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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31일 목요일

이제는 우리 안의 "공정성"이라는 심리적 기제를 깨야 할 때. 책 "야성적 충동"을 읽다가 문득.

 

 읽으면서 책이 조금 어렵다고 여겼던, "야성적 충동"을 다시 읽기 위해서 빼 들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책을 음미하면서 읽자는 생각이 첫 번째 이유요. 두 번째 이유는 지금은 이 책을 이해하는데 조금은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아직 몇 페이지 읽지는 않았지만, 역시 내 머리 속에 지우개는 무적의 성능을 자랑한다. 희미하게 지워졌던 기억은 어렴풋이나마 내용이 떠오르면서 이해의 깊이나 생각의 깊이를 더할 여지를 주지만, 백지처럼 지워져 버린 기억은 책의 내용이 새롭게 느껴지게 만든다. 이 책을 이해하지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더라도, 읽은 후에 리뷰를 써가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느낌을 남겼더라면 더 많은 기억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책의 리뷰를 쓴다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작업이고 고역이기에 쉽게 쓸 수가 없다. 그렇게 리뷰를 쓰지 않고 넘어갔던 책들만 해도 너무 많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책들에 대한 리뷰는 억지로라도 썼어야 한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여기까지 잡설은 끝내고, "야성적 충동"의 한 요소인 "공정성"이라는 놈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렇다고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이 책의 주제와 비슷하게 행동 경제학적 관점으로 본 거시경제에서 "공정성"에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님을 우선 말해야겠다. 왜냐하면 나는 경제학도도 아니고 여전히 이 책 "야성적 충동"을 읽고 있는 중이며, 그렇다고 읽은 부분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야기 하려는 것은 최근에 자주 가는 사이트에 고민 상담 게시판의 고민과 거기에 대한 답변을 보면서 느낀 것들이다. 그리고 거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공정성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서 문득 책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들을 글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우선 이 책에 나온 "공정성"에 대해서 설명부터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선 경제학에서는 공정성이 필요한 부분이 "교환이론"이다. 우리가 물건을 거래할 때, 물물교환의 시대에는 거래하는 각각의 물건의 가치가 비슷해야지 거래가 성립한다. 화폐가 교환의 매개물로써 활용되고 있는 현재에는 교환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화폐가치가 된다. 즉 물건의 가치가 화폐로 환산되고, 그렇게 환산된 화폐가치를 통해서 물건과 교환이 이루어진다. 물물교환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교환이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물건이 가지는 화폐가치를 구매자가 화폐로 지불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즉 물건이 가치는 화폐가치와 지불된 화폐가 같을 때, 공정할 때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회학에서도 "공정성"을 다른 이론이 있는데 그것을 "형평이론"이라고 한다.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끼리끼리 논다"고 말로 모든 것을 축약할 수 있다. 이 말은 자신의 수준이나 능력에 맞게 사람을 사귀는 경향을 말한다. 즉 인간관계에도 어느 정도의 공정성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보통 자신의 능력이나 처지보다 나은 사람을 친구로 하면 알게 모르게 사람이 움추려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친구에게 받은 것에 비해 자신은 그것 만큼 친구에게 줄 수 없기에 스스로 그 차이를 인식하고 미안한 생각에서 표현된 것이다. 그 차이를 채우기 위해서, 잘사는 친구에게 과도하게 친절하거나 아부를 하는 것을 통해서 공정하게 만든다.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앞에서 수동적이고 작아지는 순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본다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어떤 문화권에서 여성처럼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왜 순종하는 지 설명한다"고 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사회학에 있는 공정성 이론인 "형평이론"이다. 특히 저자들의 "어떤 문화권에서 여성처럼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왜 순종하는 지 설명한다"는 부분이다. 도대체 어떤 고민이기에 내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입시"문제에 질문과 답변을 보면서다. 대체로 "학벌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비판하면서도 질문하는 사람이나 답변하는 사람이나 스스로가 철저하게 "학벌사회"의 굴레에 순응하고 산다는 점이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디려는 고3 학생들이야 사회를 보는 시선이 부족하고 철저하게 주입식 교육으로 단련되어 있기에 그렇다곤 쳐도 20대들의 답변 자체는 실망 자체였고, 화가 났다.(그 사이트가 20대가 많이 이용하는 사이트다.)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바꾸려고 발버둥 치기보다는 사회에 순응하는 20대들의 패기 없음에 크게 실망했다. 가장 혈기 왕성해야 하고 가장 도전적이면서 사회의 문제에 "대듦"을 해야 할 이들이 죽어 버린 것이다.

 

 결국 그들은 문제에 대해서 욕만 할 줄 알았지,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열망도 없는 순응자가 되었고, 노예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해 자신의 발전가능성 또는 잠재력을 억누르면서 살게 된다. 결국에 그들이 비판하고 욕하는 "학벌사회"라는 것은 "형평이론"틀 안에서 본다면 스스로가 만든 것이 되어 버린다. 자신의 낮은 학벌을 만회하기 위해서 높은 학벌과 대결할 실력을 기르기보다는 그 학벌체제 안에서 순응하면서 스스로가 높은 학벌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정하기 위해서 비겁한 처신하거나 순응하는 것이다. 결국 저자들의 "어떤 문화권에서 여성처럼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왜 순종하는 지 설명한다"문장은 결국에 특정 문화권의 여성에게만 한정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 된다.

 

 공정성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심리적 기제를 자극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계층을 만들고 학벌사회를 만든 추동력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나쁜 세력이 자신의 기득권을 이용해서 만들어 낸 사회의 모순이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가 공정성이라는 틀 안에 갇혀 만들어낸 자기파괴적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단지 기득권들은 그런 결과물을 최대한 활용해서 자신들의 이익추구에 매진 했을 뿐이라는 것이 된다. 결국 우리가 먼저 싸워야 될 것은 사회의 모순이나 문제이기 보다는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공정성이라는 심리적 기제가 아닐까? 자기 안에 공정성이라는 심리적 기제의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하는 순간, 사회에 존재하는 모순과 문제점에 대해서 제대로 된 "대듦"을 할 힘을 얻게 될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깨어있는 인간이 되어 사회의 모순이나 문제 "대듦"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참고 서적 :

 

 

야성적 충동 - 10점
조지 애커로프, 로버트 J. 쉴러 지음, 김태훈 옮김, 장보형 감수/랜덤하우스코리아

2009년 8월 31일 월요일

우리는 선천적인 맹인들.....

 

 "옛날, 한 임금이 온 나라 안의 소경들을 불러, 궁중의 마구간으로 데리고 가 코끼리를 구경시켰다. 그런데 앞을 못 보는 그들은 손으로 더듬을 수밖에 없어서, 코끼리의 다리를 만진 자도 있고, 코를 만진 자도 있고, 귀나 꼬리를 만진 자도 있었다. 구경을 마친 뒤에 그들은 코끼리의 생긴 모양을 놓고 의견을 교환했다. 그런데 그 다리를 만진 자는 코끼리가 큰 기둥처럼 생겼다 했고, 그 코를 만진 자는 동아줄과 같다 하고, 그 귀를 만진 자는 키와 같다 하고, 그 꼬리를 만진 자는 큰 지팡이 같다 하여 서로 다투었다. 이는 실물을 보지도 못한 소경들이, 각기 제 생각이 옳은 줄 자신한 데서 온 결과이다. 그 본 바가 적고 경험한 것이 확실치 못한 주제에, 나는 그 진리를 잘 알고 있다 자처하는 사람들도, 역시 이런 부류라 하겠다."

 

 불경의 한 구절이다. 소경 즉 맹인에 비유해서 일반 중생들의 무지에 대해서 비웃는 대목이다. 인간이라는 종족의 특징이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을 이미 꿰뚫어 본 구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진리 또는 진실인양 믿는다. 그래서 거기에서 벗어난 어떤 진실이나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떻게든 변명거리를 만들어서 자신이 믿고자 하는 것을 진리이자 사실로 만들어 버린다. 자기 스스로가 벽을 만들어서 어떻게든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보호하려고만 한다.

 

 그래서 자신이 믿는 것과 비슷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를 하며, 집단을 만들고, 그래서 자신이 가진 진리와 믿음을 깨뜨리려는 사람들에게 거침없는 공격까지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진리를 추구하던 인간의 욕망과 속성은 이제 진리의 보호나 수호에 바쁘다. 그것이 진리나 사실이라는 명확한 증거보다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기에 지켜야만 되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배움에 대한 방향도 진리와 사실의 추구가 아니라 믿음을 방어하는 지식의 습득에 그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보는 것은 위의 문장처럼 코끼리 전체를 이해하기 보다는 일부분만을 이해한 채 자신은 스스로 진리를 알고 있다고 우쭐대기 바쁘다.

 

 위대한 성인이라고 불리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재판 변론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도 저 무한한 우주의 티끌 정도가 아니던가? 과학의 발전이라는 것도 지금 축적된 지식이라는 것도 우리의 지식으로 모르는 것을 알고, 그것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쌓였던 축적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인류가 축적한 지식과 진리를 다 알지 못한다. 우주의 티끌 정도 축적한 인류의 지식과 진리 중에서 미세먼지 보다 더 작은 정도의 지식만 알고 있을 뿐이다. 즉 우리는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모르는 것이 더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얼마나 우리의 지식이라는 것이 보잘것 없는가?

 

 그래서 불교경전에서는 끊임없는 배움을 강조한다. 소크라테스 또한 자신의 지식을 잘난 채 하기 보다 평생을 배움을 추구했다. 세상의 진리라고 말하는 것 진리나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들이 어느 순간엔가 진리가 아닐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배움을 끝없이 추구하고 진리나 사실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에 대해서 의심과 의문을 제기하며 스스로 진리와 사실을 검증해야 한다. 지금의 얄팍한 지식에 만족하며, 모든 진리나 사실을 알고 있다고 젠체하지 말고, 끝없는 배움을 추구하는 자세로 의심하고 의심하고 검증하고 또 검증해야 한다.

 

 ps> "미수다"에 출현한 베라가 독일에서 출간했다는 책의 내용이 어떤 블로그에 의해서 알려지고, 그 내용을 언론에서 기사화 되었다. 그 기사의 댓글은 참 가관이었다. 제대로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고 기사화하는 병신 기자들과 거기에 동조하는 극우주의 병신들이 설치는 꼬라지란……. 그 만큼 우리 사회는 사실에 대한 확인을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믿으려는 믿음이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더해서 극우주의 병신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까지….. 시간이 지나면서 잘못된 번역이라는 증거들이 하나 둘 씩 다른 블로거들에 의해서 밝혀지고, 그러다가 우연히 불교경전에서 저 문구를 읽고 생각을 정리해 본다.

2009년 8월 24일 월요일

"사직의 쥐새끼"와 "맹구"

 

 처음 독서에 관심을 가지고 많이 읽은 책들은 경영서니 자기계발서 같은 책들이었지만, 요즘은 개인적으로 그런 책들을 피한다. 읽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듯한 느낌과 성공지상주의만을 자극하기에 일부러 피한다. 그런 책들을 읽는다고 저자나 저자가 말하는 이상향이 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능력과 성향들이 그것들과 맞지 않는데 굳이 그것을 추구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 "사기의 경영학"이라는 책도 보려고 의도했던 책은 아니다. 공짜로 들어온 책이기에 손에 잡고 읽었다.

 

 이 책은 동양 고전인 사기의 내용을 분석해서 현대 리더들이 본받아야 될 것들을 정리한 책인데, 온고지신의 정신이 기발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읽다가 지금의 시국상황과 기가 막히게 맞는 이야기가 2개 나온다. '사직의 쥐새끼'이야기와 '맹구'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합쳐서 '사서와 맹구'이야기라고 한다. (참고로 개인적으로 아무리 그 인간을 싫어해도 2mb를 특정동물에 비유해서 비하하는 짓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쥐새끼도 그 인간이 아니다.그리고 쥐가 아니라 쥐새끼라고 하는 것은 그냥 책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일 뿐 개인적 감정과 무관하니 오해를 마시길….)

 

 우선 "사직의 쥐새끼"이야기를 보면,

 환공이 관중에게 나라를 다스리는데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관중은 환공에게 "사직에 살고 있는 쥐새끼가 가장 문제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환공이 "왜 그 쥐를 염려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사직을 어떻게 짓는지 보셨습니까? 큰 기둥을 세우고 보기 좋게 색을 칠합니다. 그런데 쥐새끼가 그 기둥에 파고들어가 삽니다. 문제는 이 쥐새끼를 잡으려고 불을 놓을 수도, 물을 부을 수도 없다는 것 입니다. 자식의 기둥이 타거나 색이 상할까봐 그렇지요. 그래서 이 쥐새끼는 제거하기 아주 어렵습니다."라고 관중이 대답했다. 이에 환공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관중에게 쥐새끼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무슨 관계냐고 물었다. 이에 관중은 군주 곁에 있는 환관들의 존재가 쥐새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 환관의 행태를 쥐새끼와 비유하는 자세한 글들이 있으나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기에 여기까지…..

 

 "맹구" 이야기는 더 간단하면서도 메시지는 강력하다.

 송나라에 술을 파는 사람이 있었는데, 술 맛도 뛰어나고 손님에게 친절하며 고객에 대한 배려도 뛰어났다고 한다. 가게홍보에 많은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가게에 손님이 거의 없어 파리만 날리게 된 것이다. 그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가게 주인은 마을의 양천이라는 노인에게 찾아가 그 이유를 물었다. 노인은 "당신 집 개가 사납지요?"라고 물었다. 주인은 개와 손님과 무슨 상관이냐며 물었더니, 노인은 개가 하도 사납게 구니 사람들이 겁이 나서 안가는 것이라고 가르쳐줬다고 한다.

 

 전직 국세청장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국세청 직원을 파면시켜버리는 국세청이나, 다음 아고라에 비판적인 글을 게시했다고 직원을 알아서 징계하고, 전임 사장에게 없는 죄를 만들어서 몰아내는 kbs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전임 대통령이 서거하셨다는 소식이 나오자마자 광장을 막아서는 견찰들 등등…. 지금 기억나는 것 말고도 찾아보면 무수히 많은 사나운 개와 쥐새끼들이 설쳐대고 있다. 마치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은 것 처럼 설쳐대는 꼴을 보니 "사직의 쥐새끼"와 "맹구" 이야기가 그렇게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렇다고 국민과 소통을 하겠다고 하면서도 소통하지 못하고 사나운 개와 쥐새끼들에 둘러싸인 2mb가 환공이나 송나라 술장수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2mb라고 "사직의 쥐새끼"나 사나운 개와 무엇이 다를까? 그저 섬김을 받아야 할 국민들만 고달프고 힘들 뿐이다.

2009년 7월 18일 토요일

이걸 읽으면 몇몇 인간들이 생각난다.

 

 "남보다 더 강해지고 싶은 과도한 권력욕은 어린아이의 정신생활을 기형적으로 발달시킨다. 안정을 도모하고 권력을 성취하려는 욕구가 극도로 고조되면 용기는 무례함으로, 공손은 비굴함으로 변할 수 있으며, 애정은 타인의 양보와 굴복, 그리고 복종을 강요하는 책략이 될 수 있다."  - 알프레드 아들러, 책 "인간이해" 중에서.......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생각나던 인간이 한 명 있었다. 그러다 검찰총장 인사청문회와 국세청장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이 문장에 확실한 믿음이 생겼다. 왜 그런 인간들인 수 밖에 없는지를........ 그런데 너무 서글프다. 그런 인간을 지지하는 30%가 넘는 인간들도 결국 저런 인간이라는 것을...... 그 인간과 저런 인간을 지지하는 인간들의 차이라면 단지 권력을 성취하지 하고 못하고의 차이랄까?

 

 

 

교칙이란게 없는 나라.

 

 교육의 모범국가로 꼽히는 핀란드에는 학교에 교칙이 없다고 한다. 이것을 알았을 때 놀랐다. 교칙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에 놀란 것이 아니라, "교칙 없이 학생들을 어떻게 관리하지?"라는 물음이 내 머리를 스쳐지나 가기에 놀랐다. 내 안의 권위 의식이랄까? 학생을 하나의 인격체로써 나와 같은 평등한 존재로 본 것이 아니라, 성인 아래에 있는 미숙한 인격체로 생각하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해서 놀랐다. 웬만해선 학생들의 편에서 서서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그들을 응원한다고 생각했는데, 학생을 관리의 대상 감시의 대상 규제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나의 내적 인식에 대해서 놀랐다. 변명이라면 성인이 되기 이전에 받아온 세뇌교육과의 대결에서 나는 아직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나 보다. 우리 사회의 가장 비열한 모습이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모습이 아니던가. 개인적으로 그런 모습 아주 경멸하는데, 내 안의 그런 모습이 남아 있음에 아직 내 내공이 부족함을 느낀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약자는 비정규직이나 기초생활수급자들이 아니라 미성년 학생들이라고 본다. 많은 학생들은 부모의 보호아래 있어서 냉혹한 약육강식의 사회로 보호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 보호라는 미명하에 가해지는 폭력으로부터 그들은 보호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어떤 자유로운 결정권이 없다. 근거도 없이 머리가 길면 학습에 방해된다 거짓말, 그리고 그 머리길이에 따라 행해지는 폭력은 마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또 다시 비난이나 비판이 가해진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자신이 가지겠다는 주장에 어떤 비난이나 비판을 가할 수 있단 말인가? 미성년자라고 그런 선택권을 박탈한 근거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단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외모 형태 그게 싫으면 그만이지 자유를 박탈해서 억압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거기에 신발에 대한 규제, 심지어 어떤 곳은 가방에 대한 규제를 하고 있다. 웃기는 것은 이런 규제를 찬성하는 인간들은 특성고교나 특성화 중학교를 만들어서 학생의 선택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이라는 거다.

 

 학생의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과 자유를 박탈하는 인간들이 웬 뜬금없는 학교 선택권인가? 말이 좋아 학교 선택권이지 결론은 자신들의 자녀나 자기들이 보다 좋은 계급의 위층을 차지하기 위한 특권을 달라는 것이 아닌가? 가장 기본적인 개인의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과 자유를 박탈하면서 그 아래 학교 선택의 자유를 달라.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말이 좋아 학교 선택의 자유권이지 그게 무슨 자유인가? 학벌사회라는 썩어빠진 계층구도를 강화하고, 자신들은 그 구도 속에 편입되어 특권을 누리겠다는 기득권적 시각을 가지고 말이다. 약아빠진 기성세대들은 신세대들의 반란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썩어빠진 계층구도에 학생들을 종속시키기 위해 미리부터 그런 계층에 대한 인식을 학생에 편입시키고, 학생들은 자라면서 지켜봐 온 더러운 세상의 생존전략을 몸으로 체화 시킴과 동시에 순응하면서 만들어낸 합작품이 지금의 학벌사회고 우리의 경쟁사회가 아니던가?

 

 연세대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공연이 계획되었을 때, 반대하던 재학생의 논리를 보면 이런 전략이 얼마나 잘 먹히는지를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뭐 그렇게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자신의 입신양면을 위해서 고시공부를 하는 것을 "희생"이라고 말하는 천박한 인식은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희생"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천박하게 쓰는 인간이 소위 말하는 명문대 생이라니.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떠들어 대는 "인재(人材)"라는 것이 이런 것이라니. 학생들의 기본적인 자유권을 철저하게 탄압하면서, 학창시절에 해야 할 자신과 사회에 대한 고민, 그리고 관계에 대한 고민들을 완전히 배제해버림으로써, 우리의 교육은 인재(人材)를 치운 것이 아니라 인재(人災, disaster)를 키워 왔다. 스폰서 검사 천성관이라는 인간이나 투기꾼이자 탈세꾼인 백용호라는 인간이나, 맨 위에 2mb라는 인간이나 그들의 행태나 비리, 그리고 하는 짓거리를 보면 그들이 인재(人災, disaster)라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수 많은 애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인재(人災, disaster) 생산에 몰두하고 있다. 시험의 나락으로 학생들을 몰아넣으며,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학생들에 대해서 사랑의 매라는 폭력으로 폭력을 정화까지 한다. 그리고 낙오자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멸시와 차별을 가하면서, 우리 내부에서 폭력에 대한 익숙함과 차별에 대한 정당성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경쟁의 내면화로 인해서 수 많은 청소년들은 자살하는 인재(人災, disaster)를 만들어 낸다. 그 뿐인가 많은 성인들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 자살하는 인재(人災, disaster)를 만들어내고 있다. 왜 그럴까?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은 "우리 공교육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재능은 뭐고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곰곰이 사유하고 각성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공교육이 그거하란 건데. 하여 서른 넘어서도 자신이 누군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 수두룩하다."라고 했다. 결국에 지금의 교육시스템은 한 사람의 인격체를 만들어내는데 실패한 것이다.

 

 결국, 경쟁이 최선이라는 교육철학, "1명이 10만명을 먹여살린다"라는 인재에 대한 썩어빠진 인식으로 만들어진 지금의 시스템은 지속적인 인재(人災, disaster)를 생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핀란드는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소국은 점점 심한 경쟁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민 전체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합니다."라는 교육철학과 인재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한 명의 낙오자가 없는 평등교육을 실천하면서 아이들의 방황이나 실수에 대해서 관대하다. 당연히 그 때는 그렇게 방황하고 실수를 해야 나중에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학교에 교칙이라는 것이 없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오직 자유만이 위대한 사람을 낳을 수 있다. 이와 달리 강요는 죽음과 파멸을 낳는다."라고 했다. 이제 학생에게 자유를 주자. 방황할 자유, 자신의 신체에 대한 자기 결정의 자유, 실수할 자유를.

 

 

책 "핀란드 교육법"을 읽다가........