간에 마리암이 자신의 가슴속에 천개의 찬란한 태양으로 빛나고 있음을 느끼면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서 행복하지도 희망에 차지도 않는다. 탈레반의 세력이 점점 확대되면서 안전하다고 여겨지던 카불에서도 폭탄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뉴스를 접했기 때문이다. 현실은 여전히 마리암과 라일라 같은 여성들에게 자유와 희망을 주려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소설의 결말과 같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삶에 절망하지 않고 현실과 맞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마리암과 라일라 같은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현실은 어둡더라도 인간이 가지는 삶의 의지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으로 어둠을 걷어내고 세상을 밝혀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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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12일 월요일

공부도둑이 들려주는 공부이야기 "공부 도둑"을 읽고....

공부도둑 - 10점
장회익 지음/생각의나무

 

 우리에게 공부의 의미는 무엇일까? 출세를 하기 위한 도구이자 길? 아니면 좀 더 높은 계층을 위한 필요조건? 공부를 왜 해야 하는 기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보다는 이와 같이 미래의 지위나 부를 위해서 공부하기를 강요당해왔다. 우리들의 부모나 지금의 우리는 공부의 의미보다는 공부가 가져다 주는 소수의 결과를 맹신하고 시험으로 줄 세우는 경쟁사회로 자신과 아이들을 채찍질 한다. 결국에는 공부의 진정한 의미나 재미를 느껴보지 못한 채 의무감이나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공부를 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한 공부 일지라도 깊이가 있는 것이면 좋겠지만, 공부하고 있는 학문의 참된 정수를 깨닫는 공부를 하는 사람은 얼마 없다. 이해와 깨달음이 있는 진정한 공부보다는 지식의 암기에만 열중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기억된 지식의 테두리 안에서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게만 되고 다양한 학문과의 응용뿐 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기존 지식의 틀을 벗어나면 당황하는 한계를 만들어낸다. 개인들은 천만원이 넘는 등록금을 대학에 쏟아 부으며 공부를 하지만, 대학의 학문과 기업이 요구하는 학문의 괴리가 커서 기업들이 신입사원들의 재교육에 많은 돈을 재투자하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공부에 쏟아 부으면서도 다른 한쪽에서 학력이 계속 저하된다고 아우성이다. 학생들을 더 공부시켜야 된다며 말하고 0교시를 부활하고 학원의 교습시간제한 마저 폐지하자고 외친다. 더 많은 공부를 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맹신한다. 지나친 학습부담에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세계최고인 나라에서 더 많은 청소년들이 자살하도록 강요한다. 왜 학력이 떨어지는 것일까에 대한 물음은 둘째 치더라도,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은 왜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하는 공부는 객관식 시험에서 점수를 얻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다. 우리를 줄 세우고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것 방법에 대한 공부에 몰입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스스로를 공부 도둑이라고 칭하는 저자는 지금의 공부가 득점전략에만 머무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득점 전략은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겨냥하는 데에 있다. 이것을 잘하지 못하면 득점 경쟁에서 낙오한다는 것이 이들의 논지이다. 이는 언뜻 옳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여기서 잃는 것은 학습의욕과 학업능력이다. 결국 종이 위에 적히는 득점 수치를 위해 교육의 본질인 의욕과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결국 우리의 지금 공부법은 학습의욕과 학업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학력저하까지 부른 것이다.


 처음부터 공부론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만, 이 책은 공부론에 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저자의 공부 역사책이다. 평생을 물리학 학자로서 살아온 저자가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그 기록을 통해서 자신만의 노하우나 경험, 그리고 공부에 대한 지혜를 펼쳐 보인다. 그 중에 득점전략으로서의 공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득점전략적 공부를 배제했던 자신의 경험으로 얻은 공부법을 "오히려 시험과 무관하게 공부했기에 내 나름의 능력을 기를 수 있었고, 이렇게 길러진 능력이 시험에서도 그 효과를 발휘한 것뿐이다. 그렇더라도 시험에 앞서 준비를 안 할 수는 없는데, 이때 작은 노력만으로 큰 효과를 보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면서 터득한, "혼자 힘으로 공부하는 법"을 통해서 단편적인 지식을 넘어서는 학문의 정수에 접근하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대학을 가서도 혼자서 공부하는 법을 알지 못해서 또 다시 학원을 전전하는 현대인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결국 지금의 많은 현대인들은 진정한 학문을 추구하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는 이유는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학문은 점수를 따기 위한 학문이 되어 버렸다. 결국 우리는 저자가 말하는 학문의 요체라고 불리는 자유보다는 기존의 완성된 이해의 틀 안에 우리의 사고를 속박하고 있다. 그래서 그 틀 안에서 성취와 보상을 추구만 할 뿐 자유로운 사고를 통해서 학문의 영토를 확장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해보다는 단편적인 정보나 지식의 암기에, 지혜보다는 지식만을 추구하게 된다. 글로벌 인재가 부족하게 되는 것도 다양한 학문의 바다를 자유롭게 넘나들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환경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의적인 인재보다는 수동적이며 기존의 학문이나 사고의 틀에 박힌 근대적인 인재들이 넘쳐나게 된 것이다.


 현대인들은 자연계의 다위니즘을 공부에까지 끌어왔다. 그래서 경쟁은 당연한 것이며,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고, 학원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 아이들이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고 이기기 위해서 하지만 공부라는 것이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게임이 아니라 학문을 알아가고 지혜를 배워가는 과정이다. 저자는 공부와 학문에 만연한 경쟁만능주의 세태에 대해서 "학문은 기여이고 협동이지 결코 경쟁이 아니다. 경쟁이라는 것은 함께 취할 수 없는 소수의 목표를 놓고 서로 취하겠다고 다툴 때 나타나는 것인데, 학문의 목표는 결코 한두 사람이 취하면 없어지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학문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학문이 기여이고 협동이라는 것을 모르고 경쟁에만 매달리기는 것이 아닐까?


 공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세상에 저자의 공부 역사 이야기는 많은 지혜를 내포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을 "공부도둑"이라고 불렀지만, 내가 보기에는 "공부도사"다 스스로 도를 닦아서 득도한. 저자가 들려주는 공부이야기는  경쟁으로 인해 목적과 방향을 잃은 현대인들에게 망망 대해에서 길을 안내할 북극성이 되어 준다. 그냥 저자의 역사로 읽어도 재미있고, 그 역사를 통해서 저자가 말하는 공부론에 대한 이야기도 유익하다. 단 마지막에 있는 온생명과 낱생명, 그리고 우주론에 관한 이야기는 지루하고 딱딱하기는 하다. 하지만 자신의 전공을 넘어서 철학, 생물학, 동양사상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관심과 깊이 있는 학문에 대한 성찰은 질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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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4일 일요일

20~30대 좀비들 보다 지금의 10대들이 좋은 이유

 

 나도 20~30대의 좀비다. 다른 좀비들과 다른 것은 그래도 나는 나의 권리이자 의무인 선거권을 포기한 적이 없다. 그것으로 나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지만, 나 또한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겨 살 수 밖에 없는 좀비다. 그래서 익명성이라는 인터넷 속에서만 찌질이 같은 글을 써 갈기지만 현실세상에서는 그냥 침묵한다. 하지만, 나보다 더한 좀비들은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마저 상실했으며, 돈이면 도덕과 사회 정의라는 것을 그냥 짓밟아 버린다. 그나마 난 비판정신은 살아 있으나 실천하지 못하는 반만 좀비라고 애써 위로해 본다.


 20~30대들의 좀비들이 자신들이 좀비가 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항변한다. 비정규직으로 이리저리 내몰리며 윗 세대들의 착취를 당하고, 백수에 실업자로 남아서 자신의 이상을 펼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대학 등록금은 1000만원을 돌파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공부할 기회마저 박탈당할 위기에 있다. 그 뿐인가? 학벌사회가 만들어 놓은 높은 장벽아래서 그저 좌절만 할뿐이다. 우리가 좀비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다 사회의 탓이다.


 암기식 교육을 강요하고 학교라는 사육장 속에서 사회의 비판의식마저 키우지 못한 좀비들이 사회를 탓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저 세상에 대해서 순응하는 것만 배워온 우리 좀비들이 반항이나 꿈꿀 수 있겠는가? 가장 민주적인 의식을 가진 386세대들 조차 쉽게 변심해버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그 밑의 20~30대 좀비들은 롤모델마저 찾을 수가 없다. 윗 세대에게 찍혀서 사회진출의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것보다 그냥 좀비로 사는 것은 다음을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안전할 뿐이다.


 지금의 우리 좀비들이 사회의 주도층으로 부상했을 때 만들어질 좀비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일관성의 법칙으로 자신들이 좀비로써 살아온 길들이 언제나 최적의 길이고 최선의 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밑의 세대와 자식들을 물어서 그들 조차 좀비들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좀비가 되어야지만 좀비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세상을 바꿀 방법조차 모르게 될 것이다.


 나도 좀비이지만, 이런 좀비들이 정말 싫다. 세상을 한탄하며 불쌍한 척하는 좀비들이 정말 싫다. 나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좀비가 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의식은 몸서리 칠만큼 싫다. 좀비가 좀비 일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자신들이 좀비라는 것을 스스로 알았으면 좋겠다.


 반면에 이번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로 붉어진 촛불집회를 보면서 우리 밑의 세대들은 좀비가 아님에 나는 그들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좀비가 아니였다. 2mb 탄핵 서명을 주도하는 네티즌은 10대이고 촛불집회에 교복을 입고 당당하게 참석해서 사회문제를 비판한다. 그들은 사회에 관심조차 없고 의식조차 하지 않은 좀비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좀비 처럼 살아가는 내가 부끄럽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열렬히 사랑하게 만든다. 그들은 2002년에 애국심이라는 이유만로 뭉친 20~30대의 좀비들과는 전혀 다르다. 사회의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좀비 처럼 변해가는 세상을 향해서 당당하게 그들의 소리를 외친다.


 비겁한 20~30대의 좀비들은 그들을 향해서 말할 것이다. 아니 세상을 좀비 세상으로 만들고 있는 기성세대들은 그들을 향해서 말할 것이다. 학생들은 공부나 하라고, 어린 것들이 뭘 알겠냐고 말이다. 비겁한 좀비들의 옹졸함과 편협함은 좀비정신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들 좀비가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만 해대는 졸렬함의 표현일 뿐이다. 나이라는 편협한 숫자로 자신들보다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편협함은 좀비 정신의 또 다른 발현으로 것은 좀비들만이 가지는 정신이다.


 지금의 10대들이 세상과 차단 당한 채, 좀비교과서가 만들어내는 편협한 세상을 공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공부이고 학습인가? 그것은 좀비들이 그들을 물어서 같은 좀비로 만드는 범죄일 뿐이다. 10대들도 당당하게 정치의식을 표현하고 자신의 주장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것이 올바른 공부고 학습이다. 자신들의 인생에 대해서 부모 좀비들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당당하게 주인이 되는 것이 올바른 학습이고 공부다. 앞으로도 좀비교육에 대해서 아니 좀비들의 공격에 대해서 당당하게 맞서는 10대들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